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悲しき玩具 (かなしきがんぐ,슬픈 장난감)』
『悲しき玩具』(かなしきがんぐ、東雲堂書店、1912年6月20日)は、日本の歌人、石川啄木の個人歌集。
本文136頁、あとがき(土岐哀果)3頁。歌数194首、エッセイ2編。
啄木の没後(1912年4月13日没)に刊行された。
歌集名「悲しき玩具」は、歌集を編纂した友人哀果(善麿)が啄木の歌論風エッセイ「歌のいろ/\」(この歌集に収録)の末尾の一文から採ったものである。一般にカナシキガングと訓まれるが、啄木本人の生前の意図ではカナシキオモチャであったとい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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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의 시 장르는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기본 음수율이 5·7·5·7·7음인 단가(短歌), 5·7·5음인 하이쿠(俳句), 자유율의 자유시가 그것이다.
단가 시인은 가진(歌人), 하이쿠 시인은 하이진(俳人), 자유시는 시진(詩人)이라 칭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쿠보쿠는 가진이며 시진이지만, 본 역서에서는 한국어로 편의상 통칭해 시인으로 번역했다.
일본에서 다쿠보쿠는 시진보다 가진으로서 평가가 높다.
다쿠보쿠가 남긴 단가집으로는 ≪한 줌의 모래(一握の砂)≫와 ≪슬픈 장난감(悲しき玩具)≫이 있다.
이 단가들을 일본 근대 문학사에서는 보통 생활파 단가라 한다. 일반적으로 단가는 연애 감정이나 풍경 등을
주요 소재로 했는데, 다쿠보쿠가 처음으로 일상을 소재로 삼았던 것이다. 도시 서민의 일상적 빈곤이 소재가 되었고,
아내와 자식, 가족 간의 갈등이 소재가 되었다. 단가의 영역이 일상으로 확대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까닭이다.
이러한 서민적 감성은 특히, 일본이 패전한 후 경제 복구를 위해 고생한 세대들에게 더욱 사무치게 느껴졌다.
고생한 세대들에게 다쿠보쿠의 단가는 시적 문학적 표현 능력이 부족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현대적 의미에서
대중가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애호가들이 많았다. 후술하지만 다쿠보쿠의 시는 시대를 아우르는 감흥을
느끼게 해 준다. 다쿠보쿠가 국민 시인이라 불리는 이유다.
다쿠보쿠의 작품에는 시대를 아우르는 매력이 있다. 젊은이들의 경제적 애환을 표현한 시, 무주택 도시민의 소박한
꿈을 표현한 시, 사회주의 문학의 선구적 사상을 표현한 시, 자본주의가 집적된 비인간적인 도시의 속성을 표현한 시,
가난하고 평범한 생활 환경 속에서 인내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서정적 긴박감을 표현한 시, 일본의 과거사를 반성하게
하는 시 등은 오늘날의 독자가 봐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진솔함이 배어 있는 작품들이다.
슬픈 장난감-이시카와 다쿠보쿠 단카집
단가(短歌)
제1장 한 줌의 모래(一握の砂)
1. 나를 사랑한 시(我を愛する歌)
2. 연기(煙)
3. 가을바람의 상쾌함(秋風のこころよさに)
4. 잊을 수 없는 사람들(忘れがたき人人)
5. 장갑을 벗을 때(手套を脫ぐ時)
제2장 슬픈 장난감(悲しき玩具)
일해도
일을 해도 여전히 내 생활 나아지지 않네
물끄러미 손바닥 바라보네
はたらけど
はたらけど猶わが生活樂にならざり
ぢつと手を見る
고향 사투리 그리워
기차역 인파 속으로
사투리 들으러 간다
ふるさとの訛なつかし
停車場の人ごみの中に
そを?きにゆく
슬픈 장난감-이시카와 다쿠보쿠 단카집
청춘, 여기서 스러지다
‘천재’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마지막 노래
당대의 수많은 요절 작가들을 만들어낸 병, 폐결핵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몸져누운 채 친구이자 편집자인 도키 아이카를 집으로 부릅니다. 병마에 시달려 흐리멍덩한
눈을 한 채로 친구를 맞이한 다쿠보쿠는 한 권의 노트를 그에게 건네줍니다.
제목도 없이 194수의 단카가 실린, 작가 자신이 ‘음산한 노트’라고 부른 그 노트는 도키 아이카 손에
쥐어졌고, 다쿠보쿠는 그에게 “만사를 잘 부탁한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꿈을 쫓으며 작가로서의 성공을, 더 나은 세상을 바랬던 다쿠보쿠는 그 어느 것도 이뤄지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1912년 4월 13일 오전 아홉 시 삼십 분 경에 눈을 감습니다. 26년 동안의 짧은 생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다쿠보쿠는 되려 그가 세상을 떠난 그 시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서부터 전개된
이야기는 어떤 역사적 아이러니에 가깝습니다. 도키 아이카의 손에 들린 ‘음산한 노트’는 다쿠보쿠의
문학론이 실린 두 편의 산문 「어느 이기주의자와 친구의 대화」, 「단카에 관한 여러 가지」와 함께
그의 최후의 단카집 『슬픈 장난감』으로 만들어져 발표됩니다. 그리고 『슬픈 장난감』은 『한 줌의 모래』
와 더불어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재발견을 이끌면서 다쿠보쿠는 죽음과 함께 불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지독한 슬픔으로 만들어진
지독한 세상을 위한 슬픈 위로
『슬픈 장난감』에 실린 단카들은 다쿠보쿠가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 속에서 특정한 큰 주제로 묶여지지
않은 채 자유롭게 쓰여진 편린들입니다. 그렇다 보니 그 특유의 생활감은 여전히 살아있으되 전작인
『한 줌의 모래』에서 보여줬던 서정성은 매우 희박해졌습니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는 것은
슬픔과 고통, 가난과 허무입니다. 어딘지 처연해지는 제목인 『슬픈 장난감』부터가 산문 「단카에
관한 여러 가지」의 마지막 구절인 ‘단카는 나의 슬픈 장난감이다’라는 글에서 따온 것입니다.
따라서 ‘슬픈 장난감’은 자연스럽게 정형시로서의 단카를 슬픈 언어유희로 바라보는 저자의 정서를
짐작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감정들 대부분이 고통스러운 생활에 대한 감상과 허무를 향한 이끌림이긴 하지만,
동시에 생이 끝날 때까지 미래를 추구하는 굳은 심지 또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병을 심각하게 앓으면서도
사회 혁명을 말하며 미래를 향한 열망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은 허무와 냉소와는 또 다른 영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쿠보쿠의 문학이 보여주는 메타자아로서의 성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이중적 측면과 그 모순을 직시하는 태도야말로 다쿠보쿠의 문학적 특징입니다.
石川啄木(이시카와 다쿠보쿠)
1886년(메이지 19) 일본의 동북 지역인 이와테현에서, 승려의 아들로 태어나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일본의 승려는 일반적으로 대처승으로 가족이 있다).
모리오카(盛岡)중학교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이며 시작(詩作) 활동을 활발히 했으며, 조숙하게도
후일 아내가 되는 세츠코(節子)와 연애에 열중하기도 했다. 졸업을 반년 앞두고 중학교를 중퇴해, 학력 사회가
되어 가는 근대 일본 사회에서 불리한 인생길을 걷게 된다.
중학교를 중퇴한 다쿠보쿠는 문학적 재능을 입신의 기회로 삼고자 시, 문학 서평 등을 분주히 발표한다.
그러나 다쿠보쿠의 아버지가 호토쿠사 주지직을 파면당하면서, 이후 그는 생활고와 싸우며 문학의 길을
걸어야 했다.
1905년 20세 때, 시집 ≪동경(あこがれ)≫를 발간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 그것이 생활에 보탬이
되지는 않았다. 당시는 글을 써서 생활할 수 있는 소위 프로 작가들이 탄생하기 전이었고, 그나마 신문이나
상업 잡지 등에서 관심을 보인 것은 소설류였기 때문이다.
1907년 22세 때, 다쿠보쿠는 생활의 패턴을 바꾸어 보고자 홋카이도에 건너가 임시 교원, 신문 기자 등을 하며
생활인으로서 동분서주해 나름대로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의 안정은 곧바로 문학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음을 자각시켰고, 약1년여의 홋카이도 생활을 뒤로한 채 다쿠보쿠는 상경 길에 오른다.
마지막으로 문학적 인생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
상경 후, 다쿠보쿠는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열심히 소설을 쓴다. 당시는 자연주의 문학이 성행하던 시기로
리얼리즘이 소설의 중요한 요소였는데, 다쿠보쿠의 소설은 낭만주의적 성향의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다쿠보쿠 자신의 생활이나 발상이 다분히 현실적이지 못하고 낭만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팔리지 않았고, 다쿠보쿠는 문학적 좌절과 생활고에 허덕여야 했다.
다쿠보쿠는 많은 수의 단가를 지으며 현실적 고뇌를 잊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 무렵 쓴 단가들은 후일 그의 대표 가집인 ≪한 줌의 모래(一握の砂)≫에 수록된다.
1909년 3월 24세 때, 다쿠보쿠는 생활을 위해 고향 선배의 도움으로 도쿄아사히신문사 교정 직원으로
취직하게 된다. 그리고 홋카이도의 가족을 맞이해 비로소 일가 단란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것도 잠시,
그해 가을 생활고와 고부간의 갈등을 참지 못한 아내 세츠코가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출하는 일이 벌어진다.
얼마 후 아내는 돌아오는데, 이 일을 계기로 대단한 충격을 받은 듯, 다쿠보쿠는 친우에게 보낸 편지에
‘나의 사상은 급격히 변했다(僕の思想は急激に?化した)’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평론에 잘 나타나고 있다. ‘생활의 시(食ふべき詩)’에서는 공상적 시인의 발상을 버리고
현실적 감각에 의한 문학 추구를 주장한다. ‘가끔씩 떠오르는 느낌과 회상(きれぎれに心に浮んだ感じと回想)’
에서는 국가 권력을 강권으로 이해한 면모가 드러나 있다. 당시 국가의 실체를 강권으로서 인식한 문학자는
매우 드물었다. 이러한 국가 인식은 다음 해에 쓴 <시대 폐쇄의 현상(時代閉塞の現狀)>의 하나의 기반이 된다.
25세 때인 1910년 초여름, 대역 사건이라 칭하는 사회주의자 탄압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다쿠보쿠는 여기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공부를 하고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배경 아래 그해 8월,
<시대 폐쇄의 현상>을 집필하게 된다. 이것은 메이지 제국주의 사회 모순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당대
최고의 평론이라 할 수 있다.
그해 12월 다쿠보쿠는 일본 근대 문학사에 그의 이름을 각인한 단가집 ≪한 줌의 모래(一握の砂)≫를 간행한다.
이 단가집에 담긴 대부분의 단가들은 1910년에 쓴 것으로, 도시 생활의 애환을 그린 것과 추억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후세의 문학 연구가들은 이 단가집의 단가를 평해서, 다쿠보쿠식 단가 또는 생활파
단가라 칭했다.
이듬해 다쿠보쿠는 점점 병약해져 대학 병원에 입원하기 까지 했다. 그러는 가운데 문학적 의지를 보이며
시 노트 ‘호르라기와 휘파람(呼子と口笛)’을 작성한다. 혁명에 대한 동경과 생활인으로서의 꿈이 그려져 있어
분열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 시 노트는 시집 발간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었으나 다쿠보쿠 생전에 빛을
보진 못했다.
다쿠보쿠의 병세는 더욱 악화해 더 이상 집필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마침내 1912년 4월 13일
26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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