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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정권이 불러낸 ‘지연된’ 시대정신

Jimie 2021. 3. 19. 06:48

[박정훈 칼럼] 문 정권이 불러낸 ‘지연된’ 시대정신

 

윤석열은 法的 정의
이재명은 분배 정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대중이 지지하는 것은
윤·이 개인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선점한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이다

박정훈 논설실장

입력 2021.03.19 03:20 | 수정 2021.03.19 03:20

 

모든 시대엔 시대를 관통하는 지배적 가치가 존재한다. 동시대인(人) 대다수의 염원이 투영된, 그리하여 한 시대를 견인해가는 보편적 정신 체계 말이다. 헤겔을 위시한 독일 관념 철학자들은 이를 ‘시대정신(Zeitgeist)’이라 이름 붙였다. 시대정신의 발현을 통해 역사가 진보한다. 그러나 정작 시대의 한복판에선 시대정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헤겔은 설파했다. 숲을 벗어나야 숲이 보이듯 “시대가 끝날 때 비로소 시대정신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지난 5일 차기 대선 후보 적합도 조사에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32.4%, 이재명 경기지사가 24.1%로 각각 1, 2위에 올랐다. /뉴시스

 

문재인 정권이 끝나가는 지금, 우리가 간절히 염원하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뚜렷해졌다. 그것은 공정과 정의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기회의 공정함, 결과의 정의로움이다. 빅데이터 분석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 빅데이터 기업이 2019년 한 해 동안 온라인에서 언급된 정치 분야 키워드를 분석했더니 ‘공정’과 ‘정의’의 비율이 57%에 달했다. 2019년은 조국 사태가 불거진 해다. ‘흑석 선생’ 김의겸을 필두로 고위 공직자 부동산 의혹도 잇따랐다. 지난해엔 두 키워드 비율이 67%로 더 높아졌다. 검찰 해체, 윤미향 의혹, 집값 대란 등이 꼬리 물고 이어진 결과일 것이다. 대중 분노가 폭발하면서 공정과 정의는 사회적 관심을 태풍처럼 집어 삼키고 있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지배적 이슈가 됐다.

 

시대정신은 그 시대가 열광하는 사람을 통해 투영된다. 대권 양강 구도를 형성한 윤석열과 이재명에서 우리 시대가 원하는 시대정신의 얼개를 추론해낼 수 있다. 왜 두 사람에게 지지가 몰릴까. 윤석열은 법적 정의, 이재명은 분배 정의를 각각 상징하는 인물이다. 윤석열은 살아있는 권력 수사로 법치의 아이콘이 됐고, 이재명은 ‘기본 시리즈’로 평등의 가치를 선점했다. 리더십의 진짜 실체가 어떤지를 떠나 두 사람은 공정·정의의 대변자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지지하는 것은 윤·이 개인이 아니라 그들로 표현되는 시대정신이다. 대중이 염원하는 시대적 가치에 두 사람이 올라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정과 정의를 시대정신으로 불러낸 장본인이 문 정권이다. 기가 막힌 역설이지만, 세상을 더 불공정하고 더 불평등하게 만듦으로써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했다. 문재인 국정 4년은 불공정의 에피소드로 가득 찬 세월이었다. ‘정의 담당’ 법무장관에 ‘아빠 찬스’의 조국, ‘엄마 찬스’의 추미애를 앉혀 정의의 가치를 웃음거리로 희화화했다. ‘위안부 장사’ 의혹의 윤미향, 부도덕한 기업인의 전형인 이상직에게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주고, 온갖 자리에 자기편을 갖다 앉혔다. 끊임없이 반칙과 특혜 논란이 불거져도 단지 우리 진영이란 이유만으로 비호했다. 반칙의 대명사가 된 조국을 ‘미안하다”며 감싸는 대통령을 보며 사람들은 공정의 가치마저 내로남불이 된 세상을 목격하게 됐다.

 

문 정권은 민주주의의 기본 중 기본인 법치(法治)를 진영 논리의 하위 개념으로 전락시켰다. 대통령의 30년 지기를 당선시키려 청와대가 총출동해 선거에 개입한 혐의가 드러났다. 대통령 지시를 받은 산업부가 원전 폐쇄를 위해 수치를 조작하고 말 안 듣는 공무원에게 “너 죽을래” 협박한 사실도 밝혀졌다. 일련의 권력 범죄에 대해 검찰이 칼을 대자 수사팀을 해체하고 검찰총장 수족을 잘라냈다. 그래도 검찰이 저항하자 아예 수사권을 떼어내 공수처와 경찰에 넘겨 버렸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언(法諺)은 말짱 헛소리가 됐다. 권력이 법 위에 군림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기회는 공정하지 못했고 결과는 더욱 불평등해졌다. 저소득층 일자리가 사라지고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면서 빈부 격차가 사상 최악으로 벌어졌다. 유례없는 집값 급등은 청년과 서민층을 영원한 무주택자로 전락시켰다. 좋은 일자리의 희망도, 내 집 마련 꿈도 사라진 서민들은 빠져나올 기약 없는 빈곤의 감옥에 갇혀 절망하고 있다. 이 정권은 국민을 향해 “모두가 용이 될 필요는 없다”며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의 삶을 권유했다. 그래 놓고 정작 자기들은 반칙을 서슴지 않으며 특혜의 사다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상실된 공정과 무너진 정의에 대한 분노가 쌓이고 쌓여 폭발한 것이 LH 사태다.

 

지금 우리가 갈망하는 공정과 정의는 ‘지연된’ 시대정신이라 할 만하다. 5년 전 많은 국민을 광장에 나가게 한 시대정신이 바로 공정과 정의였으니까. 그것은 촛불 혁명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문 정권에 맡겨진 시대적 숙제였다. 문 정권이 그 과제를 풀고 미래를 향한 다음 시대를 열었어야 했다. 바깥 세상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문명의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과거형 문제에서 졸업하고 미래형 시대정신으로 넘어갔어야 할 나라가 아직도 못다한 공정·정의의 과제에 매달려 있다.

 

시대정신에 역행한 문 정권이 공정과 정의라는 지연된 시대정신을 불러냈다. 불공정과 불평등의 국정으로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막은 문 정권은 시대정신의 배신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