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1926년 무성영화<장한몽>

Jimie 2020. 7. 22. 03:51

1926년 이경손 감독의 무성영화<장한몽>

 

Jimie  16.05.12 06:05

 

이수일역 , 심훈(沈熏, 1901년 9월 12일 ~ 1936년 9월 16일).

심순애역 , 김정숙(金靜淑, 1906년? ~ ?)

 

김정숙

 

김정숙(金靜淑, 1906년? ~ ?)은

부산에서 출생하여 양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는 기록 외에 출생이나 성장에 관해 알려진 바가 없다.

16세에 기생이 되었다가 1925년에 윤백남이 제작한 《심청전》에 출연하면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안종화의 회고에 따르면, 본래 연극 배우가 되고 싶어했으나 말을 더듬는 단점이 있어 어려움을 겪던 중 무성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김정숙은 눈에 뜨이는 미모의 소유자였으나 말을 더듬는 눌변이라 별명이 “에테테”였다.

 

여배우가 귀했던 시기적 특성상 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1930년대 초반까지 가장 다작한 여성 배우가 되었다. 《장한몽》의 주인공 심순애 역을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직업적으로 성공적이던 시절에도 사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다.

데뷔 전 기생 시절에는 신문 기자와 동거하였고, 배우 데뷔 후 안석영을 짝사랑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영화감독 정기탁과 동거하다가 버림받은 데 이어 나웅과의 동거도 파경을 맞았다.

 

1931년에 4편의 영화에 출연한 뒤 돌연 종적을 감추었으며, 술집과 카페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 갔다.

이후 영화계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간혹 사생활에 대한 소식만 전해졌다.

 

1934년에 한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에 이어, 같은 해 부호의 자제를 유인하여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1936년에 목포의 술집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것이 마지막으로 알려진 행적이다.

음악가에게 실연 당하고 자살했다는 소문과 길에서 횡사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위키백과>

 

 

말더듬이 김정숙과 반쪽 주연 주삼손

 

김정숙(金靜淑)은 무성영화였기에 망정이지 발성영화 시대였다면 배우가 될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말더듬이었다. 부산에서 기생노릇을 하다가 타고난 미모를 무기삼아 스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부산에서 서울에 올라왔으나 처음에는 여관비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슬픈 신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렵게 만난 것이 <심청전>(1925)이다.

그녀는 이경손 감독이 각별히 아낀 배우였다.

1925년 <심청전>에 이어 <개척자>(1925) <장한몽>, <산채왕>(1926) 등 네 편에 내리 출연시킨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심청전>에는 조연인 뺑덕어멈(곱단이)으로 나왔으나, <개척자>와 <장한몽>에서는 각기 젊은 화학자의 여동생 김성순 역과 돈 많은 김중배의 유혹을 받는 심순애 역을 맡겨 주연 배우로 올라서게 해주었다.

 

<장한몽> 촬영 때는 한 역할에 두 명의 주연 배우가 등장하는 기상천외한 일을 겪기도 했다.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한 조일제가 일본작가 오자키 코오요오(尾崎紅葉)의 인기소설「콘지키야샤(金色夜叉)」를 번안 각색한 것인데,

 

주연인 주삼손(朱三孫: 이 수일 역)이 절반가량의 촬영을 남겨 놓고 행방을 감추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대타로 급조된 배우가 스물다섯 살의 청년 심훈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그는 이듬해 <먼동이 틀 때>로 메가폰을 잡고 뒷날 소설 <상록수>(1935)로 유명해진 바로 그 사람이다.

 

김정숙은 잇따라 나운규의 <풍운아>(1926), <금붕어>(1927)와 김해운의 <운명>(1927)에서도 비중 있는 역할을 맡고, 20년대 후반에는 <약혼>(1929, 김영환), <화륜>(김유영), <지지마라 순이야>(1930, 김태진), <지하촌>(이상 1931, 강호) 등 주로 경향파가 주도한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러나 카프가 몰락하면서 원산만 프로덕션의 첫 영화 <금강한>(1931)과 두 번째 작품 <남편은 경비대로>(1931, 시마다 아키라)에 출연하고 그해 말 조선극장에서 개봉한 김영환 감독의 <연애광상곡>을 끝으로 은막에서 사라졌다.

 

그 뒤 카페의 여급으로 전락, 밤마다 손님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다가 술이 아니고는 견딜 수 없는 모주가 되어 버렸다.


한국영화사상 두 명이 한 역할을 나눠 함으로써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장한몽>의 반쪽 주연 주삼손(朱三孫)은 이에 앞서 <해의 비곡>(1924)에 단역인 학우(學友)로 처음 얼굴을 비쳤다.

스물한 살 때였다.

잇따라 <심청전>의 왕 송천자(宋天子) 역할을 거쳐 <풍운아>(1925), <들쥐>(1927), <잘 있거라>(1927), <옥녀>, <사랑을 찾아서>(이상 1928), <벙어리 삼룡>(1929) 등 주로 나운규 영화에 조연으로 나온 뒤 <지지마라 순이야>(김태진)와 <승방비곡>(1930), <수일과 순애>(1931), <갈대꽃>(1931) 등 이구영 감독의 세 편 등 모두 13편의 영화를 남겼다.

 

부드러운 얼굴의 윤곽이며 복슬복슬한 두 뺨이 잘 정돈된 이른바 ‘내지’ 출신인 이 미남 은 일본 사카모도현립진강중학(板本縣立眞岡中學)을 나와 일본활동주식회사에서 배우 노릇을 하다가 부산 조선키네마에 입사하면서 조선영화계에 투신하였다.

1903년생으로 그의 본명은 오오자와 야와라(大澤 柔)이다.

 

이 땅에서 영화 제작이 걸음마를 시작한 1920년대 초·중반의 대표적 히트작 중 하나가 <이수일과 심순애>의 러브스토리인 이경손(李慶孫) 감독의 '장한몽'(長恨夢·1925년작)이다.  계림영화집단의 창립작으로 처음 제작한 영화 .

 

스크린 속에서 망토를 걸친 "김중배의 다이아먼드가 그렇게도 좋더냐!"고 통탄하는 이수일 역 배우는 뜻밖에도

농촌계몽소설 '상록수'의 작가로 문학사에 알려진 심훈(沈熏)이다.

영화 개봉 당시 조선일보 기사 속 '리수일 역'으로 보도된 '신태식'은 심훈이 쓴 가명이었다.

 

-심훈과 김정숙-

 

영화 '장한몽(長恨夢)'. 심훈이 '신태식'이란 가명으로 이수일 역을 맡았다.

우리 영화 사상 최초의 이수일 연기를 소설가 심훈이 맡은 데엔 사연이 있다.

처음엔 주삼손이 이수일을 맡아 촬영 중이었는데, 거의 반쯤 진행될 무렵 주삼손이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없이 갑자기 행방을 감추어 버린 것이다.

 

1,사건의 주모자는 나운규였다(나중에 밝혀짐). 나운규와 감독인 이경손은 평소에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래서 심술이 난 나운규가 주삼손을 충동질 했다는 것이다.

대안을 찾던 영화사는 영화에 관심 많던 곱상한 문필가 22살의 미남인 심훈을 캐스팅해 영화배우로 데뷔시켰다.

 

2,(이경손 감독, 주삼손, 김정숙 주연으로 촬영을 시작했던 이 영화는 도중에 주삼손이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촬영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이미 촬영한 부분을 버릴 수도 없고, 주연배우가 완쾌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어 고민하던 중 주삼손과 용모가 비슷한 심훈을 대신 출연시켜 영화를 완성한 것. 덕분에 한국영화로서는 2인 1역의 진기록을 남긴 영화로 남아있다.)

 

아뭏든 이수일 역을 전반부에는 주삼손이, 후반부에는 심훈이 주인공이 된 것이다.

요즘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2인 1역'의 기형적 영화였다.

"리수일이가 두 사람이 되어서, 관객들의 우슴보를 터지게"했다.

그래도 모처럼 완성도 높은 국산영화였던 '장한몽'에 대해 관객도 호의적이었다.

배우가 바뀐 것을 문제삼지 않을 정도였다.

 

이후 이경손은 이내 상하이를 거쳐 방콕으로 망명의길을 택한다.

 

1925년 바야흐로 우리나라 무성영화가 본격적인 궤도 위에 올라서려는 무렵의 일이었다.

 

'장한몽'의 성공에 고무됐는지, 심훈은 내친김에 영화감독에 도전했다.

1927년 메가폰을 잡고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각색한 '먼동이 틀 때'를 내놓았다.

 

이 작품은 "우리가 모든 조선영화를 살러(불태워) 버린다면 이 영화를 남겨 놋는데 과히 붓그럽지 안타'는 극찬을 받았으나, 흥행은 신통치 않아 제작사가 파산했다.

그래도 심훈은 1927년 2월 일본에 건너가 교토(京都)촬영소에서 3개월간 영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귀국해 "조선영화를 위하야 노력하겟다"고 밝히기도 했으나 영화인으로서의 활동은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1928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심훈은 1931년까지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영화의 꿈을 글 속에 풀어냈다. 숱한 영화평은 물론, "돈에 먼저 눈을 뜨는 경영자의 지배 하에서…과연 뛰어난 작품이 나타날 수 있을까 의문"이라는 등의 날카로운 칼럼도 남겼으나, 1936년 장티푸스에 걸려 안타깝게도 36세로 삶을 마감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훈은 독립운동가 시인 소설가 언론인 영화배우 영화감독이었다...

 

벙어리 삼룡

 

주삼손은 조선키네마사의 전속배우로 활동하였다. 그 결과 조선키네마 제작 영화 〈들쥐〉와 〈금붕어〉에 연속 출연하였다(『동아일보』, 1927년 4월 9일 ; 『동아일보』, 1927년 7월 10일). 특히 〈금붕어〉에서 주삼손의 연기는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영화는 모두 나운규 연출 작품이었는데, 주삼손은 한때 나운규의 작품에 빠짐없이 출연하는 배우로 인식되기도 했다. 

 

주삼손은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제작한 5편의 영화 중에 적어도 4편에 출연했다. 그 영화는 〈잘 있거라〉(1927년 11월), 〈옥녀〉(1928), 〈사나이〉(1928년 9월), 〈벙어리 삼룡〉(1929년 1월)이었다.

 

1928년 나운규는 ‘벙어리 삼룡’을 감독했다. 이 영화는 나도향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문예영화였는데 이 영화를 통해 주연 여배우였던 류신방과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도 했다. 나운규는 17편의 작품을 남기고 35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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