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People

靑燕 박경원 2

Jimie 2020. 4. 17. 13:45

 


    

   

박경원 (朴敬元)

 1901년  경상북도 대구 태생. 가구를 제작하는 아버지 박업이(朴業伊)와 어머니 장두례(張斗禮)의 5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들을 바라던 차 또 딸...ㅎ 어렸을 때 이름은 원통(願桶)이다.


대구 신명여자보통학교 고등과를 17세때 중퇴하고 일본에 건너가 요코하마[橫浜] 기예학교에 입학하여 20세에 졸업했다. 그후 대구로 돌아와 22세에 대구 자혜의원 조산부 및 간호과를 2년 만에 졸업하고 간호사로 취업했다. 그러나 일찍이 비행사에 뜻을 두어 취업 후 학자금을 모아서 25세에 도쿄[東京]의 가마타[蒲田] 자동차학교에 들어가 운전사 시험에 합격했다.


26세에 같은 회사 계통의 비행학교 항공과에 입학하여 27세에 3등 비행사가 되었다. 그러나 학자금이 모자라 1년 이상을 보낸 뒤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28세가 된 해 7월에 2등 비행사가 되었다. 1931년 11월 24일에는 런던에서 1만 8,000㎞의 비행기록을 세운 영국 여자비행사 에이미 존슨의 오사카[大阪]-도쿄 간 비행을 영접·유도했다.


1933년 8월 7일 도쿄 우에다[上田] 공항을 출발하여 고국을 향하던 비행중 짙은 구름에 싸인 하코네[箱根] 항로를 우회하여 남쪽으로 비행하다 시즈오카 현[靜岡縣] 상공 산악지대에서 악천후 속에서 해발 799m의 구로다케[黑岳] 산악을 분간하지 못하고 25。 경사면에 충돌하여 죽었다

 

1901 - 한국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 출생


1901년 6월 24일에 태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朴敬元)이 조종사로서 일본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27년 1월, 3등 조종사 시험에 합격하면서였다. 이 당시의 도쿄 아사히 신문은 ‘조선출신 여성비행사 1호 탄생’이란 기사를 실어 그의 존재를 알렸다.


고국의 하늘을 날고 싶었던 박경원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33년.

서울을 경유해 중국 창춘(長春)까지 ‘일·만(日·滿)친선, 황군 위안’을 위한 장거리 비행이 허락된 것이다. 몰고갈 비행기가 없었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고이즈미 총리의 조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 체신대신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신사참배도 함께 하는 등 만남이 잦아져 둘 사이의 염문이 일본 신문 가십란에 실리기도 했다.


1933년 8월 7일 오전, 박경원이 장장 2000km의 비행을 위해 청연호(靑燕號)를 몰고 고국을 향해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그러나 50분 만에 그의 애기(愛機)는 하코네 중턱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청연호의 동체는 두동강났고 박경원은 핸들을 잡은 채 숨져 있었다.




靑燕, Blue Swallow ’은 '푸른 제비'

1920년대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간 여류비행사가 된 박경원에게  높은 하늘을 나는 꿈을 심어준 것은 조선 들녘의 제비다.


박경원은 오직 비행사가 되기 위해 돈을 모았다. 조선의 자혜의원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3년간은 무작정 돈만 모았다. 

그리하여  꿈을 안고 일본으로 날아간 조선 제비, 박경원.


박경원은 일본의 다치가와 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운 조선 최초의 민간인 비행사이다.
조종사가 되고 싶었지만 조선에선 비행술을 배울 길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참으로 당당한 여자인 것 같아요.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무수한 고통을 감수했으니까요. 그녀는 비행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는데 다른 남학생들은 그걸 인정할 수 없다며 졸업장을 찢기도 했대요. 정말 같은 여자로서 통쾌함을 느꼈어요. 그녀의 꿈과 사랑을 중점적으로 그리는 영화예요. 재미있겠죠? " 배우 故 장진영의 말이다.


“사람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나 끝나지 않은 일에 대한 책임감을 인식하게 되면 삶을 함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고 어떤 곤경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여류비행사 박경원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청연"의 푸른  꿈을 이루기 위한 주연배우 장진영의 결연함이다.



‘여자는 엉덩이가 커서 비행기 조종은 무리’라는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싼 기름 값을 벌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돈을 모았다. 

 

하늘을 날고 싶은 여자, 청연은 하늘을 날고 싶었다.


靑燕, 박경원



한국 최초 여류비행사 박경원양에 관한 소견(태양뉴스 8호)

     2018-02-11 (일) 08:36

 한국 최초 여류비행사 박경원양에 관한 소견


태양회 이사장 다카하시 고준

 

[처음에]
1933년 8월 7일, 일본 시즈오카켄 온천으로 유명한 아따미시를 내려다보는 산중에 33살의 한국 여류비행사가 조난사 당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69년 전의 일입니다만 그 당시 비행기 그 자체도 귀한 시대에 그 비행기를 조종하는 사람도 또한 귀중한 존재였다고 사료됩니다.


그 귀중한 존재인 비행사가 여성으로서 그것도 한국 여성이었다는 사실에 깊은 흥미를 끌게 함과 동시에 33세의 독신 여성이 아따미의 산중에서 사라졌다는 일에 깊은 애도의 뜻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 대구시 출신인 이 여성은 ‘박경원이라’고 합니다만 그 당시 일본 비행항공계에서도 박경원이라는 베테랑 파일럿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었을 것이겠지요.


그 장의는 일본 비행학교의 학교장으로 치러졌고 화장되어 그 유골이 고향인 한국 대구에 돌아갈 때 도쿄역에는 프랑스의 모로대사 대리와 아라키항공국사무사관 등 다수의 저명인사들의 전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애통하게 사라져 간 박경원양의 조난지에 익년 「조인 박경원 영적」이라는 기념비가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되어 낡아져서 벌써 두 번째의 기념비가 건립되었지만 그곳은 비가 오면 빗물이 마치 강과 같이 흐르기 때문에 두 번째의 기념비도 풍화되어 가고 있답니다. 내년 2002년은 박경원양이 조난 당한지 연수로 70년째가 됩니다.


우리들 봉사활동 태양회는 박경원양의 용자를 찬양함과 동시에 애도의 뜻을 표시하고자 세 번째의 박경원 비행사 위령비를 건립하고자 고려하고 있습니다.

『박경원양에 대하여』
박경원양은 1901년 명치(34년)에 한국 대구시 삼립정(덕산정) 63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대정 7년(1918년)에 그 지방의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정 15년에 일본 비행학교 조종과에 입학했습니다.
「소화 2년 1월, 삼등조종사면허 / 소화 3년 7월, 이등조종사면허」


그런 후 요요기와 다치카비행장에서 행해졌던 경기대회에 참가하여 우수한 성적을 내어 비행시간 200시간, 그 당시 비행계에서는 배테랑, 귀중한 존재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박양에게는 곤란과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박양의 양친께서는 조서(일찍 돌아가심) 하셨다는 점, 그래서 일본에서의 생활비는 형제와 친척 분들께서 내어 주셨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러나 25살에 비행학교에 들어가 30살이 되어도 독신으로 비행기에만 도취되어 있는 박양에게 고향에서 오는 지원도 적어졌다고 합니다.


그 당시 민간 비행장에서 한번 비행기에 타기 위해서는 100엔의 비용이 든다고 합니다. 이  탑승비, 생활비를 꾸려내어 준다는 것은 대단히 큰일이었겠지요. 그녀는 한국에 가지고 온 보석, 옷, 반지, 카메라 등을 팔아서 빈곤한 생활에 참고 견디며 비행장에 다녔습니다.


여성인 몸으로 파일럿으로 되고 싶다고 하는 박양은 남성에게도 잘 없는 용기와 능력도 있었겠지요. 항상 명랑하고 일은 척척 잘 해내고「한동안은 연애도 결혼도 금물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만 표면은 명랑, 활달한 그녀도 때로는 눈물을 보이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33살이 되어도 결혼하려고도 하지 않고 비행기에 도취되어 있는 그녀는 도대체 무슨 꿈이 있었을까? 그것은 태어나 고향인 대구, 모국인 한국에 향토방문비행을 하고 싶은 그 꿈이 있었습니다.

『산화』
생활고에 견디고, 연애, 결혼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꿈을 찾던 그녀에게 드디어 그 꿈을 실현할 대가 왔습니다.


소화 8년 8월 7일, 일본은 만주국이라는 환상 같은 나라를 만들었습니다만 그 만주와 조선은 당시 일본을 연결하는 친선여행의 특파원으로 뽑혀 비행하기로 되었던 것입니다.


박양은 만주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나는 알 수 없었지만 만주에 가는 도중 내, 조국 한국의 상공을 날아갈 수 있다. 또 돌아갈 때는 한국에 내려서 성대한 환영회도 계획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에 와서 9년째, 쓰라린 나날을 몇 번인가 눈물을 흘렸습니다만 한난신고를 넘어서 박양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겠지요.


그 친선비행을 목전에 둔 어느 날, 박양을 위한 축하회가 열렸습니다. 그날 축화회의 주인공은 일본어의 화복을 입고 출석 했습니다. 언제나 기름과 땀으로 범법이 된 복장으로 비행기에 도취되어 있는 박양과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여성다운 모습에 사람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당일 그 비행기에는 만주항공사, 일본항공수송, 제국비행협회, 만주국협화회, 만주국협화회, 관동군등이 후원자로 되었다고 할 정도로 박양의 친선비행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오전 10시 35분, 성대한 박수 속에 손을 크게 흔들면서 쾌조한 엔진소리와 함께 박양이 운전하는 「청년호」는 활주로를 달려가서 윙하며 지상에 떠 올라갔습니다.


이 청연호가 산중에 격돌하여 조난당한 것은 그로부터 약 50분 후의 일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7시, 그 지방의 소방단, 청년단, 경찰관 등 200명의 그 부근의 산에 찾으러 들어갔습니다.


청연호는 현악 중턱 25 경사면에 은색의 날개를 태양에 비추면서 추락해 있었습니다. 박양은 핸들을 붙든 채 절명해 있었다고 합니다만 그 기내에 박양의 신발이 나란히 놓아둔 것 같이 남아있고 핸드백도 있었습니다.
그 핸드백 속에는 박양이 화복 모습으로 찍은 두 장의 사진도 나왔습니다. 누구에게 보이려고 핸드백 속에 넣어 두었을까요?

『구름융단』
2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일본의 NHK TV 아침 드라마에 「구름융단」이 있었다.
일본의 한 여성이 파일럿을 목표로 맹렬히 공부를 하여 낡은 인습과 싸우면서 파일럿으로 되어 한없이 계속 되어 있는 새하얀 구름 위를 날아서 고향의 상공을 날며 걱정하고 있는 부모와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이야기다.


나는 그때 바빠서 아침 드라마 같은 것은 보고 있을 수 없었지만 우연히 스위치를 틀어보니 주연인 아사지요오코씨가 구름 융단 위에서 고향의 상공으로 가서 손을 흔드는 장면이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한국 최초 여류비행사 박경원 씨를 알고 난 뒤 구름 융단의 주인공인 아사지요오코씨가 연기한 여성은 일본의 첫 여류비행사가 박경원씨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NHK에 전화로 원작자는 누구고 원본은 무슨 책인가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담당자는「사실과 관계된 원본은 없고 어느 각본가가 마음대로 만든 이야기다.」라는 대답이었다.
구름 융단은 그저 단순한 소설이었지만 그래도 주인공은 태어난 고향의 상공을 날면서 어머니와 동네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오랜 동안의 소원을 풀었다.


박 양도 내 고향의 상공에서 부모의 묘소를 보고 형제와 친구들에게 상공에서 손을 흔들고 싶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생각된다. 박 양 신고에 견딘 지 9년,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하네다를 떠난 지 50분, 시커먼 구름의 방해로 안개의 아따미 산중에 꽃을 날렸다.


날개가 없는 인간, 그래서 대공을 날고 싶다고 동경을 가진다.
그 동경이 더욱 꿈을 태워 꿈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꿈은 깨어지고 고향의 상공에서 손을 흔드는 일은 못했다.
듣자면 이 용감한 한국 여류비행사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매년 8월 7일 조난지에 꽃을 올리고 향을 피우는 일본 사람이 계셨지만 박양이 살아있다면 올해 100살, 일본사람이라도 박양을 아는 사람도 없고 향을 피우는 사람도 없어졌다.


그러나 숭고한 이 하늘의 순난자의 명복을 기원 드리며 이 분의 위령비를 건립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부디 우리들의 소의에 이해와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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