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정전 70년, 백선엽 장군의 딸 백남희씨
2013년에 촬영한 백 장군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6·25전쟁 발발 73주년을 맞았다. 정전 70주년이기도 한 올해 유난히 분주한 사람이 있다. 6·25전쟁의 영웅이자 대한민국 최초 4성장군인 고(故) 백선엽 장군(1920~2020)의 맏딸인 백남희(75)씨다. 미국에서 거주하는 그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아버지의 유지를 받드는 일에 앞장서느라 여념이 없다. 3주기 기일을 닷새 앞둔 다음달 5일에는 6·25 최대 격전지인 경북 칠곡의 다부동전투 현장에서 백 장군의 동상 제막식이 열린다. 국가보훈부가 정부 예산을 들여 행하는 최초의 추모 사업이란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을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건져낸 전쟁영웅이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과거 정부는 ‘친일’ 논란에 휘말린 백 장군에 대한 평가와 추모 사업에 인색했던 것이 사실이다. 동상 제막에 앞서 이달 30일에는 백선엽기념재단이 발족된다.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백남희씨를 만났다.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아버지 백선엽 장군의 생애를 추억하는 백남희씨. 김상선 기자
백선엽 장군 동상 제막식은 잘 준비되고 있나요.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들어설 동상이 다 만들어져서 제막식만 앞두고 있습니다. 다른 동상과 달리 좀 특이한 면이 있습니다. 2분 정도 주기로 360도 한 바퀴를 도는 회전형 동상으로 제작했습니다. 속도는 더 천천히 도는 것으로 조절할 수 있어요. 아버님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고 수호한다는 의미를 담았다는 게 제작자의 설명입니다. ”
동상 건립 과정을 설명해 주시죠.
“우선 국회에서 동상 건립 예산 1억5000만원을 확보한 건 아버님을 정부 측에서 제대로 평가하는 첫걸음이 됐습니다. 박민식 보훈부장관의 약속이 실행된 겁니다. 동상을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모시는 건 2년 전에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아이디어를 냈고, 경북도 예산으로 1억원을 지원했습니다. 이우경 자유총연맹 경북도 회장도 1억원을 기부했습니다. 사실 더 감사한 건 경북도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아주신 게 2억1000만원이나 됐다는 겁니다. 정말 귀한 돈이에요.”
백 장군, 친일 논란에 “역사가 밝힐 것”
6·25 당시 평양 탈환 상황을 미 1군단장에게 설명하는 백선엽 장군. [연합뉴스]
동상 제막에 앞서 특별한 이벤트가 열린다면서요.
“맞습니다. 동상 제막식이 7월 5일 오후 2시인데, 오전 11시 반에 ‘다부동전투 지게부대원 추모비’를 먼저 제막합니다. 당시 지게에 보급품을 싣고 사선을 넘나들었던 분들을 지게부대원이라고 불렀잖아요. 평생 나라를 지킨 평범한 노병이라고 자칭하신 아버님은 지게부대원들이 빛을 못 보고 잊혀지는 걸 마음아파 하셨어요. 그래서 이번에 4.2m짜리 아버님 동상이 제막되기에 앞서 지게부대 추모비를 먼저 세워드리고 그 다음에 아버님 동상이 서야 아버님도 떳떳하고 마음이 편하실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 사재를 들여 추모비를 제작했습니다. 진작 못 세워 드린 게 한이죠.”
아버님이 대전 현충원에 계신데요. 고인은 전우들과 부하들이 잠들어 있는 다부동에 묻히기를 원하셨다고 합니다.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어요. 아버님은 생전에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군가를 언급하시면서 ‘당시에 전우의 시체를 수습도 못하고 떠났는데 나 혼자 어떻게 현충원에 편안히 묻히겠느냐. 그분들이 있는 데로 가서 묻히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칠곡에 땅도 사 놓았는데 뜻대로 되지 못했어요. 지금이라도 기회가 된다면 아버님 유지를 받들어 이장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어요.”
장례식 때 군복을 수의로 입고 ‘영원한 군인’으로 잠드셨는데, 6·25 때 아버님이 착용했던 건가요.
“6·25 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님 군복 중에서 전투복이 딱 하나 있었고, 나머지는 장군복 같은 것이었어요. 그 전투복을 입혀드리고 싶었는데 당시 참모들이 ‘그건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말려서 못 입혀드렸어요. 그래서 아버님이 입었던 것은 아니지만 1950년 전투 때 우리 국군이 입었던 군복을 어렵게 구해서 대신 입혀드렸죠.”
밤새 무전기를 켜 놓은 상태에서 계속 전황을 확인해서 ‘백선엽 장군은 잠을 안 자는 사람’이라는 얘기가 있었다고 하던데요.
“20여년 전 6·25 기념행사장에서 어떤 노병이 ‘아버님이 전쟁 중에는 잠을 안 주무셨다고 그러는데 사실이냐’ 묻기에 잘 모르겠다며 아버님께 여쭤봤어요. 아버님도 그건 아니라고 하셨죠. 그런데 당시 부하들의 말을 종합하면 사단장 텐트가 있고 상황실 텐트가 있는데 밤에 사단장 텐트에서 아버님을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늘 상황실 의자에 앉아 계신 아버님 그림자를 바깥에서 봤다고 해요.”
그럼 아버님은 뭘 하셨던 걸까요.
“당시 사단장 텐트 안에 접었다폈다 할 수 있는 간이침대가 있었대요. 왜 거기서 잠깐씩이라도 안 주무셨냐고 여쭤봤더니 ‘무전이 오면 병사들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사단장 텐트에서 상황실까지 가는 시간도 아까워서 상황실에 머물렀다고 해요. 잠깐씩 의자에서 잘 수도 있었겠지만 바깥의 부하들은 ‘우리 사단장님이 늘 저기를 지키고 계신데 우리가 조금 힘들어도 견디자’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인의예지 갖추려고 평생 노력
백 장군과 딸 남희의 뽀뽀 장면을 실은 뉴욕 타임스. [사진 백남희]
위대한 장군 이전에 아버지와 딸이잖아요.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장군인지 뭔지도 모르고, 훌륭한지 안 훌륭한지도 몰랐죠. 그저 저를 복둥이라고 그러면서 예뻐하셨으니까 저도 아버지가 최고로 좋았죠. 커 가면서 아버지 대외활동에 몸이 약한 어머니 대신해서 쫓아 다녔습니다. 가고 싶지 않은데 아버지가 자꾸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죠. 아버지 돌아가시니까 그 다음에서야 정신이 번쩍 나더라고요.”
그는 “미군 카메라맨이 와서 한복과 양복을 갈아입히며 하루종일 촬영을 한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그런데 대구에서 촬영된 이 사진들 가운데 참모총장이던 백 장군과 딸 남희가 뽀뽀하는 장면이 뉴욕타임스 등에 크게 게재됐다. 이는 미국과 유엔군 사령부가 기획한 에버레디 오퍼레이션(Everready Operation)과 연관이 있다. 1975년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6·25 당시 미국은 휴전협상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등 독자 행보를 보인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할 계획을 세우고 대체할 인물을 물색했다. 이 때 이 대통령을 대신할 인물로 거론된 후보 중의 한 명이 백선엽 장군이다. 백씨에게 당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냐고 묻자 “아버지한테서 직접 들은 건 없고, 아버지의 최측근이었던 이상국 장군으로부터 몇 차례 들은 바는 있다”며 “이 장군이 미국과 백 장군 사이의 메신저로서 의사 타진을 했는데 아버님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일축했다”고 했다. 딸과 뽀뽀하는 백 장군의 사진이 미국 유력지들에 보도된 것은 ‘군인’의 이미지를 탈색시키고 ‘민간인’의 따뜻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언론플레이였던 것이다. 여태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다.
딸이 본 아버지 성격은 어땠나요.
“제가 아는 아버지하고 다른 사람이 보는 그분은 너무 차이가 컸어요. 저한테는 평생 큰소리 한번 안 치시고 노(no)라고 해보신 적이 없어요. 다른 아버지처럼 딸에게 자상했고 귀여워해 줬죠. 언제나 집에 들어오면서 큰소리로 ‘남희야’ 라고 불렀죠. 내가 없으면 아버지가 시무룩해지니까 육군본부에서 아버지 오시기 전에 저를 집에 데려다 놓곤 했죠. 그런데 아버지는 저만 빼고 모든 사람에게 존재 자체가 ‘찬바람’이었어요. 워낙 말씀이 없으셨으니까요.”
지난 정부에서 백 장군의 친일 행적을 부각시키는 바람에 마음이 많이 상하셨을 것 같은데요.
“아버님은 평생 정치를 안 하셨잖아요. 그런 얘기가 나오면 저는 딸 입장에서는 속상하니까 아버지한테 왜 대답을 안 하시느냐 여쭤 보죠. 아버님은 늘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 역사가 밝혀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그러셨어요. 저도 이제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담담해요. 섭섭하거나 그런 거 없어요. 진심입니다.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저도 미국 생활을 해서 아는데, 많은 한국분들이 이민 생활하면서 무시와 인종차별 당할 때 아이들에게 ‘너희가 더 공부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가르치잖아요. 상상하긴 어렵지만 일제 강점기때 아버지도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 사람보다 더 잘돼야 한다는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2010년 1월부터 2011년 2월까지 중앙일보에 연재된 백선엽 장군 회고록 지면. [중앙포토]
청년 백선엽은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하고, 조선인 독립군 토벌대로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백 장군은 1943년 12월 간도특설대 기박련(기관총·박격포중대) 소속으로 중국 팔로군 공격 작전에 참여했다. 일제 패망 때 그의 신분은 만주국군 중위였다. 백선엽이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에 대해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은 “백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부임한 1943년은 이미 만주 일대 독립군들이 해산돼 없어지고 소련 각지로 퍼져 나간 뒤였다”고 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때려잡았다”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령 만주군 복무 행적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해도 백선엽의 일생은 공과 과를 아울러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백선엽기념재단이 이달 말 출범한다면서요.
“김관진 장군이 이사장이 되셨으니까 잘 이끌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아버님이 늘 가슴 아파하신 게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국군·미군·유엔군, 그리고 지게부대 같은 민간인 희생자들이었거든요. 그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자부심과 용기를 주는 희망의 재단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보훈처가 보훈부로 승격했는데요. 나라 지킨 분들에 대한 예우는 어떻게 하는 게 맞을까요.
“6·25 당시 희생하신 분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잖아요. 그분들 외에도 제복을 입고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지난달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 영상을 송출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어요. 이런 일을 하시는 분들이 사심 없는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보훈부가 더 많은 일들을 해 주시길 기대합니다.”
후대 사람들이 백선엽이라는 분을 어떻게 기억했으면 좋겠습니까.
“제가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아버님을 지켜본 사람인데요, 아버님은 인의예지(仁義禮智, 어짊·의로움·예의·지혜)를 갖추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하신 분이라 봅니다. 업적은 아버님과 함께한 장병들의 몫이고, 제 몫은 제가 아는 아버님을 알리는 거라 생각합니다.”
정영재 기자 jerr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