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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맛을 세계에"…'K-라면 돌풍' 신춘호 회장이 남긴 말

Jimie 2021. 3. 27. 13:31

"한국의 맛을 세계에"…'K-라면 돌풍' 신춘호 회장이 남긴 말은

머니투데이  |입력2021.03.27 10:48 |수정 2021.03.27 11:44 |

 

[머니투데이 박미주 기자] [신춘호 농심회장 별세]

 

 

농심을 라면업계 부동의 1위로 키워낸 창업주 신춘호 회장(91)이 27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1930년생인 신 회장은 자신의 성을 딴 '신(辛)라면' 등 공전의 히트상품을 연이어 탄생시켜 '라면의 신'이라 불린 인물이다.

신라면은 신 회장을 상징하는 상품이다. 자신의 성을 딴 네이밍 뿐 아니라 농심이 수십년간 라면업계 1위를 수성하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지금은 100여개가 넘는 국가에서 팔리고 있다.

신 회장을 수식하는 또 다른 말은 '작명의 달인'이다. 성공한 라면 이름 뿐 아니라 '새우깡' 등 깡 시리즈 등 농심 제품 대부분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특히 새우깡은 막내딸의 발음에서 착안해 아이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깡을 붙여 시리즈로 만들었다고 한다. '너구리 한마리 몰고 가세요'나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 같은 광고 카피도 대표적인 그의 아이디어다.

신 회장은 어록으로도 유명하다. 다음은 그가 남긴 어록이다.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사진= 농심

 


1965년 창업당시 라면시장에 진출하며… "라면은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 할 것"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하며 따라서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한다. 이런 제품이라면 우리의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범국가적인 혼분식 장려운동도 있으니 사업전망도 밝다”


창업초기 우리 손으로 라면을 만들자며… "스스로 서야 멀리 갈 수 있다"

“스스로 서야 멀리 갈 수 있다.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라면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신춘호 회장은 회사 설립부터 연구개발 부서를 따로 두었다. 평소 ‘다른 것은 몰라도 연구개발 역량 경쟁에서 절대 뒤지지 말라’고 했다. 1971년 새우깡 개발 당시에도 “맨땅에서 시작하자니 우리 기술진이 힘들겠지만, 우리 손으로 개발한 기술은 고스란히 우리의 지적재산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했다. 새우깡은 4.5톤 트럭 80여대 물량의 밀가루를 사용하면서 개발해 냈다.


1986년 신라면을 출시하며… "매우니까 간결하게 매울 신"

“저의 성(姓)을 이용해 라면 팔아보자는 게 아닙니다. 매우니까 간결하게 ‘매울 신(辛)’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신춘호 회장이 브랜드의 중요성에 눈을 뜬 것은 1970년 ‘짜장면’의 실패에서였다. 유명 조리장을 초빙해 요리법을 배우고 7개월간의 개발 기간을 거쳐 내놓은 국내 최초 짜장라면 ‘짜장면’은 출시 초기 소위 대박이 났다. 하지만 비슷한 이름으로 급조된 미투제품의 낮은 품질에 불만을 느낀 소비자들은 짜장라면 전체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결국 농심의 짜장면도 사라지게 됐다. 당시 신춘호회장은 “제품의 품질도 중요하지만 모방할 수 없는 브랜드로 확실한 차별화 전략이 중요하다”고 깨닫는다.

유기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이나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은 새우깡 등 농심의 역대 히트작품에는 신춘호회장의 천재성이 반영돼 있다.

신춘호 회장의 마지막 작품은 옥수수깡이다. 신춘호회장은 “원재료를 강조한 새우깡이나, 감자깡, 고구마깡 등이 있고, 이 제품도 다르지 않으니 옥수수깡이 좋겠다”고 했다. 옥수수깡은 2020년 10월 출시됐고 품절대란을 일으킬 만큼 화제가 됐다.


1990년대 해외 수출 본격화에 앞서… "한국의 맛을 세계에"


“농심 브랜드를 그대로 해외에 가져간다. 얼큰한 맛을 순화시키지도 말고 포장디자인도 바꾸지 말자. 최고의 품질인 만큼 프리미엄의 이미지를 확보하자. 한국의 맛을 온전히 세계에 전하는 것이다”

농심이 라면을 처음 수출한 것은 창업 6년만인 1971년부터다. 지금은 세계 100여개국에 농심이 만든 라면을 공급하고 있다. 유럽의 최고봉에서 남미의 최남단까지다. 농심은 지난해 사상 최대인 9억 9천만불의 해외매출을 기록했다.


2010년 조회사에서… "식품도 명품만 팔리는 시대"


“식품도 명품만 팔리는 시대다.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농심은 2011년 프리미엄라면 신라면블랙을 출시했다. 신라면블랙은 출시 초기 규제와 생산중단의 역경을 딛고, 지난해 뉴욕타임즈가 꼽은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올랐다.

“돌이켜보면 시작부터 참 어렵게 꾸려왔다. 밀가루 반죽과 씨름하고 한여름 가마솥 옆에서 비지땀을 흘렸다. 내 손으로 만들고 이름까지 지었으니 농심의 라면과 스낵은 다 내 자식같다.

배가 고파 고통받던 시절, 내가 하는 라면사업이 국가적인 과제 해결에 미력이나마 보탰다는 자부심을 가져본다. 산업화 과정의 대열에서 우리 농심도 정말 숨가쁘게 달려왔다. 이제는 세계시장을 무대로 우리의 발걸음을 다그치고 있다.

우리의 농심가족들이 나는 정말 자랑스럽다. 쌓아온 소중한 경험과 힘을,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순수하고 정직한 농부의 마음으로, 식품에 대한 사명감을 가슴에 새기면서 세계로 나아가자” (고 신춘호 회장 저서 '철학을 가진 쟁이는 행복하다' 중 발췌)

박미주 기자 beyond@mt.co.kr

 

“나는 서민을 위해 라면을 만든 적이 없다. 이건희 회장도 라면을 즐긴다. 라면은 서민만 먹는 게 아니다. 나는 국민을 위해 라면을 만든다.”

신춘호 회장의 철학은 그의 자서전 ‘철학을 가진 쟁이는 행복하다’에 드러나 있다. 

“농심은 라면쟁이, 스낵쟁이라는 쟁이정신으로 시작하고 쟁이정신으로 끝을 봐야 한다. 서비스면 서비스, 기술이면 기술, 광고면 광고, 영업이면 영업, 각 방면마다 고객이 요구하는 자세가 있고 수준이 있다. 우리는 기꺼이 그 요구에 따라서 맞춰야 한다.” 

 

 

신춘호 농심 회장은 1930년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5남 5녀 집안의 3남으로 태어났다. 맏형인 신격호 회장은 일찍이 일본으로 떠나고 그는 한국전쟁 당시 의용경찰로 군 복무를 마쳤다. 1952년 23살의 나이에 동아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고교를 다닐 때부터 신 회장은 학업과 장사를 함께 했다. 부산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에서 장사 경험을 쌓았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다. 형 신격호 회장을 도와 1958년 일본롯데 부사장을 맡았다. 하지만 신춘호 회장은 라면 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6.25 전쟁이 끝나고 많은 사람이 생활고를 겪으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이었다.

신격호 회장은 사업 부문이 겹친다는 이유 등으로 동생의 라면 사업을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신춘호 회장은 강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신춘호 회장은 지원 한푼 받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와 1965년 롯데공업을 설립한다. 독자적인 라면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후 형제간의 불화는 더 고조됐다.

롯데공업의 ‘롯데라면’이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워 나가자, 신격호 회장은 ‘롯데’라는 상호명을 사용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신춘호 회장은 1978년 사명을 농심(農心)으로 변경한다. 농심은 의미 그대로 농부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성실과 정직으로 행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의미로 신 회장이 직접 작명했다고 한다.

형제간 갈등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풀리지 않은 상태다. 신춘호 회장은 사명 변경 이후 형과 의절 선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도 신 회장은 집안 행사나 선친 제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형제로는 신선호(4남) 일본 산사스 사장, 신준호(5남) 푸르밀 회장, 신정희(6녀) 동화면세점 사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