何日君再來(Hé Rì Jūn Zài Lái)
언제 님이 다시 오실 까요?
李香蘭 (1939)
詞:貝林(黃嘉謨) 曲:晏如(劉雪庵)
released: 1939年1月
https://www.youtube.com/watch?v=kmrr2HUNEwo
1절.
好花不常開 好景不常在
hǎo huā bù cháng kāi/ hǎo jǐng bù cháng zài
아름다운 꽃도 항상 피어있지는 않고
멋진 풍경도 항상 머물러있는 건 아니에요
愁堆解笑眉 淚灑相思帶
chóu duī jiě xiào méi / lèi sǎ xiāng sī dài
근심이 쌓여 웃는 낯을 없애고
눈물은 그리운 마음에 뿌려져요
今宵離別后 何日君再來
jīn xiāo lí bié hòu / hé rì jūn zài lái
오늘 밤 이별한 다음에 언제 님이 다시 오실까요
喝完了這杯 請進点小菜
hē wán liǎo zhè bēi / qǐng jìn diǎn xiǎo cài
이 잔을 다 비우고 안주거리를 들여주세요
人生難得機回醉 不歡更何待
rén shēng néng dé jǐ huí zuì / bù huān gēng hé dài
인생을 살면서 취하기는 흔치 않으니
지금 즐기지 않으면 어찌 또 기다리겠어요
來 來 來, 喝 完 了 這 杯 再 說 吧!
lái lái lái, hē wán liǎo zhè bēi zài shuō ba!
자자, 이 잔을 비우고 다시 얘기합시다
今宵離別后 何日君再來
jīn xiāo lí bié hòu / hé rì jūn zài lái
오늘 밤 이별한 후에 언제 님이 다시 오실까요
何日君再來- 邓丽君
2절.
停唱*陽關疊* 重擧白玉杯 (*陽關疊;이별의 노래)
tíng chàng yáng guān dié / chóng qíng bái yù bēi
이별의 노래를 멈추고 다시 백옥잔을 들어요
殷勤頻致語 牢牢撫君懷
yīn qín pín zhì yǔ / láo láo fǔ jūn huái
은근히 자주 말을 건네어 님 생각을 단단히 보듬어줘요
今宵離別后 何日君再來
jīn xiāo lí bié hòu / hé rì jūn zài lái
오늘 밤 이별한 후에 언제 님이 다시 오실까요
喝完了這杯 請進点小菜
hē wán liǎo zhè bēi / qǐng jìn diǎn xiǎo cài
이 잔을 다 비우고 안주거리를 들여주세요
人生能得回醉 不歡更何待
rén shēng néng dé jǐ huí zuì / bù huān gēng hé dài
인생을 살면서 취하기는 흔치 않으니
지금 즐기지 않으면 어찌 또 기다리겠어요
再 喝 一 杯, 干 了 吧!
āi! zài hē yī bēi, gān le ba!
아! 또 한잔 비웁시다
今宵離別后 何日君再來
jīn xiāo lí bié hòu / hé rì jūn zài lái
오늘 밤 이별했으니 님은 언제 다시 오실까요
艶のあるいい声です.
前無古人,後無來者。 人美,聲音甜,難再有的巨星。
아시아의 밤을 노래하다
1995년 5월 8일,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덩리쥔은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한 중화권 최고 스타다. 그의 삶과 목소리는 세상을 달리한 지 2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 여운을 남긴다. 덩리쥔의 이름 앞에는 ‘아시아의 가희(歌姬)’ ‘영원한 연인’ ‘10억의 박수소리(十億個掌聲)’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덩리쥔은 1953년 1월 29일, 대만 윈린(雲林)현 바오중(褒忠)향의 톈양(田洋)촌에서 태어났다. 국민혁명군 장교이던 아버지 덩수(鄧樞)는 허베이(河北)성 사람이고, 어머니 자오수구이(趙素桂)의 고향은 산둥(山東)성이다. 1949년 국·공 내전에서 패한 중화민국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터전을 옮긴 외성인(外省人)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덩리쥔의 원향은 중국 본토다. 부모의 고향이자 마음의 고향인 중국은 덩리쥔의 삶을 통틀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덩리쥔의 본명은 ‘덩리쥔(鄧麗筠)’으로 ‘아름다운 대나무’ ‘대나무처럼 곧고 바른 성정’이라는 뜻이 담겼다. 아버지 덩수는 고명딸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자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던 자신의 상관에게 도움을 청했다. 상관은 ‘리쥔’을 추천했다. 이는 청(淸)대 저명 여성작가 진단생(陳端生)의 ‘재생연(再生緣)’의 여주인공 멍리쥔(孟麗君)과도 발음이 같았다. 다만 ‘리쥔(麗筠)’은 타이완 사투리 발음이 있는 현지 사람들에게 발음하기 힘든 이름이었고, 자연 ‘리쥔(麗君)’이라는 잘못된 발음으로 불리게 되었다. 훗날 가수로 공식 데뷔할 때 예명으로 사용한 ‘리쥔(麗君)’이 본이름을 대신했다.
어린 시절 덩리쥔의 집은 가난했다. 군 하급 장교이던 아버지는 퇴역해 장사를 시작했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집안의 유일한 딸이던 덩리쥔은 어려서부터 노래와 춤에 재능을 드러내 가족을 웃음 짓게 했다.
덩리쥔이 여섯 살 때인 1961년 가족은 타이베이 외곽 루저우(蘆洲)로 사는 곳을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어머니 손을 잡고 대만 북부 첫 천주교회 루저우천주당(蘆洲天主堂)으로 발걸음을 했고, 테레사(Teres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훗날 해외 활동 시 사용한 예명 ‘테레사 덩’도 여기서 유래했다.
루저우에서 덩리쥔은 ‘새로운 인연’도 쌓았다. 그의 유일무이한 모교가 되는 루저우초등학교(蘆洲國民小學)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임청하’라는 한국식 발음으로 더 익숙한 배우 린칭샤(林靑霞)와 평생 이어지는 우정이 시작됐다.
초등학교 시절 덩리쥔은 운명의 전기를 맞이한다. 93강악대(康樂隊·밴드) 얼후(二胡) 연주자 리청칭(李成淸)을 만난 것이다. 아버지 덩수와 동향 사람이던 그는 덩리쥔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제자 삼아 노래와 연주를 가르친다. 리청칭의 지도하에 덩리쥔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러곤 93강악대를 따라 군 위문공연을 다니며 가인(歌人)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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