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백난아(白蘭兒)와 오금숙(吳錦淑)

Jimie 2020. 7. 20. 06:17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떠나 멀리 타향에서 핍박과 서러움에 눈물짓던 실향민들에게

찔레꽃 피는 고향을 노래한 백난아의 '찔레꽃'은 더 없는 향수를 자극하여 공감을 느끼게 하여

너도 나도 이 노래를 열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방송윤리위원회의 오인(誤認)으로 월북작가의 작품으로 낙인 찍힌 바 있었으나

작사자 김영일씨의 항변으로 오인(誤認) 사실이 밝혀져 금지곡(禁止曲)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오금숙(吳錦淑)

 

 

1. 백난아의 탄생

 

백난아는 본명이 오금숙(吳錦淑)으로 1927년 5월 16일 제주도 한림읍 명월리에서 ‘오남보’씨의 3남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오금숙은 세 살 때 가족들과 만주로 이주하였고 아홉 살 때는 함경북도 청진에 정착을 하였다.

부친이 청진에서 정어리공장을 하다가 병고로 인해 오금숙이 9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고 이때부터는 제주출신의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나가며 힘들게 생활을 하였다.

 

 

2. 백난아 꿈의 태동

 

오금숙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수의 꿈을 키웠다.

어린 금숙은 청진의 동덕보통학교를 다녔는데 학교를 오고 가는 길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악기점에서 매일 새로운 유행가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며 자랐다.

 

노래를 좋아했던 오금숙은 늘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러한 행동을 눈여겨본 악기점의 일본인 주인 사이도 마사오는 오금숙을 가게 안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곤 피아노로 ‘소녀의 기도’를 연주해 들려주자 어린 금숙은 곧바로 멜로디를 익힐 정도로 음악성이 뛰어났다.

 

 

3.빅터레코드 주최 콩쿠르 1등 (13세, 1940년, 보통학교 6학년)

 

이러한 천재성을 알아차린 주인이 노래를 몇 차례 시켜본 뒤 곧바로 그 해 가을, 빅타레코드사 주최로 청진에서 열리는 신인 콩쿠르에 참가할 것을 권유한다.

물론 전문 교육이나 연습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소녀 금숙은 결국 빅터레코드사에서 주최한 콩쿠르에서 참가, 영예의 1등을 차지하게 된다.

 

그 때 나이 불과 열세살, 동덕보통학교 6학년 때(1940년)였다.

같은 해에 ‘북성여중’에 입학을 하면서 그의 노래에 대한 열정은 더욱 커갔다.

나이에 비해 노래 실력이 대단했다.

키 또한 크고 한결 성숙해보였다.

 

그는 입상 상품으로 휴대용 축음기와 상장을 받았지만 학교와 집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이것들을 친구 집에 몰래 맡겨놓곤 했다.

그러나 결국 모두에게 알려져 학교와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부모, 그리고 학교 등 주위의 반대가 매우 심했지만, 소녀 금숙의 노래하고픈 마음까지 꺾을 수는 없었다.

 

 

4.콜럼비아 레코드 주최 콩쿠르 1등(14세,1941년, 중학1년)

 

북성여중 입학한 뒤 이번에는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주최하는 콩쿠르에 참가, 또 다시 1등으로 당선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 해 10월경 콜럼비아 서울지사로부터 등기 한 통이 날아왔다.

내용은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일금 50원과 함께 신곡을 취입해야겠으니 급히 상경해 달라는 전갈이었다.

 

소녀 금숙은 언니를 졸라 당시 을지로 4가 국도극장 뒤편에 있던 콜럼비아레코드사를 찾아갔다.

20여곡 중 적성에 맞는 곡을 골라서 취입을 위한 연습을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직 너무 어린 나이인 탓에 곧 변성기가 오면 노래 음색이 달라질 것인즉 변성기 전 취입이 부적절하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결국 금숙 자매는 일주일 동안 노래 연습만 몇 차례 한 뒤 다시 청진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완고한 집안이었지만 점차 오금숙의 타고난 노래실력을 인정받으면서 식구들 사이에서도 찬반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5.태평레코드 주최 신인 콩쿠르 1등(15세,1942년, 중학2년)

 

15세 되던 해 이번에는 ‘레코드예술상’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태평레코드사가 청진에서 신인 콩쿠르를 개최했다.

‘천하 지사들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이 기회를 놓치지 말 지어라. 오라. 강호(江湖)의 제현(諸賢)들아 !’

- 당시 태평레코드 콩쿠르 문안이다.

의욕과 오기심이 발동한 금숙은 기회를 놓칠세라 주위 사람들의 충고를 뿌리치고 태평콩쿠르에 출전, 또 다시 1등을 따냈다.

한데 정작 백난아의 입상은 청진대회에서가 아니라 회령대회에서다.

 

황문평 著 ‘삶의 발자국(선 출판사 발행)’에는 이 부분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태평레코드의 인기가수 진방남(작사가 반야월 이명동인) 증언에 의하면, “청진대회에서 백난아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는데 입상자 발표에서는 오금숙의 이름이 누락되었다.

청진대회를 마치고 일행이 다음 장소인 회령으로 떠나려 할 즈음 태평레코드사 일행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오금숙의 언니, 형부, 그리고 어머니 등이 떼로 몰려와 항의를 했다.

항의 내용은 ‘이미 빅타 때, 콜럼비아 때 모두 1등으로 입상했던 실력자를 엊저녁 청진대회 때도 객석 반응 등을 보아 당연히 입상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떤 부정으로 오금숙이 낙선되었느냐’고 따지고 드는 소동이 벌어졌다.

 

태평 측에서‘그럴 리가 없다’며 엊저녁 성적, 즉 모든 심사원들의 채점표를 다시 점검해 보았다.

분명 오금숙은 좋은 점수, 즉 입상권 내 점수를 받고 있었다.

더욱이 심사위원장인 작곡가 김교성의 채점표에는 ‘1등 입상자’라는 메모 필적을 찾아냈다.

 

한데 북새통에 총 점수를 계산하는 회사원의 실수로 오금숙이 누락됐던 것이다.

그래서 김교성이 한 가지 제안을 냈다.

"태평레코드 회사의 실수로 아까운 신인가수를 놓칠 뻔했으니 우리와 같이 회령대회에서 다시 출전해라.

잘 부르면 1등 입상을 보장하겠다"는 김교성의 언약에 따라 오금숙은 태평팀과 함께 회령대회에서 다시 노래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콩쿠르에서 또다시 1등으로 당선 되었지만, 경성(서울)본선에 참가할 자격만 주어진 것이지 당장 취입 또는 전속 가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6.태평레코드 주최 경성 본선 1등

 

바로 이 때 전국 각지는 물론 멀리 만주 등지에서 모여든 각 지역의 당선자들과 겨루는 서울(경성) 본선대회에서 검정구두에 갑사저고리를 입은, 아직 단발머리 소녀 오금숙은 당시 가수 박향림의 ‘청춘 극장’을 불러 공동 1등을 차지한다.

참고로 이 대회 공동 1등은 군산지역 대표 이종모(예명 남춘역, 이후 영화배우로 활동), 그리고 이후 작곡가로 활동한 나화랑 씨가 3등으로 입상했다.

 

백난아씨는 71년, 동아방송을 통해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주위 분이나 동네 친구들이 나가면 꼭 당선될 것이다 라고 해서 용기를 내어 부모님 몰래 출전했어요. 그러나 학교에서 알게 되어 벌도 야단도 많이 맞았고 또 퇴학까지 당했지요. 그때 어머니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중학교에 진학을 할 수 있었어요. 학교 선생님이나 부모님들은 가수가 되는 걸 완강히 반대했지만 결국 음반이 나오니까 그 때서야 점차 가족들도 이해해주셨지요.”

 

 

7.태평레코드 전속가수(15세,1942년)

 

무려 다섯 차례 콩쿠르 연속 1등으로 당선된 소녀 오금숙이 음반을 취입하며 가수로 정식 데뷔하는 것은 시간문제.결국 이 단발머리 열다섯 살 어린 소녀는 태평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입사해 가수활동을 시작한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성량이 풍부하고 목소리 또한 화려하고 매력이 넘쳤다.

표현력 또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 ‘제2의 박향림’으로 기대를 모으기도 했는데 이 때 그녀가 처음 취입한 노래는 1940년 12월에 취입한 ‘망향초 사랑’ , 처녀림(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의 ‘오동동 극단’이다.

 

특히 데뷔곡 ‘망향초 사랑’은 한국의 영화배우 김일매와 일본의 인기 여배우 하라세츠코가 주연을 맡은 영화의 주제곡으로 불러졌다.

 8.백난아 등장과 일본 순회공연

 

이 무렵 백년설은 양녀 오금숙이 흰 살결에 달덩이처럼 예쁜데다 난초를 좋아하는 아이라고 해서 예명을 백난아(白蘭兒)’라고 지어주었다.

 

백난아로 거듭 태어난 그는 첫 취입곡을 발표하자마자 하루아침에 신데렐라로 부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다섯 개의 레코드사에 전속되어 활동하던 여가수는 겨우 손꼽을 정도의 숫자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레코드사 전속가수가 되었다는 것은 곧 이미 스타가 되었음을 의미하던 시절이었다.

 

소녀가수 백난아는 데뷔곡 ‘망향초 사랑’, ‘오동동 극단’을 시작으로 당시 최고 작곡가들인 이재호, 김교성,손목인, 박시춘 등과 손잡고 ‘갈매기 쌍쌍’, ‘황하다방’, ‘아리랑 낭랑’ 그리고 그녀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찔레꽃’등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40년대 초 인기가수로 급부상한다.

 

국내에서의 거침없는 인기 질주와 더불어 취입을 위해 쉴 새 없이 왕복해야했던 일본에까지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특히 ‘아주까리 선창’의 취입을 마친 뒤 오사카에서 당시 최고 가수인 남인수씨를 만나 그의 소개로 백난아씨는 그 때까지 한국가요를 취급한 적이 없던 일본 킹레코드사에 발탁되어 음반을 취입한다.

아울러 그 무렵 일본의 요시모도 흥행사의 눈에 띄어 한국, 중국, 일본의 3개국 가수들과 함께 6개월간 일본 순회공연을 펼쳤을 정도로 외국인 톱 가수 대접을 받기도 했다.

 

당시 오케레코드에 비해 후발주자였던 태평레코드는 ‘한국의 슈베르트’라 불리는 천재 작곡가 이재호와 콤비를 이룬 전속 가수 백난아, 백년설, 진방남 등과 더불어 태평레코드를 일약 메이저음반사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태평레코드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이 무력은 특히 각 레코드사마다 운명을 좌우할 가수들에 대한 스카우트전 또한 치열했다.

 

아직 어리고 순진하기만 한 소녀가수 백난아는 이러한 스카우트 열풍에 휘말려 태평레코드에 전속가수의 몸으로 폴리돌레코드 관계자들과 이중 전속 계약을 맺고 노래를 취입했다.

이 때문에 태평레코드 측으로부터 백난아는 결국 1년 반의 취입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40년대 초는 태평양 전쟁 등의 일제의 식민통치가 더욱 혹독해지고 있던 때였다.

백난아가 일본에서 귀국하는 1943년, 즉 일제 강점기 말기 때 우리나라는 물자부족으로 레코딩 산업이 전면 중단된다.

 

8.하나악극단과 중국 순회공연

 

아울러 당시 가수들은 음반을 통한 신곡 발표가 어렵게 되자 음반 취입보다는 무대공연 위주로 활동을 전환했다.

백난아 역시 무대가수로 활동하며, 작곡가 이재호 그리고 태평레코드의 3총사라 할 수 있는 가수 백년설, 진방남씨 등과 함께 ‘하나악극단’을 조직, 멀리 만주지방까지 공연을 다녔다.

 

중국의 천진과 북경, 그리고 상하이 등지의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 하나악극단은 8.15 광복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9. 광복과 백난아 양재학원

 

광복 후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백난아는 충무로 3가에 있던 일본인 집을 매입, 틈틈이 익혀 두었던 양재 기술을 살려 ‘백난아 양재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는 물자 부족으로 남대문시장 등지에 겨우 미군 구제품 의류가 고작이었기 때문에 의상을 만들 옷감이 턱없이 부족한 때였다.

때문에 양재학원은 그의 꿈과는 달리 실질적인 학원경영이 불가능하던 때이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의상학원은 불이 나 소실된다.

결국 못다 이룬 꿈을 접고 대신 당시 서울극장 등의 경영에도 관여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을 모두 접고 다시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10. 백난아의 혼인 그리고 방송국 전속가수, "찔레꽃" 유행

 

광복을 맞은 그 해(1945년) 12월, 백난아 나이 스무 살에 고위 공무원이었던 이종호씨와 백년가약을 맺는데 이즈음 지난 1941년도에 취입했던 노래 ‘찔레꽃’이 다시 한번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망향가인 ‘찔레꽃’은 국내는 물론 멀리 만주, 중국 등에서도 크게 애창되었다.

찔레꽃은 민중의 노래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애국애족으로 메아리쳐 겨레의 애창곡이 되는 대성공으로 태평레코드사를 돈더미 위에 올려놓으며 백난아를 한국가요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올려놓았다.

 

그녀는 광복 후 서울, 부산 등지의 방송국에서 전속 가수로 활동하였고, 한국최고의 가수 ‘이미자’는 10세때 부산 피난시절에서 백난아 공연을 보고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고 고백하였다.

 

찔레꽃은 보통 하얗다고 생각하는데 백난아의 ‘찔레꽃’에 보면 ‘찔레꽃 붉게 물든’이라는 가사가 나온다.

이는 일제 시대 때 나라를 잃은 설움을 묘사한 장면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기에 잠시 금지곡으로도 지정되었었는데 광복 직후에 이 곡이 더 인기가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런 때문이었다.

 

‘남쪽나라 내 고향’이라는 가사 때문인지 고향을 떠나 만리타국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실향민들에게 특히 인기가 좋았던 ‘찔레꽃’은 아련한 추억의 향수에 젖게 만들면서 기어이 눈물방울을 적시게 한다.

식민지와 전쟁을 통과해온 그들의 기억 속에서 고향은 항시 가난과 서러움, 눈물과 시련으로 가득했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렴풋한 실루엣 속에서 ‘찔레꽃’은 언제나 향수의 단골 테마로 떠오른다.

 

11.사업가 그리고 부케 악극단 조직

 

백난아는 1955년 4월 <제일고등영수학원>재정이사(발족인), 1957년 1월<부케악단> 대표등을 역임하며 각종위문공연과 재일교포위문공연등 1970년대까지 활발한 사회봉사로 수많은 표창과 감사장을 받기도 하였다.

 

광복직후 급부상한 여자가수로는 송민도, 심연옥씨 등도 있었지만 레코딩 가수로 성공한 가수는 백난아씨가 거의 유일하다.

백난아는 그 무렵 럭키레코드에 전속되어 ‘낭랑 18세’라든지 ‘금박댕기’같은 곡들을 발표했다.

 

광복 이후 많은 공연과 더불어 49년 4월 27일 고려악극협회가 시공관에서 막을 올린 악극 ‘지리산의 봄소식(윤부길 작)’ 무대에 올라 윤부길씨와 함께 호흡을 맞추는 등 연기로까지 다재다능한 활동을 펼쳤던 그는 6.25 한국전쟁 당시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남포동에서 ‘뉴파레스’라는 다방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렇듯 백난아씨는 계속 사업에도 뜻을 펼쳤다.

환도 이후 상경, 이후 직접 악극단을 조직한다.

그가 조직했던 악극단 이름은 ‘부케악극단’으로 1956년, 본인의 가수 생활 15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타이틀로 쇼 활동을 시작해 유호 작의 ‘백설의 비화’ 그리고 손목인 선생의 지휘로 ‘모던 춘향전’을 무대에 올리면서 인기가수 남인수, 나애심씨 등과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이 부케악극단은 약 15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당시 악극단의 운영은 힘든점이 많았다.

당시 흥행쇼단 운영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여자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백난아씨는 힘든 흥행쇼단장을 제대로 해냈을 정도로 여장부였던 동시에 그녀의 활달한 성품은 당시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용기를 북돋아준 본보기 혹은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12.수도 예술학원 설립 및 ‘백난아 히트애창곡집(현대음악출판사 발행) 발간

 

이 무렵 가정이 파탄을 맞지만 제주 핏줄을 타고난 탓인지 당찬 가수 백난아씨는 1969년 악극단을 접고 이후 1970년 10월 13일, 교포를 위문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때 한국의 국악인들을 불러들려 그 곳에서 우리의 판소리를 지도하기도 했다.

귀국한 이후인 85년 서울 충무로에서 수도예술학원을 설립해 작곡가 나화랑, 형석기 그리고 영화배우 이민씨 등을 교수로 모시고 후학을 양성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1957년과 1961년에 이어 1986년 가수 현인 등과 함께 고향인 제주를 방문해 ‘한림문화관’에서 공연을 펼쳤고 이 공연이 고향에서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1988년에는 손석우 작곡의 노래 ‘이별의 술잔’을 취입했는데 이 곡이 그의 마지막 곡이다.

 

이듬해인 1989년 1월 20일, 백난아씨는 자신의 히트곡을 묶어 ‘백난아 히트애창곡집(현대음악출판사 발행)을 발간한다.

이 책에 수록된 노래는 모두 53곡이다.

13.백난아 타계

 

백난아씨는 이로부터 3년 뒤인 1992년 1월 21일, 폐암으로 인해 한창 의욕적으로 일할 나이인 65세의 일기로 타계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활달한 성품이었던 그가 좀 더 오래, 건강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큰 부분이다.

 

두 번 결혼을 한 그는 슬하에 5남매(1남4녀)를 두었고 그의 장례는 딸에 의해 치러졌다.

 

14. 백난아의 삶 조명

 

'시대를 앞서 간 제주여성-언론, 문화, 체육’분야 1호 여성

‘찔레꽃 노래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금포숲 찔레꽃 노래비 공원

‘국민가수 백난아 기념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명월초등학교 정문 옆

 

백난아의 삶을 마무리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백난아씨의 개척자적인 활동은 곧잘 당찬 제주여성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지난 2005년 제주도여성특별위원회(위원장 강계옥)에서는 ‘근, 현대 100여년간 직업별 제주여성 1호’를 정리한 책을 발간했다.

제주여성사 자료총서 여섯 번째로 내놓은 ‘시대를 앞서 간 제주여성-언론, 문화, 체육’분야에서 1호 여성으로 선정된 인물이 바로 가수 백난아였다.

 

또한 그의 대표곡 ‘찔레꽃 노래비’가 한림읍(읍장 강영호)의 노력으로 국내 최대 팽나무 군락지와 지방문화재로 잘 보존되고 있는 제주 한림읍 명월대 인근에 지난 2007년 6월 28일 세워졌다.

 

그리고 2008년 11월 25일에는 ‘국민가수 백난아 기념사업회(회장 오경욱)에 의해 ‘국민가수 백난아 기념비’가 세워졌다. 찔레꽃은 2006년 MBC가요대제전에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요 100에서 53위에 선정되었는데, 참고로 소양강 처녀는 55위, 목포의 눈물은 69위였다.

 

이렇듯 역사의 질곡을 헤쳐 오며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백난아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언제 어디서 들어도 어머니의 품속처럼 푸근하고 자애로움이 느껴지는 모성적 감각의 창법. 바로 이것이 백난아 노래의 빛깔이라 할 수 있다.

 

타계 직전, 발행된 ‘백난아 히트애창곡집’에서 백난아는 이렇게 발간사를 적고 있다.

 

//"이 생명 다할 때까지’ 그리운 세월입니다.

 

풋 복숭아 같이 보송보송하던 열다섯 살에 태평레코드사 전국 가요콩쿠르에 당선되어 전속가수가 된 뒤로 울고 웃던 무대생활이 어느덧 47년째라니... 생각하면 유리알 같이 눈물이 돌아 번져버릴 것 같은 아름다운 청춘 이었습니다. 어느 간이역에 피어난 키 큰 해바라기같이 유달리 외로움을 잘 타던 내가, 세상 어려움과 싸우면서 헤쳐 온 나날들이 지나간 꿈결처럼 그립기만 합니다. ‘망향초 사랑’, ‘아리랑 낭랑’, ‘갈매가 쌍쌍’, ‘오동동극단’,.... 한구절 한구절 외워보는 노래마다 잃어버린 사연들이, 그리운 얼굴들이 이슬처럼 묻어납니다. 미운사람, 고운 사람이 따로 없을 것 같습니다.

 

무작정 그립고 만나고 싶을 뿐입니다.

교성 선생님, 김영일 선생님, 김용환 선생님, 박시춘 선생님, 손목인 선생님, 이재호 선생님, 이용준 선생님, 반야월 선생님, 유호 선생님...알게 모르게 힘이 되어주시고 사랑해주시던 인정 많은 선생님들을 잠시도 잊지 못합니다. 찬바람 불던 식민 치하의 무대에서, 만세소리 드높던 해방의 무대에서, 포연이 자욱한 6.25의무대에서 뜨겁게, 뜨겁게 성원해 주시던 팬들의 박수소리, 또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사랑이 많고 아직도 열정이 많습니다.

 

아직도 그리움이 많고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팬들이 있고 무대가 있는 한, 이 생명 다할 때까지 노래할 것입니다. "//

 

【제주=뉴시스】 입력 2007.06.28. 14:36

일제 말기 국민 애창곡 '찔레꽃'을 발표한 제주출신 가수 백난아(1992년 타계)의 노래비가 고향인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에 세워지고 28일 '찔레꽃 노래비 공원'이 개장됐다. /김재하기자 kjh@newsis.com >

 

 

1988년 12월, 백난아 [자료출처] 다음카페 : 백난아를 사랑하는 사람들

http://cafe.daum.net/wildrose-hallim [출처] 국민가수 백난아 (마이드림제주)

 

 

백난아 - 금박 [金箔]댕기

1949

조경환(고려성, 백명) 작사, 박시춘 작곡

작사/주인욱. 작곡/박시춘

 

주인욱=ba조경환=고려성=백명

https://www.youtube.com/watch?v=O9EIYE0Mm6c 

1.
황혼이 짙어지면 푸른 별들은
희망을 쪼아보는 병아리더라
우물터를 싸고도는 붉은 입술에
송아지 우는 마을 복사꽃이냐
2.
목동이 불어주던 피리소리는
청춘을 적어보는 일기책이다
수양버들 휘늘어진 맑은 냇가에
두레박 끈을 풀어 별을 건지자
3.
화관 쓴 낭자머리 청홍사연은
별들이 심어놓은 꽃송이 구나
물동이에 꼬리치는 분홍 옷 고름
그 날밤 나부끼는 금박댕기냐

 

https://www.youtube.com/watch?v=UkXuA5-mvJ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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