真白き富士の嶺 & 希望歌
希望歌에 대한 一考
혹시 몇 년 전에 방영되었던 SBS 방송국의 드라마「야인시대」를 기억하는가? 식민지 조선의 京城을 배경으로 청년 주먹꾼 김두한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로 묘한 카타르시스를 우리들에게 선사해주었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자주 애창했던 노래, 기억하시는가? (이 곡은 최근에는 영화 청연에서도 사용 되었다)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히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중에 또 다시 꿈 같도다
2.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여
세상만사를 잊었으니 희망이 족할까
이 노래의 제목은 희망가라고 한다. 필자가 이 조잡한 원고를 쓰게 된 것은, 이 우울한 미를 가지고 있는 이 노래를 곧 개봉할 기대작 영화 청연의 예고편에서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이 노래를 부르는 남자에게 묻는다 : "조선 사람이세요?"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던 노래, 실제로 식민지 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이 노래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이 노래에 대한 정보를 찾던 도중 김은신 씨의 「한권으로 보는 한국 최초 101장면」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물론 네이버로) 다음은 그 일부분의 발췌 내용이다.
'너의 희망은 무엇이냐' 밉든 곱든 우리나라 대중가요에 미친 일본 노래의 영향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것은 문학이나 연극보다도 오히려 예민하다. 더구나 식민지 시절이고 보면 그런 현상은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대중가요로 불려지게 된 최초의 노래에서부터 그런 현상을 만나게 되는 것은 우리 노래의 뿌리 깊은 병폐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준다. 그런데 그 노래가 아이로니컬하게도 <희망가>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었이냐…(중략)…세상 만사가 춘풍 중에 또다시 꿈 같도다." 너무나 유명한 이 대중가요는 실은 외국곡이다. 단지 우리의 노래로 알고 있는 것은 그 곡과 가사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바뀌어 불려졌기 때문이다. 흔히 최초의 대중가요로는 1925년 발매된…(중략)…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희망가>는 이보다 수년 전부터 대중 속에 급속히 퍼져 불려지고 있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3.1 만세운동의 물결이 지나간 뒤인 1923년 무렵이었다. 당시 대중의 마음이란 허탈감과 좌절감, 바로 그것이었다. 민족의 염원은 수포로 돌아갔고, 일제는 문화정책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겉과 속을 달리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애조띤 노래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 노래를 <희망가>라고 했다. 가사가 한국어로 되어 있으니까 그 작사자는 분명 있을 것이다. 곡조 역시 작곡자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지은 것인지도 알려지지 않은채 널리 불려지기 시작했다. 신구 문화사에서 펴낸 「한국 현대사」제 6권 「신문화 100년」에 실려있는 '대중의 감상 따라'에서 필자 박용구는 이 노래가 1910년 일본에서 크게 유행했던 <새하얀 후지산 기슭>이라는 노래라고 밝힌 바 있다. 즉, 가마쿠라 앞바다에서 중학생 12명이 보트 전복사고로 익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장례식에서 가마쿠라 여학교 학생들이 이 노래를 부른 이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곡조는 메이지 창가집에 수록된 <꿈 밖에서>를 전용한 것이었고, 가사는 가마쿠라 여학교의 미스미라는 여선생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중략)……그런데 박찬호의 「한국 가요사」에 보면 <희망가>는 1850년에 미국인 가든이 작곡한 <우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의 곡조를 보다 경쾌한 템포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여하튼 <희망가>는 외국에서 들어온 곡에 누군가 가사를 붙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작사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 사람이야 말로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 작사자로 꼽아야 마땅할 것이다.
김은신 씨는 희망가의 작사가는 알 수 없고 노래의 곡조는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했다. 그러나 필자는 의외로 너무나도 간단하게 작사가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역시 네이버는 위대하다.
다음은 작사자의 약력이다.
임학찬 [任學讚, 1890~1952]
호 추담(秋潭)·퇴관(退觀). 경상남도 김해(金海) 출생. 15세 때 부모를 따라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이듬해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서울 중앙학교로 옮겨 1910년에 졸업하였다. 김해 합성학교와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갑성(李甲成)이 보낸 '독립선언서'를 받고 김필애(金弼愛)·박순천(朴順天) 등과 의논하여 부산·마산·김해 등지에 동지들을 보내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특히, 부산에서는 일신학교를 중심으로 만세호창단(萬歲呼唱團)을 조직하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그는 이듬해 5월에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5년 간도(間島)로 건너가 독립운동 단체에 협력하다가 1926년에 귀국, 새로운 결심으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4년에 졸업한 뒤 김해군 대저면의 대지교회(大地敎會)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45년 광복이 되자, 김해군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어 혼란기의 질서유지에 힘썼다. 한편, 동주상업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을 역임한 후 동아대학교 강사·부학장 등을 지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로 시작되는 《희망가(希望歌)》는 그가 그리스도교적 신문화 계몽운동을 위하여 지은 많은 노래 가사 중 하나이다.
앞 뒤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일제시기 선각자였던 임학찬이 3.1운동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외국 곡조에 가사를 붙였음을 알 수 있다.
가사의 비밀은 밝혀졌다. 그렇다면 그 곡의 정체는?
여기서 그만둘 스펀지 팀……아니, 필자가 아니다. 필자는 일본 넷의 문을 두드렸다. 일본 서치 엔진에 몇 가지 키워드를 쳐 보았다. 대략 앞서 본 글의 이 부분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곡은 1910년에 일본에서 '七里ヶ浜の哀歌(시치리가하마의 애가)', 일명 '眞白き富士の嶺(새하얀 후지산 봉우리)'라는 제목이 붙어 전국에서 크게 유행했으며, 이후 음반에 취입되기도 했다. '眞白き富士の嶺'라는 제목은 노래 첫줄에서 따온 것인데, 6절로 된 가사는 1910년 1월23일(일)시치리가하마 해변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逗子開成中学校학생 11名과 小学生1名 등 여학생들 12명을 애도하는 내용으로서 미스미 스즈코(三角錫子, 1871-1921)라는 여교사가 지은 진혼가(鎭魂歌)다.
즉, 가마쿠라 앞바다에서 중학생 12명이 보트 전복사고로 익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장례식에서 가마쿠라 여학교 학생들이 이 노래를 부른 이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보트 전복사고는 실제로 존재했으며 노래도 실존했다. 노래의 정확한 제목은 「真白き富士の嶺」로, <새하얀 후지산 고개>였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 真白き富士の嶺
作詞 三角 錫子(미스미 스즈코,1872~1921)
作曲 Jeremiah Ingalls,1764~1828
♪ 真白き富士の嶺 새하얀 후지의 고개
1.
真白き富士の嶺 緑の江ノ島
새하얀 후지의 고개 파아란 에노시마*1)
仰ぎ見るも 今は涙
바라 보는 것도 지금은 눈물
帰らぬ十二の 雄雄しき御霊に
돌아오지 않는 열둘의 웅맹한 영령에
捧げまつる 胸と心
받들어 모시는 가슴과 마음
2.
ボートは沈みぬ 千尋の海原
보트는 가라앉아 천심의 해원
風も波も 小さき腕に
바람도 파도도 작은 팔에
力も尽き果て 呼ぶ名は父母
힘도 다하고 부르는 이름은 부모
恨みは深し 七里ヶ浜
원한은 깊어 시치리가하마*2)
*1),*2)는 모두 지명. 그 유명한 <슬램덩크>에 "겸창"으로 나오는 가마쿠라시에 있는 지명이다.
아쉽게도 그 원곡이라는 <꿈 밖에서>는 메이지 창가의 목록에 나와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더해진다.
이 노래가 정말로 이 새하얀 후지산 고개에서 왔다면,
그런데 박찬호의 「한국 가요사」에 보면 <희망가>는 1850년에 미국인 가든이 작곡한 <우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의 곡조를 보다 경쾌한 템포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이 부분으로 보아 두가지 설이 대립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미국인 가든이 작곡한 <우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의 정체는 무엇인가?
해답은 여기에 있었다. 바로 새하얀 후지산 고개의 작사 작곡자.
作詞 三角 錫子 作曲 ガードン
작사 미스미 스즈코 작곡 가든
그렇다. 둘은 다른 곡이 아니었다. 가든이 작곡한 찬송가가 이 일본노래 새하얀 후지…와 같은 곡이었던 것이다. 결국 희망가가 일본의 것을 가져왔던 미국의 것을 가져왔던 결론은 같은 것이다. 작사자가 기독교계의 임학찬이기 때문에 직접 미국 노래에 가사를 붙였을 수도 있지만, 식민지 시기의 특수성을 보아 일본을 한번 더 거쳐 들어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희망가의 곡조는 이 두 노래와는 조금 틀리다. 조선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까지 불리고 있으니, 동지제군들이여 이 가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바른 삶을 걷도록 하자. 청춘은 짧다.
일본서 이 곡조의 작곡자를 가든 작곡「ガードン作曲」이라고 소개해 한일 양국에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지만 가든이란 곡명 곧 Garden Hymn을 일본인이 오해한 것으로서 일본의 찬송가 학자들이 현재 바로잡고 있다.
편작곡자 (Jeremiah Ingalls,1764年-1828年) 잉걸스는 백인영가(White Spirituals)집《크리스천 하모니》(Christian Harmony)를 간행하면서 본디 영국의 민요였던 이 곡조를 편작곡하여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 오시니'(The Lord into His garden comes)라는 첫 구절로 6절 찬송을 작사하여 실었다. 1835년 미국 남부지방에서 간행된 찬송가《남부 하모니》(Southern Harmony)에는 곡명을 그냥 Garden이라고만 적어 넣었다. 이 찬송은 일본 성결교단(ホ―リネス敎團) 찬송가인《聖歌, 1958》623장,《新聖歌, 2001》465장에 ‘언젠지는 모르지만’(いつかは知らねど)란 가사 첫줄로 채택되어 일본 형제들이 이 곡조로 찬양을 드리고 있다.
출처:<U>http://cafe.naver.com/stjohn1981/20695</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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