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ese Arts

一握の砂 と 初恋

Jimie 2020. 11. 21. 07:49

一握の砂 (한 줌의 모래) 와 初恋 (첫 사랑 )~~~

뉴서란 | 조회 116 | 2014.11.22. 06:01

 

倍賞千恵子「初恋( はつこい)

一握の砂 (한 줌의 모래) 와 初恋 (첫 사랑 )~~~

 

 

作詞 石川啄木  作曲 越谷達之助

昭和49年7月10日発売

倍賞千恵子日本の詩をうたう Vol.4(SKD210)に収録

 

"하츠코이" 노랫말은

26세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시인, 石川啄木(いしかわたくぼく; 이시카와 타쿠보쿠)의 시, 『一握の砂 (いちあくのすな;한줌의 모래) 』이다.

* 啄木 (たくぼく:타쿠보쿠)--딱따구리*

初恋( はつこい)

**************************

 

砂山の砂に 砂に腹這い
初恋の いたみを
遠く 思い出ずる日

初恋のいたみを 遠く遠く
ああ ああ 思い出ずる日

砂山の砂に 砂に腹這い
初恋の いたみを
遠く 思い出ずる日

 

くり返し

 

 

첫사랑

****************

 

모래산 모래에 모래에 엎드려

첫사랑의 아픔을 아득히 회상하는 날

첫사랑의 아픔을 아득히 아득히 회상하는 날

 

모래산~~~ 회상하는 날

 

반복

 

 

 

 

石川啄木像

하코다테 오오모리 바닷가

 北海道(ほっかいどう) 函館市 (はこだてし)大森浜 (おおもりはま) 啄木小公園(たくぼくしょうこうえん)

~호ㅊ카이도. 하코다테시. 오오모리하마(바닷가).  타쿠보쿠 소공원~

 

1907년 (메이지 40년) 이시카와 타쿠보쿠가 하코다테에 이주하여 오모리 바닷가에서 모래 사랑 노래를 읊은 것을 기려,

1958 년 (쇼와 33 년), 오오모리 바닷가를 따라 "타쿠보쿠 작은 공원"을 정비하고 조각가 *本郷新 작품의 이시카와 타쿠보쿠의 동상을 세웠다 .

 

*本郷新 (ほんごうしん) 조각가, 札幌 출신, 高村光太郎에게 사사

 

 

を愛する歌   자기를 사랑하는 노래 

 

石川啄木 이시카와 타쿠보쿠 

 

 

     東海の小島の磯の白砂に       동해 작은 섬 바닷가 백사장에     

     われ泣きぬれて           나 울다 눈물에 젖어

   蟹とたわむる          게(㙰)와 노닌다

 

 

  頬につたふ          볼에 흐르는

なみだのごはず           눈물 닦지 않고

             一握の砂を示しし人を忘れず        한줌의 모래 내밀던 사람 잊지 못하네

 

 

   大海にむかひて一人            바다를 바라보며 홀로

七八日             칠팔일

泣きなむとすと家を出でにき          실컷 울리라 집을 나서다   

 

 

 

痛く錆びしピストル出でぬ         몹시 녹슨 피스톨 나왔네

砂山の            모래산

       砂を指もて掘りてありしに           모래를 손가락으로 파고 있는데

 

 

ひと夜さに嵐来たりて築きたる         하룻밤 새 폭풍 불어 만들어진

この砂山は           이 모래산은

     何の墓ぞも          무슨 무덤인가

 

 

砂山の砂に腹這い               모래산 모래에 엎드려

初恋の             첫사랑의

いたみを遠くおもひ出ずる日             아픔을 아득히 회상하는 날      

 

 

砂山の裾によこたはる流木に          모래산 기슭에 가로누운 流木에

あたり見まはし           사방 둘러보고     

物言ひてみる             홀로 중얼거린다

 

 

 

いのちなき砂のかなしさよ          생명 없는 모래의 슬픔이어

さらさらと         주르륵     

   握れば指のあひだより落つ          쥐면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네

 

 

しつとりと        촉촉히     

なみだを吸へる砂の玉        눈물 머금은 모래알   

なみだは重きものにしあるかな         눈물은 무거운 것이기도 하구나

 

 

大といふ字を百あまり       큰대자를 백여 개     

     砂に書き          모래에 쓰고 

死ぬことをやめて帰り来たれり       죽기를 단념하고 돌아왔노라  

 

 

石川啄木 (いしかわたくぼく,이시카와 타쿠보쿠1886-1912)1886년 이와테켄(岩手県) 南岩手郡 日戸(ひのと)村에서

조코지( 常光寺) 주지의 맏아들로 태어나, ,1912년 26세 2개월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시인이며 가인(歌人)이다.

 

타쿠보쿠의 본명은 하지메(一)이며, 중학교 재학중에 요사노 아키코와 잡지 묘조(明星)의 낭만주의 문학에 영향을 받아 타쿠보쿠라는 필명으로 등단하였다. 모리오카중학교 중퇴.

 

1905년에 낸 처녀시집 <동경>은 그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무렵 타쿠보쿠는 호리아이 세츠코와 결혼하여 생활인으로서 현실문제에 직면하게 되자 고향 시부타미(渋民,岩手縣) 마을로 돌아가 모교에서 임시교사로 일하게 된다.

 

1906년 자연주의적인 소설 <구름은 천재이다>를 발표하고, 다음 해인

1907년에는 가족과 함께 훗카이도로 건너가 하코다테, 삿포로, 오타루 등등을 전전하며 유랑하였다.

1908년 단신으로 도쿄에 상경하여,

1910년에 처녀가집 <한 줌의 모래>를 간행함으로써 가인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후 사회주의사상에 몰입하여 평론 <시대폐색의 현상(1910)>을 쓰고, 시집 <호루라기와 휘파람(1911)>을 간행하였으나, 1912년3월에는 어머니가 폐결핵으로,1912년 4월에는 그 자신이 빈곤과 폐결핵으로 인하여 도쿄 고이시카와구의 셋집에서 죽음을 맞았고 1913년 5월에는 그의 아내 세츠코도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이듬해 6월에 두 번째 가집 <슬픈 완구>가 간행되었다.

26년 2개월의 짧은 생애에 4000여수의 단가를 남긴 그의 시는 13개국어로 소개되어 애송되고 있으며 일본 전국에는 110개의 시비등 동상이 있다.


타쿠보쿠는 결코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시가는 후대의 가인들에게는 물론 수많은 시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또한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작품 <한 줌의 모래>는 1908년부터 1910년까지 지은 단가 중에서 551수를 모아 수록한 타쿠보쿠의 첫번째 가집이다. 타쿠보쿠는 <한 줌의 모래>의 모두에 서문을 쓰고, 551수를 각각 [나를 사랑하는 노래], [연기], [가을 바람의 상쾌함에], [잊지 못할 사람들], [장갑을 벗을 때] 등 5개의 장으로 나누어 관념 연상의 방법으로 편집하였다.

< 한 줌의 모래>의 매력은 가난하고 학대받는 사람에 대한 인간애와 인간의 슬픔과 아름다움을 평이하고 쉬운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제1시집 <憧憬>. 처녀소설 <구름은 천재이다> 간행. 생활고에 시달리며 문필생활을 시도하나 여의치 못하고 3행으로 마무리되는 독특한 短歌集 <한 줌의 모래>를 간행. 그 감상적인 서정으로 후세 오래 애송되고 있다. 여기 소개한 작품은 그 중의 일부이다.

또한 도키 아이카의 영향으로 단가를 3행으로 나누어 쓴 것도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大森浜 (오오모리 바닷가)

大森浜(おおもりはま)は、北海道函館市海岸である. 住吉漁港より湯の川温泉松倉川河口付近までの津軽海峡に面している。

오모리 바닷가 (오오모리 하마)는 홋카이도 하코다테 해안 이다.  住吉漁港 스미요시 어항에서  湯野川温泉(ゆのかわおんせん) , 松倉川(まつくらがわ) 하구 부근까지의 津輕海峽(つがるかいきょう) 에 접해있다.

                                             하코다테 · 立待岬たちまちみさき에서 본 오모리 바닷가 (2003 년 9 월)

 

砂山 (모래 산 )

과거 이 일대 (현재高盛마을, 일출 마을)에는 쓰가루 해협에서 운반되어 생긴 높이 30 미터, 동서 1 킬로미터, 남북 300 미터의 모래이 있었고, 오오모리는 그 모래가 수북히 쌓인 "おおもり [大盛り] "에서 명명되었다.

* 음식 "꼽배기"도 오오모리라고 함.

 

모래에는 해당화 가 피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전쟁전, 青函連絡船(せいかんれんらくせん)세이 칸 연락선 통신용 무선 송신소가 있었지만, 1934 년 하코다테 대화재로 소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모래에 구멍을 파고 세운 *掘立小屋(ほつたてごや)으로 「사무라이 부락」 「모래 부락」이라고 불리는 지역이었지만 전후 사철(砂鉄)을 체취. 모래 부락은 붕괴되고, 掘立小屋도 퇴거하여 현재는 그 모습은 없다 .

*掘立て小屋(ほつたてごや): 허술한 집, 판잣집

 

函館大森浜の砂山(1940年代後半の撮影と思われる。)『一握の砂』巻頭10首の舞台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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