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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삼백리 낙동강의 절경 안동의 고산정

Jimie 2022. 10. 3. 01:22

천 삼백리 낙동강의 절경 안동의 고산정

 

  • 입력 2022.07.08 12:53
  • 수정 2022.08.22 16:05

 

기자명 신정일 기자
 
 
                                                                  안동 단천마을 부근의 낙동강 (사진=신정일 기자) 

 

태백시 천의봉 너덜샘은 낙동강 천삼백 리의 발원지이고, 그곳에서 황지천을 따라 10km를 내려간 곳에 있는 황지읍 중심지에 있는 황지(黃池)가 상징적인 발원지이다.

2001년 한국의 10대 강 도보 답사 네 번째로 낙동강을 걸을 때 첫날은 잘 데가 없이 봉화의 분천까지 64km를 걸었고, 둘째 날은 명호까지 40여km를 걸었다.

 

셋째 날 명호에서 청량산 자락을 지나며 오래전 이곳 청량산을 찾았던 주세붕의 말을 떠올렸다.

 

“이 산은 둘레가 백 리에 불과하지만 산봉우리가 첩첩이 쌓였고 절벽이 층을 이루고 있어 수목과 안개가 서로 어울려 마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또 산봉우리들을 보고 있으면 나약한 자가 힘이 생기고, 폭포수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약한 자가 힘이 생기고, 폭포수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욕심 많은 자도 청렴해질 것 같다. 총명수를 마시고 만월암에 누워 있으면 비록 하찮은 선비라도 신선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산 전체가 국가 명승으로 지정된 청량산은 퇴계 이황이 오산당(吾山堂)이라는 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으로 ‘나의 산’이라는 당호처럼 진성 이씨의 종중산이다.

주세붕 선생의 말처럼 욕심을 조금만 더 버리면 행복할 것인데, 그 욕심 때문에 세상은 항상 어지럽다.

오백여 년 전에 살았던 퇴계 이황은 도산서원에서 낙동강을 따라 청량산을 오가며 어떤 생각들을 하며 오고 갔을까?

퇴계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어느 날 금문원(이름은 난수蘭秀로 퇴계의 제자)의 집에 갔는데 산길이 몹시 험했다. 그래서 갈 적에는 말고삐를 잔뜩 잡고 조심하는 마음을 놓지 않았는데, 돌아올 때에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갈 때의 그 험하던 것을 아주 잊어버리고, 마치 탄탄한 큰 길을 가듯 하였으니, 마음을 잡고 놓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고 하였다.

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학봉 김성일의 말이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 매사가 다 그렇다.

안동시 도산면 낙동강변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정자 고산정을 짓고 살았던 금난수의 집을 찾았던 이황의 모습이 그림처럼 눈에 선하다.

그런데 그 오랜 세월이 지나는 그 사이 스승인 퇴계도 가고 제자인 금난수도 떠난 지가 오래도 한참 오래다.

그래, 오고 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고 사람의 마음이 변하고 또 변하는 것 역시 세상의 이치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 봉화를 지난 여정이 안동시 도산면에 접어들었고, 마을에 접어들면서 나는 숨이 멎을 듯한 풍경에 발을 멈췄다.

한 마리의 흑염소가 풀을 뜯는 그 너머에 그림같은 풍경이 나의 눈, 아니 영혼을 사로잡은 것이다.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 정말 아름답구나” 괴테의 ‘파우스트’의 한 구절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풍경, 한 발 한 발 걸어갈 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절경을 보며 나는 사흘 동안 아프게 걸어온 그 순간들을 까마득히 잊을 수가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가송협 부근의 낙동강은 어느 경치에 견준다 해도 빠지지 않을만큼 빼어나게 아름답다.

다비드르 브르통은 ‘걷기예찬’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민주적인 것이기 때문에 만인에게 주어진다”고 이야기했는데,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의외로 적다.

강 건너에 깎아 지른 듯한 단애(斷崖)아래 한가롭게 자리 잡고 있는 고산정(孤山亭)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퇴계 선생의 제자인 금난수(琴蘭秀)(1530∼1599) 선생이 지은 정자이다.

그는 명종 19년(1564)에 이미 예안에서 ‘성재’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다가 예안현의 명승지 가운데 한 곳인 이곳 가송협에 고산정을 짓고 ‘일등정자’라 하였다.

고산정은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칸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이곳은 경치가 빼어나서 안동팔경(安東八景)중에서 가장 빼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고, 퇴계 선생을 비롯하여 수많은 선비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던 곳이다.

지금도 이 정자에는 퇴계 선생의 시와 금난수 선생의 시 등이 남아 있다.

금난수의 본관은 봉화(奉化)이고. 자는 문원(聞遠)이다. 호가 성재(惺齋)인 그는 고산주인(孤山主人)으로 알려져 있다.

                                                   안동의 퇴계 오솔길 (사진=신정일 기자)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에서 태어난 금난수는 아버지로부터 ‘소학(小學)’을 배우고, 임천서당(臨川書堂)에서 강학하던 청계(靑溪) 김진(金璡)에게 수학하였다.

계당(溪堂)에서 김진과 함께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강의를 들으면서 공부에 힘썼다.

퇴계에게 배운 ‘심경’은 금난수가 평생 동안 가슴 속 깊이 아로새긴 책이었고, 그런 연우로 퇴계가 도산서당을 건립할 때 ‘도산서당영건기’를 짓기도 했다.

명종 16년인 1561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그는 선조 10년인 1577년에 제릉참봉을 비롯하여 집경전참봉을 지냈다.

그 뒤 직장, 장례원 사평을 지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에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성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1599년 봉화현감에 임명되었다.

금난수의 나이 35세 때인 1564년에 안동 예안면(禮安面) 부포리에 종택을 지었다.

그 종택이 성성재 종택으로 경북문화재자료 264로 지징되었는데, 그 아래쪽에는 성재(惺齋)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고산정은 그 후에 지은 정자로서, 주변 경관이 뛰어나 이황을 비롯한 선비들의 내왕이 잦았던 곳이다.

금난수는 그 뒤에 예안현의 명승지 가운데 한 곳인 가송협(佳松峽)에 정사(精舍)겸 정자(亭子)를 지었다.

정자의 이름은 고산(孤山)이란 산명(山名)을 따서 ‘고산정(孤山亭)’이라 지었고, 이 정자를 두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칭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주변의 풍광이 뛰어난 이 정자에 이황의 시와 금난수의 ‘고산정사’라는 시가 걸려 있다.

 

한 해 동안 여섯 번이나 왔건만

사시의 아름다운 경치 어김없네.

붉은 꽃 다 떨어지니 녹음 짙어지고

누런 잎 떨어지니 흰 눈 날리누나.

모래 골짜기에 바람 불어 겹옷 날리고

긴 못가에서 비를 만나 도롱이 입었네.

이런 가운데 풍류 있으니

취기에 찬 물결 속 달빛 희롱하누나.

 

강과 석벽의 경치가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에 이병헌이 출연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미스터 선샤인’에서 뱃놀이를 하던 장소가 되었고, 그때 낙동강을 따라 걷던 ‘우리 땅 걷기 도반’들이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보았던 곳이다.

낙동강 천삼백 리의 아름다운 경치를 10경 중의 한 곳으로 손색이 없는 가송협의 고산정 정자 앞으로 강물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맞은편 산기슭에는 물맛 좋은 옹달샘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일제때까지만 해도 이곳에 학이 많이 살았다는데, 현재 학들은 보이지 않고, 은 정자 왼쪽에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조학번식지(鳥鶴蕃殖地)라는 천연기념물 비가 서 있을 뿐이다.

이황은 평소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금난수를 아꼈으므로 청량산 가는 길에 이 정자를 자주 찾아와 빼어난 경치를 즐겼다.

이황의 시 중에 ‘서고산벽(書孤山壁)’ ‘유고산(遊孤山)’, ‘고산견금문원(孤山見琴聞遠)’ 등은 이 정자에서 지었다고 하며 고산정에 보존된 이황의 시 ‘서고산벽’은 지금도 남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란 이가 日洞主人琴氏子

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隔水呼問今在否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耕夫揮手語不聞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愴望雲山獨坐久

-‘퇴계집’ 권2에서-

 

가사와 송오의 이름을 따라 가송리(佳松里)라고 이름 지은 가사리의 쏘두들에는 월명소(月明沼)가 있다.

낙동강 물이 을미 절벽에 부딪쳐서 깊은 소를 이루었는데, 한재가 있을 때 기우제를 지내며, 위에 학소대가 있고 냇가에 ‘오학 번식지(烏鶴繁殖地)’의 비가 서있다.

학소대는 월명소 위에 있는 바위인데 높은 바위가 중천에 솟아 있어서 매년 3월에 오학(烏鶴)이 와서 새끼를 쳐가지고 9월에 돌아갔는데, 1952년 겨울에 바위가 별안간 내려앉았으므로, 그 다음 해부터 오학이 벼락소로 옮겨 갔다고 한다.

쏘두들에 외따로 서 있는 산인 올미는 옛날 홍수 때 봉화에서 떠 내려왔다 하는데 수석이 매우 아름답고 쏘두들 앞에 있는 숲인 사평수(詞評藪)는 선조 때 사람 성재(性齋) 금난수(琴蘭秀)가 장례원 사평이 되었을 때 이 땅을 사서 소나무 수백 주를 심었다고 한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사평송(司評松)이라고 이름 지었고 현재는 앞에 월명소가 있어서 놀이터로 유명하다.

또한 이 마을에는 성성재라는 이름의 옛집이 있다.

선조 때 금난수가 이곳에 살면서 퇴계 이황에게 배웠는데 퇴계가 그의 높은 깨달음을 칭찬하여 성성재(性性齋)라고 써주었다고 한다.

그 집 둘레에 총춘대, 와경대, 풍호대, 활원당, 동계석문 들이 있어 수석(水石)이 매우 아름답다.

한편 강 건너 가사리, 남쪽 산에 있는 부인당이라는 신당은 400여 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와 자목이 많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매년 정월 14일과 5월 4일에 제사를 지내는 이곳에서 고려 공민왕의 딸이 안동 피란길에 이곳에서 죽어서 신이 되었다고 한다.

2006년 환경부 ‘천 리 길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퇴계 이황선생이 도산 오고 가던 길이라 ‘퇴계 오솔길’이라는 이름을 지었던 길이 이 길이다.

옮겨 지은 이현보의 유적을 지나 낙동강을 따라가면 이육사 시인의 ‘이육사 문학관’을 지나 고 도산서원으로 이른다.

그 아름다운 길이 “어서 오게” 하고 손짓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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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신정일 기자 the-report@therepo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