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mns

Pass Me Not, O Gentle Savior

Jimie 2020. 9. 25. 06:14

찬송가의 여왕,

Frances Jane van Alstyne (Fanny Crosby)

Queen of Gospel Song Writers, Mother of modern congregational singing in America

 

 

인애하신 구세주여

Pass Me Not, O Gentle Savior

Shim Soo-bong

https://www.youtube.com/watch?v=kSBbDCMJVKs&t=241s

 

 Pass Me Not, O Gentle Savior

The Joslin Grove Choral Society

 

 

Pass Me Not, O Gentle Saviour

Cited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Pass Me Not, O Gentle Savior" is a 19th-century American hymn written by Fanny Crosby in 1868, set to music by William H. Doane in 1870.

 

  1. Pass me not, O gentle Savior,
    Hear my humble cry;
    While on others Thou art calling,
    Do not pass me by.
    • Refrain:
      Savior, Savior,
      Hear my humble cry,
      While on others Thou art calling,
      Do not pass me by.
  2. Let me at Thy throne of mercy
    Find a sweet relief;
    Kneeling there in deep contrition,
    Help my unbelief. [Refrain]

  3. Trusting only in Thy merit,
     Would I seek Thy face;
     Heal my wounded, broken spirit,
     Save me by Thy grace. [Refrain]

 

4. Thou the spring of all my comfort,
    More than life to me,
    Whom have I on earth beside Thee,
    Whom in Heav’n but Thee. [Refrain]

   < Fanny J. Crosby, 1868>

 

 

 

Frances Jane van Alstyne (née Crosby; March 24, 1820 – February 12, 1915), more commonly known as Fanny Crosby, was an American mission worker, poet, lyricist, and composer. She was one of the most prolific hymnists in history, writing more than 8,000 hymns and gospel songs, with more than 100 million copies printed, despite being blind from shortly after birth. She is also known for her teaching and her rescue mission work. By the end of the 19th century, she was a household name.

 

일반적으로 페니 크로스비(Fanny Crosby)로 잘 알려진 크로스비(Frances Jane van Alstyne, 1820년 3월 24일 - 1915년 2월 12일)여사는 시인, 작사가 및 작곡가인 미국의 선교사이다.

 

Fanny Cro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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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1820년 3월 24일  존 크로스비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머시 크로스비(Mercy Crosby)의 사이에  뉴욕주 작은 마을 푸트남(putnam)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태어난지 6주가 되었을 때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약물치료로 시력이 나빠졌고 결국 시력을 잃게 되어 생후 6주부터 95세까지 일평생 맹인으로 살았다. 그녀의 아버지 존 크로스비도 그녀가 1세이던 이때 즈음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패니의 엄마 머시 크로스비는 어린 딸이 맹인이 된 사실을 알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패니가 돌팔이 의사의 실수로 맹인이 된 사실을 알고 교회와 동네 사람들은 그 돌팔이 의사를 찾아가 그를 처벌하여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마을을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패니가 11살 되었을 때 패니를 누구보다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패니의 할머니 유니스 크로스비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패니는 가난과 슬픔에 버려진 불행한 아이였습니다.

 

화니 크로스비가 아래 찬양의 가사를 썼을 때는 겨우 여덟 살이었습니다.

“난 얼마나 즐거운 영혼을 지녔는가! 비록 내가 볼 수는 없지만, 난 이 세상에서 만족하려고 결심했네.

얼마나 많은 복을 내가 누리는지. 다른 이들에게는 이 복이 없으리. 내가 장님이기에, 울고 한숨짓는 일, 난 할 수 없으리, 하지 않으리.”

 

그리고 이 만족하는 예배자는 성장해서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유명한 찬송가 작사자가 되어 대략 8,000곡의 찬송가 가사를 썼습니다. 이런 수천 개의 곡들은 단지 그녀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을 향해 타올라 꺼질 수 없었던 불의 결과였습니다.

 

한번은 누군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화니, 당신은 장님이 아니었기를 원하죠?”

 

그녀는 늘 말하던 대로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장님이어서 좋은 점은 내가 맨 처음 본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이라는 겁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38세 되던 해인 1858년 3월 8일,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던 맹인교수 밴 앨스틴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서로에 대한 깊은 헌신과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 생활은 두 사람에게 그윽한 행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도시를 떠나 시골에 와서 자연을 즐기며 조용히 살았는데 시골의 공기는 그녀의 영혼을 더욱 아름답게 소생시켰고 그윽한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결혼 후 곧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고 귀여운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곧 아기를 잃고 말았습니다. 패니 크로스비의 일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1859년에 일어났습니다.

 

패니 크로시비는 몇 달 동안을 아기를 잃은 슬픔에 잠겨 힘들게 보냈습니다. 이웃들로부터 받는 위로가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아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내려와서 우리의 아기를 데리고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기를 하나님과 그 분의 왕좌에 맡겼습니다.”

 

패니와 밴 부부는 다시 뉴욕의 맨하튼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다시 모든 열정을 다 쏟아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패니에게 찬송시를 써 달라는 주문이 쇄도했습니다. 패니는 일 주일에 6,7편의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음악가들이 자신들의 곡에 붙일 가사를 그녀에게 부탁했습니다. 패니와 밴은 부부이자 서로를 돕는 배필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패니와 밴은 많은 일을 했지만 허름한 집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가난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불평하거나 서로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주신 것에 항상 감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도 아내를 떠나 먼저 하늘로 갔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한 평생 수 많은 슬픔과 고통과 아픔을 거듭해서 경험한 참으로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뉴욕의 브루클린 (Brooklyn)에 있는 6번가 침례교회(Sixth Avenue Bible Baptist Church)의 오랜동안 멤버였으며 그녀는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목사와 함께 많은 찬송가를 썼습니다.

 

그녀는 역사상 가장 많은 찬송가를 작사한 음악가중 한 명으로 8,000곡 이상의 찬송가와 복음 노래(복음성가)를 저술했으며, 출생 직후부터 눈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이겨내고 이룩한 그녀의 노력은  1억 권 이상의 작품이 인쇄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또한 사회활동 및 기독교 미션을 위한 그녀의 삶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9 세기 말까지 그녀는 가명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출판사들은 한 사람이 저작물을 너무 많이 보내는 것을 주저했기 때문에 크로스비는 그녀의 경력 중에 거의 200개의 다른 가명을 사용해야했습니다.

 

크로스비는 1,000개 이상의 세속적인 시들도 썼으며 , 4권의 시집과 2권의 베스트 셀러 자서전을 출판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미국의 작곡가로서 최초로 세속적인 칸타타인 '꽃의 여왕'을 비롯하여 유명한 세속 노래뿐만 아니라 정치적, 애국적인 노래, 그리고 성경적인 주제에 관한 적어도 다섯 개의 칸타타를 공동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기독교 선교에 전념했고 그녀의 대중 연설도 유명했습니다.

 

크로스비는 "찬송가의 여왕"으로, 그리고 "미국에서 현대 집회찬송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의 미국 찬송가에는 그녀의 저작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 아이작 와츠(Isaac Watts) 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를 제외 하고 크로스비는 일반적으로 비 외음절 찬송가에서 20 세기 작가 중 가장 많은 찬송가로 대표되었습니다. 그녀의 복음 노래는 "모든 부흥 음악의 패러다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라 생키(Ira Sankey)는 "무디(Moody)와 생키(Sankey)복음주의 캠페인"의 성공이 크로스비의 찬송가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크로스비의 가장 잘 알려진 노래 중 일부는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Blessed assurance,Jesus is mine)",“예수 나를 위하여(Jesus shed His blood for me)”, “너희 죄 흉악하나(Tho' your sins be as scarlet)”, “예수께로 가면(If I come to Jesus)”, “인애하신 구세주여(Pass me not, O gentle Savior)”, “나의 갈길 다가도록(All the way my Savior leads me)”, “나의 영원하신 기업(Thou, my everlasting portion)"등으로 한국 찬송가에도 23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기념비에는 'She hath done what she could'(그녀는 그녀가 하려고했던것을 해냈다)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녀의 추가 묘비에는 그녀의 노래시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Blessed assurance,Jesus is mine)"가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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