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후추·육두구·정향, 향신료가 바다의 주인을 바꿔버렸다

Jimie 2023. 5. 1. 04:08

후추·육두구·정향, 향신료가 바다의 주인을 바꿔버렸다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24] 향신료 전쟁 ①

입력 2023.04.30. 08:00업데이트 2023.04.3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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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 등 향신료(香辛料, Spice)는 경제사에서 상상 이상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근대의 막을 연 항해 시대와 식민지 획득 경쟁은 바로 향신료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대 자체가 향신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육류의 맛을 내는데 동양의 향신료가 필수적이었다. 심지어 향신료는 전염병 예방과 악취를 없애는 의약품으로도 사용되었다. 향신료 중에서도 인도의 후추, 동인도 제도의 육두구, 몰루카 제도의 정향이 대표적이었다.

 

◇실크로드가 막히자 향신료 가격이 폭등하다

동방무역을 가로막은 오스만제국의 발흥. /위키피디아

그런데 14세기 초, 무역을 중시해 실크로드를 보호해 주던 원(元)나라의 힘이 떨어진 틈을 타 오스만 제국이 발흥하여 유럽과 동방의 무역로를 차단했다. 그러자 유럽에서 후추 등 동방상품의 가격이 폭등했다. 생산지 가격의 100배는 보통이었고 육두구(nutmeg)의 경우 600배까지 치솟았다. 동양의 향신료만 얻을 수 있으면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다. “중국보다 동쪽에 황금의 나라가 있으며, 그곳 사람들은 후추를 물 쓰듯 한다”는 대목에서 유럽인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동방견문록에는 이렇듯 과장되거나 불확실한 부분도 있으나, 그는 베네치아의 상인답게 향신료의 산지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정확했다. 이렇게 되자 신항로 개척의 필요성은 한층 절실해졌다. 1492년 콜럼버스는 후추와 금을 찾아 인도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가 찾은 곳은 서인도제도와 신대륙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가 찾은 곳이 인도인줄 알았다. 그래서 원주민을 ‘인도 사람이라는 뜻’의 인디언이라 불렀다. 후세 사람들이 콜럼버스를 기려 그가 최초로 찾은 섬들을 ‘인도’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서인도제도라 명명했다.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의 인도항로 발견

 

1498년에는 바스쿠 다 가마의 포르투갈 함대가 향신료를 찾아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처음으로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 이르렀다. 그가 북극성이 안 보이는 적도 이남을 항해할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 랍비이자 천문학자 아브라함 자쿠토가 만든 위도 계산기 ‘천측력’이 있어 가능했다. 바스쿠 다 가마가 도착한 아프리카 동해안에는 많은 이슬람 상선들이 입항해 있었다. 그곳에서 계절풍을 타고 인도양을 가로지를 수 있었던 것은 아랍인 뱃길 안내자 덕분이었다. 이렇게 그는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다. ‘진짜 인도’에 도착한 것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 경로. /위키피디아

그 무렵의 인도는 유럽보다 훨씬 풍요로운 국가였다. 향신료 이외에도 갖가지 수공업이 발전되어 있었다. 캘리컷의 무명은 고급품이어서 유럽인들이 한눈에 반했다. 이때 유럽인들은 이 직물에 ‘캘리코’(calico)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표백된 상태가 옥처럼 깨끗한 서양 포(布)라 하여 ‘옥양목’(玉洋木)이라 불렀다. 이후 영국이 이 캘리코에 자극받아 면직물 산업부터 시작한 게 산업혁명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일행은 향신료와 캘리코 등 귀한 동양 산물을 가득 싣고 귀국했다. 리스본에 2년여 만에 도착했을 때 처음 170명 가운데 생환자는 겨우 55명뿐이었다. 하지만 인도에서 가져온 상품들은 포르투갈 상인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때 60배 곧 6000%의 이득을 남겼다. 중세 말 지중해 향신료 무역에서 얻을 수 있었던 이윤율 40%에 비하면 놀라운 이윤율이었다.

 

그 뒤 동방 산물이 이슬람 상인이나 이탈리아 중개상을 거치지 않고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유럽에 들어오면서 포르투갈 상인들은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후추, 인도 정향, 설탕, 무명, 비단, 약초, 생강, 계피, 건포도, 상아, 면화, 곡물, 카페트 등이 거래되었는데 특히 후추가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후추는 향신료로 쓰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치료제나 방부제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따라서 그 무렵 유럽에서 후추는 지참금, 세금, 집세 등으로 화폐 대신 쓰이기도 했다.

16세기 전반 포르투갈 식민지. /위키피디아

이러한 인도항로와 신대륙 발견으로 유럽인들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이때부터 서구 열강의 동양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포르투갈은 1505년에 인도 고아(Goa)에 총독을 두고 이곳을 중심으로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1511년 실론과 말레이반도의 말라카도 정복했다. 그리고 1515년 페르시아만의 무역 거점도시이자 항구인 호르무즈의 점령으로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시대는 활짝 열렸다. 이로써 본국까지 가지 않고도 여기서 아랍 상인들과 거래하여 선적 상품을 처분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1517년에는 중국에 진출해 마카오를 선점했다. 명나라는 포르투갈이 남지나해 해적을 소탕하겠다고 해서 호감을 가졌다. 마카오는 광동성의 거대한 비단 시장을 끼고 있어 중계무역 기지로는 최적의 입지였다. 이렇게 해서 포르투갈은 16세기 전반에 후추 등 향신료와 비단 등 동방무역을 독점해 거대한 부를 얻었다. 당시 대서양과 인도양 그리고 남중국해는 포르투갈의 바다였다.

 

◇탐험의 시대를 마무리한 마젤란의 세계 일주

 

그런데 이때 경쟁국이 등장한다. 1519년부터 3년여에 걸쳐 스페인이 지원한 마젤란 함대가 남미 남단을 돌아 태평양을 횡단해 동남아시아에 갔다가 아프리카 남단을 거쳐 유럽으로 되돌아오는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이로써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또한 아메리카와 인도 사이에 엄청나게 넓은 바다인 태평양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마젤란의 세계 일주. /위키피디아

후추 외에 소중한 향신료는 또 있었다. 바로 육두구와 정향이다. 육두구와 정향은 후추보다 더 귀했다. 육두구 나무는 반다제도에서만 자랐다. 반다제도는 자카르타에서 동쪽으로 약 2500킬로미터 떨어진 반다해 위에 외롭게 떠 있는 일곱여 개의 화산섬들이다. 반다제도의 섬들은 작았다. 가장 큰 섬의 길이가 10킬로미터가 되지 않고 작은 섬들의 길이는 겨우 2~3킬로미터이다. 크기는 다 합쳐도 제주도의 10분의 1도 안 되는 180㎢에 불과했다. 반다제도의 섬들과 비슷한 크기의 섬이 몰루카제도 북쪽에도 있는데 테르나테섬과 티도레섬이다. 이 두 섬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향나무가 자라는 곳이었다.

 

수 세기 동안 몰루카제도 주민들은 육두구와 정향을 재배해서 이곳을 방문하는 아랍, 말레이, 중국 상인들에게 팔았다. 이로써 육두구는 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당시 육두구와 정향은 유럽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데 12단계의 유통경로를 거쳐야 했다. 각 유통단계를 거칠 때마다 향신료의 가격은 두 배로 뛰었다.

 

스페인도 향료무역에 눈독을 들였다. 1518년 포르투갈 항해사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자신의 탐험계획이 조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페인 왕실을 찾아갔다. 그는 서쪽으로 가면 향료제도에 도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항해기간도 단축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스페인은 마젤란의 계획을 지원할 이유가 충분했다. 동인도로 가는 서쪽 항로가 개척되면 스페인 선박들은 포르투갈 항구를 이용할 필요도 없어지고 아프리카와 인도를 경유하는 동쪽 항로를 이용할 필요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칙령을 살펴보자. 아프리카 대륙 가장 서쪽에 있는 카보 베르데 제도 서쪽에서 100리그(4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상의 경계선이 있다. 1493년 교황의 칙령에 의해, 이 경계선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다. 이런 모순된 칙령이 나올 수 있던 것은 당시 교황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이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스페인이 서쪽으로 가서 향신료 제도에 도착할 수만 있다면 스페인은 그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마젤란은 스페인 왕실에 자신이 서쪽으로 항해해 아메리카 대륙을 통과할 지식과 견문을 갖추고 있음을 확신시켰다. 1519년 9월 마젤란은 스페인을 떠나 남서쪽으로 내려가 대서양을 건너 지금의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해안을 따라 내려갔다. 라플라타 강어귀를 만나자 마젤란은 드디어 태평양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플라타 강어귀를 따라 200여 킬로미터를 나아갔을 때 나타난 것은 지금의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마젤란의 실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마젤란은 실망할 때마다 다음 곶만 돌면 태평양으로 가는 통로가 나올 것이라 확신하며 계속 남으로 내려갔다. 다섯 척의 작은 배와 265명의 선원으로 시작된 항해는 날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낮의 길이는 더 짧아지고 강풍은 더 세차게 불었다. 갑작스러운 조수로 인한 위험한 해안, 거대한 파도, 끊임없는 우박과 진눈깨비 등 항해의 어려움은 더해만 갔다. 항해 도중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폭동을 진압한 마젤란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마젤란 해협을 마침내 발견하고 이를 무사히 통과했다.

 

항해 도중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폭동을 진압한 마젤란은 남위 50도에 이르러서도 태평양으로 가는 해협이 보이지 않자 겨울의 나머지를 그곳에서 보냈다. 다시 항해를 계속한 마젤란은 드디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마젤란 해협을 마침내 발견하고 이를 무사히 통과했다.

 

1520년 10월, 마젤란 선단의 배 네 척이 마젤란 해협을 통과했지만 보급품이 떨어지자 일부 선원들은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향신료 무역이 가져올 부와 영광 때문에 마젤란은 항해를 멈출 수가 없었다. 마젤란은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광대한 너비의 태평양을 건너는 일은 남아메리카 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1521년 3월 6일 탐험대가 마리아나 제도의 괌에 상륙하면서 선원들은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에서 잠시 벗어났다. 10일 뒤 마젤란은 필리핀 제도의 조그마한 섬, 막탄에 상륙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주민들과 충돌로 마젤란이 살해된 것이다.

 

마젤란 본인은 몰루카 제도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의 배와 선원들은 정향의 원산지, 테르나테 섬에 도착했다. 스페인을 떠난 지 3년, 18명으로 줄어든 생존 선원들은 마젤란 선단의 마지막 배, 빅토리아호에 26톤의 향신료를 싣고 세비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아시아 진출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곳곳에 두 나라의 중계기지와 식민지가 생겨났다. 포르투갈은 티모르, 중국, 일본 등지로 세력을 팽창해나갔고, 스페인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고 중국 진출을 시도했다.

 

◇바다의 주인이 바뀌다

 

그런데 여기서 이변이 일어났다. 1588년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 제국의 무적함대가 그간 우습게 보던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에게 패한 것이다. 이로써 바다의 주인이 바뀌었고, 인도항로의 주인공 역시 바뀌었다. 16세기 말부터 영국과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러고 보면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했다. 초기에 영국은 인도를 중심으로 거래했고,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위주로 교역했다. 이후 유럽의 상권을 쥐고 있을 뿐 아니라 동인도회사의 규모가 영국에 비해 월등하게 컸던 네덜란드의 동양 진출이 활발했다.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경우, 17세기 중엽에는 말레이반도에서 시작해 자바, 수마트라 등 향신료 섬들을 비롯해 대만, 일본과 독점적 무역권을 수중에 넣어 동남아 해상무역을 독점하게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본주의의 상징인 최초의 주식회사는 한 손에는 무역, 다른 한 손에는 총을 갖고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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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30 08:38:30
..후추 Pepper.. 인도 남부 원산지.. 십자군 전쟁 이후 후추를 이용한 레시피가 재보급되면서 10세기를 전후로 후추의 가격은 크게 오르게 되고..오늘날의 기준으로 말하면 원본은 별것도 아닌 요리에 쓰잘데기 없이 금박을 입히는 식.. .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한 후 포르투갈 상선대가 싣고 온 향신료는 베네치아 상인들이 부르는 가격의 5분의 1 수준에서 거래되었는데, 이렇게 가격을 80%나 낮춰 판매하는데도 남는 마진은 현지 매입가의 무려 60배에 수준이었다고..향신료 거래는 배 10척을 띄워 1척만 돌아와도 원금을 건질 수 있는 대박 사업../ 그러니까 콜룸부스등의 신세계 개척은 엄청난 도박사업이었다는 것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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