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추억하라, 옛가요

Jimie 2020. 4. 18. 09:29

 

 

영남 일보

민족의 가슴을 울리고 가버린 사람들…추억하라, 옛가요

  • 글·사진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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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1-15   |  발행일 2013-11-15 제33면   |  수정 2013-11-15

 

남인수 對 현인 전설의 서바이벌 공연
부산극장서 10곡씩 주고받는 ‘대혈전’

1950년대 모 화가가 유니버살레코드 음반자켓에 그려준 당시 활동하던 옛가수와 작곡가의 인물화.

 

1962년 6월28일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정구 등 당시 장안에서 내로라하는 대중가수가 총집결했다. 타계한 ‘가요황제’ 남인수를 위한 영결식이 한국연예협회에 의해 엄수되고 있었다. 국내 대중가수로서는 첫 연예협회장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인의 임종을 지켜 본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을 비롯해 대다수 유명 여가수도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소복을 입고 운구 차량의 뒤를 따랐다. 기생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국장(國葬)’을 방불케 했다. 대한늬우스도 장례식 장면을 긴급 타전했다.

낙화유수, 애수의 소야곡, 추억의 소야곡,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무너진 사랑탑 등 불멸의 옛가요를 남긴 남인수는 1918년부터 45년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기란 험로(險路)를 헤쳐온 우리 민초의 애환을 카랑카랑하고 미려(美麗)한 음성으로 어루만졌다. ‘남성 소프라노’ 같았던 경남 진주 출신의 남인수는 이난영이 불러주는 ‘황성옛터’를 들으면서 영면에 든다.

그 자리에는 현인도 있었다. 현인이 누군가. 신라의 달밤, 서울 야곡, 비 내리는 고모령, 굳세어라 금순아 등으로 50년대 후반 남인수와 함께 가요계의 쌍두마차로 급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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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가 낳은 불세출의 가요황제 남인수. 1962년 그가 마흔다섯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타계했을 때 실린 경향신문 부고 기사.

 

 

 

 

 

 

 

 

 

 

남인수 對 현인 전설의 서바이벌 공연
부산극장서 10곡씩 주고받는 ‘대혈전’

남인수 영결식 때 이난영 등 소복차림
기생까지 거리로 쏟아져 국장 방불케

황성옛터 작사한 영천 출신의 왕평과
가수 이애리수는 노래만큼 외로운 삶

 

 

◆남인수 對 현인 ‘전설의 가요열전’

팬들은 누가 더 잘하는지 노래시합을 붙인다. 59년 이미자가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하던 그해 봄, 부산극장에서 옛가요 사상 첫 서바이벌 공연이 벌어진다. 남인수 측 응원단장은 막둥이 구봉서, 현인은 후라이보이 곽규석. 무대 오른쪽 좌석은 남인수 팬, 왼쪽은 현인 팬이 앉았다.

막이 올랐다. 남인수는 오른쪽 무대 마이크, 현인은 왼쪽 마이크를 잡는다. 현인이 먼저 ‘신라의 달밤’으로 공격한다. 남인수가 가볍게 ‘가거라 삼팔선’으로 받아넘긴다. 다시 현인이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전열을 가다듬자 남인수는 ‘청춘고백’로 응수한다. 그렇게 팽팽하게 10곡씩 주고받는다. 하지만 11번째 곡에서 승패가 갈린다. 남인수가 1942년 발표한 ‘낙화유수’(조명암 작사·이봉룡 작곡)를 발사하자 현인이 한 방 맞고 휘청거린다. 사람들은 남인수를 ‘가요 황제’로 인정한다.

◆‘황성옛터’ 작사가 왕평을 아시나요

천상의 영결식을 품은 남인수. 그 남인수가 가장 좋아했고 일제강점기 ‘조선의 세레나데’로 군림했던 황성옛터의 작사가였던 왕평(이응호), 그 노래를 불렀던 여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본명 이음전)의 삶은 너무나 기구했다.

영천 출신인 왕평은 평안북도 강계 공연장에서 급사했다. 요주의 인물로 찍힌 왕평의 장례는 일경의 눈을 피해 몰래 진행된다. 조계사 마당에서 화장이 이뤄진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올라온 아버지 이권조에게 넘겨진 유해는 청송군 파천면 목계리 수정골에 묻힌다. 그리고는 왕평은 완전히 잊어졌다.

3년 전 한국 가요사 연구의 신지평을 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 규모의 옛가요 동호회 ‘유정천리’ 회장인 영남대 국문학과 이동순 교수가 ‘왕평 살리기’에 나선다. 이에 앞서 이상희 전 내무부장관은 ‘백년설 살리기’에 나선다.

이 교수는 왕평의 친동생 이응린과 함께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왕평의 묘소에 도착한다. 처참했다.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퇴락한 묘역은 황성옛터 그 자체였다. 이 교수는 착잡한 심사를 억누르면서 고인을 위해 직접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황성옛터를 불러줬다.

연이어 이애리수의 최후도 세상에 알려진다.

일제강점기 ‘타향살이’와 함께‘제2의 애국가’로 불렸던 황성옛터. 막상 그 노래를 불렀던 이애리수는 1930년대 이후 무려 80여년 동안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2008년 10월28일자 한국일보에 의해 그녀의 노후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다. 경기도 일산 백석동의 한 요양시설에서 쓸쓸한 노년을 보내던 그녀, 2009년 향년 99세로 별세한다.

1927년 전수린이 곡을 만들었던 황성옛터는 1932년 빅타 레코드사에서 ‘황성의 적’이란 타이틀의 음반으로 나온다. 그 무렵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로 시작되는 ‘희망가’를 부른 채규엽,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로 시작되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 등이 한 시절을 풍미하고 있었다. 황성옛터는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5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가요 관계자들은 이 정도 판매량은 현재의 인구비례로 따졌을 때 500만장 정도란다.

◆옛가요의 변질

1920년대 발흥한 대한민국표 옛가요는 숱한 거장급 대중가수를 남겼다. 일제강점기에 만 6천여장의 각종 음반이 발매된다. 이 중 순수 옛가요는 약 1천500장. 황성옛터, 타향살이(고복수), 애수의 소야곡(남인수), 이별의 부산정거장(남인수), 목포의 눈물(이난영), 찔레꽃(백난아), 비내리는 고모령(현인), 눈물 젖은 두만강(김정구), 굳세어라 금순아(현인), 나그네 설움(백년설), 번지 없는 주막(백년설), 신라의 달밤(현인), 꿈에 본 내 고향(한정무), 짝사랑(고복수)….

기라성 같은 옛가요의 전통은 이후 60년대 ‘동백아가씨’의 이미자, ‘돌아가는 삼각지’의 배호, ‘바다가 육지라면’의 조미미 등에게 명맥이 이어지지만 이후 나훈아, 남진, 현철, 주현미 등으로 넘어오면서 록뮤직과 성인 트로트가 결합된 ‘록뽕(록뮤직이 가미된 뽕짝)’으로 접어들면서 옛가요의 전통은 급속히 추락하게 된다.

옛가요를 한류급 K-pop 수준으로 후손에게 전해줘야 된다고 믿는 옛가요 모임인 유정천리의 활동을 통해 우리가 잘 모르는 옛가요의 숨은 얘기를 찾아봤다.


글·사진 이춘호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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