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 (金一) 박치기 왕
원폭 박치기 ㅋ~!
大木金太郎('오오키 긴타로)
'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사나이'
김일(金一)
대한민국의 프로레슬링 선수이다.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제자이다.
ⓒ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wikipedia | Public Domain
김일 은 1929년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2006년 10월 26일 타계.
장영철, 천규덕과 함께 한국 프로레슬링 1세대로 활약하며 1960년대~70년대 중반까지 일본과 한국에서 '박치기 왕'으로 불렸다.
국내 씨름판을 주름잡다 역도산의 레슬링 기사를 보고 1956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불법체류자로 잡혀 일본에서 1년간 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도 역도산에게 계속 편지를 써, 1957년 도쿄의 역도산체육관 문하생 1기로 입문하였다.
역도산에게서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사나이' 라는 뜻의 '오오키 긴타로( 大木金太郎)'라는 이름을 받고, 특기로 박치기를 연마했다. 일본 현지에서 '원폭 박치기'로 불릴 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 그의 박치기는 서양의 거구 레슬러도 한 번에 쓰러질 정도였다.
김일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중반까지 '박치기 왕'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1963년 미국 원정 세계레슬링협회 세계태그챔피언, 1964년 북아메리카 태그챔피언, 1965년 극동 헤비급 챔피언, 1966년 도쿄 올아시아 태그챔피언, 1967년 제23대 세계레슬링협회 세계헤비급 챔피언, 1972년 도쿄 인터내셔널 세계 헤비급 태그챔피언 등 20여 차례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고 30여 년간 3,000여 차례의 경기를 치렀다.
은퇴 후 사업을 하다가 1987년부터 레슬링 후유증과 고혈압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후배 양성과 프로레슬링 재건에 힘썼다.
1994년 국민훈장 석류장, 2000년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으며 사후인 2006년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되었다. 2009년 9월 고향인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에 김일기념체육관과 기념관, 야외공원 등이 조성되었으며, 매년 그를 추모하는 박치기 대회와 프로레슬링 대회 등이 열리고 있다. 2018 대한체육회 선정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선정되었다.
프로 레슬링 Pro Wrestling
김일 (金一) 對 안토니오 이노키 (猪木寛至 Antonio Inoki) (1974)
'박치기왕' 김일,
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 안장
[중앙일보] 입력 2020.05.22 15:48
'박치기왕' 고(故) 김일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다.
22일 안장식에는 대한체육회 김승호 사무총장을 비롯한 체육회 임직원, 유족 등 50명이 참석했다. 국가보훈처 국립묘지 안장대상심의위원회는 올해 4월 2일 한국 체육 발전에 공헌한 고인의 다양한 업적을 인정해 국립현충원 안장을 최종 승인했다.
대한체육회가 선정하는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국립묘역에 안장된 사례는 김일을 포함해 2002년 고 손기정(육상 마라톤), 2006년 고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 2019년 고 서윤복(육상 마라톤)·故 김성집(역도) 등 5명이다.
김일은 1960년대 강력한 박치기 공격을 주무기로 프로레슬링을 평정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 챔피언을 여러 차례 지냈다. 당시 국민에게 큰 감동과 즐거움을 줬다. 김일은 1994년 국민훈장 석류장, 2000년 체육훈장 맹호장, 2006년 별세 후 체육훈장 청룡장을 추서 받았다.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는 2018년 선정됐다.
KBS방송 인물현대사
영웅이된 이방인 역도산과 김일의 만남
김일의 박치기 전수
격투기 (COMBAT SPORTS)
역도산(김신락,일본명 모모타)은 가라데(당수도) 촙으로 유명. 60년대 역도산의 경기모습과 생활 모습
김일 선수가 타계하던 날 일본의 TV 아나운서는
"그는 비록 한국인 이었지만 우리들 마음엔 언제나 일본인 이었습니다."...
그리운 '박치기왕', 故 김일 10주기 / YTN (Yes! Top News)
Oct 25, 2016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던 1960~70년대.
링 위에서 벼락같은 박치기로 상대 선수를 쓰러뜨리며 국민에게 희열을 줬던 흑백 TV 속 영웅, 고 김일 선수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한국 프로레슬러 1세대로 꼽히는 김일 선수는 1929년, 전라남도 고흥의 섬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0cm가 넘는 건장한 체격으로 소년 시절부터 씨름대회를 휩쓸었는데요.
당시 세계챔피언으로 명성을 떨치던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기사를 읽고,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한 일본행을 결심합니다.
27살이던 1956년, 일본으로 밀항했지만 적발돼 1년간 복역하게 됩니다.
교도소에서 그는 끊임없이 역도산에게 편지를 썼고, 그 열정에 탄복한 역도산의 보증으로 풀려나 도쿄의 역도산 체육관에 1기 문하생으로 들어갑니다.
고된 훈련을 거친 김일 선수는 1958년, 오오키 긴타로라는 이름으로 데뷔합니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사나이'라는 뜻으로 스승 역도산이 지어준 이름인데요.
1963년, 생애 최초로 세계 레슬링협회(WWA)의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고, 약 3천 번의 국내외 경기를 치르는 동안 20여 차례 세계 타이틀을 따냈습니다.
김일 선수의 호쾌한 경기는 당시 많은 국민에게 큰 기쁨을 안겼습니다.
사마귀처럼 머리를 뒤로 젖혔다 돌진하는 박치기로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등 내로라하는 세계 거인들을 쓰러뜨리면 전국은 환호성으로 들썩였습니다.
특히 호랑이가 그려진 가운을 입은 김일 선수가 일본 선수를 때려눕히는 광경은 민족적 울분을 씻어주기도 했습니다.
1980년 은퇴 후 후배 양성에 매진하던 김일 선수는 레슬링 후유증으로 생긴 뇌혈관 질환 등을 앓으며 오랜 기간 병마와 싸웠고, 2006년 10월 26일 타계했습니다.
후배들은 한국에 프로레슬링을 꽃피웠던 김일 선수를 잊지 않기 위해 그의 고향인 거금도에서 추모 레슬링대회를 마련했습니다.
거금도는 김일 선수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을 때 고향에 전기가 들어가도록 부탁했다는 일화가 있는 곳이기도 한데요.
가슴 따뜻한 박치기왕을 기리는 뜻깊은 무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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