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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朴敬元)

Jimie 2020. 4. 17. 13:15

 

 

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朴敬元)  

 

 

      

1917년 요코하마로

 

박경원은 1897년 대구부 덕산정(德山町) 63번지에서  5녀 1남 중 5녀로 태어났다. 위로 네 명의 언니를 두고 다섯째 딸로 태어난 박경원은, 섭섭이라는 이름을 가진 넷째 언니에 이어 원통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덕산정(德山町)은 현재의 덕산로이다. 탄생 100여 년이 지났다. 

 

 1912년 대구에 있는 미국 장로회 계 명신여학교에 들어가 1916년 졸업했다. 이어 고등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중퇴한다. 당시 보통 여자가 이만큼 공부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1917년에는 일본을 향해 떠나간다. 9월 13일 아침 대구 역을 떠난다. 1903년 이래 대구에 와 제사기술을 지도하고 있던 미와(三輪如鐵)의 후원에 의해 일본으로 보내진 것이다.

단독여행이다. 그녀는 비행사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일본에 건너 간 그녀는 곧 요코하마(橫浜) 미나미 요시다 죠(南吉田町)에 있는 가사하라(笠原) 공예강습소에 입학했다. 그곳은 견직, 마직물 등을 짜는 기술을 가르치는 직공양성소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2년 반을 지낸다. 어려움 속에 돈을 모으려 했으나 돈은 모아지지 않았다. 1919년부터는 재일 대한 요코하마 교회에 나가 크리스천이 된다. 이듬해 1920년 2월 일단 귀국한다. 같은 해 10월 그녀는 대구의 자혜(慈惠)의원 조산부 간호부과에 입학한다. 간호부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 비행사 교육을 받을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22년 12월 10일 1등 비행사 안창남은 동아일보 주최로 고국 방문 비행을 한다. 여의도 상공을 나는 그의 자랑스런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 왔다. 그는 서울에 오기 직전인 11월 제국비행협회 주최의 도쿄-오사카 간 우편비행에 참가해 입상,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안창남은 1921년 도쿄 수자키(洲崎)에 있는 오구리(小栗) 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배웠고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1등 비행사 자격을 얻었다.

 

비행기, 공덕리 주둔 일본군이 제안
일본의 비행기 연구 개발은 1895년 청일전쟁에 투입된 일본군의 한 병사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애원현(愛媛縣) 우화도(宇和島) 출신 이궁충팔(二宮忠八)이란 병졸이었다. 그는 청일전쟁이 시작되자 제 5혼성여단의 한 병사로서 조선 땅에 들어 왔다. 그는 당시 경성 마포(麻浦)의 공덕리(孔德里)에 주둔했다. 그는 새를 자세히 관찰해 비행의 원리를 발견하고 모형비행기 실험비행에 성공했다. 그는 자기가 고안해 낸 비행기를 제작하자고 군 당국에 건의했다. 공덕리에서 그는 상관을 통해 비행기의 군사적 가치를 설파, 자신이 고안한 비행기를 군에서 채택하여 구체화하도록 건의했다. 그러나 여단장이었던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1850-1926) 소장은 이를 각하시켰다.
일본인 최초 비행은 1910년 12월 14일에 이뤄진다. 이에 따라 일본 육군은 1911년 4월 사이타마 현 도코로자와(所澤)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매수, 일본 최초의 비행장을 개설하게 된다. 본격적인 비행기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1919년에는 이곳에 육군비행학교를 개설한다. 프랑스에서 온 폴 대령이 교관으로서 항공장교를 양성한다. 도코로자와-경성간 육군대비행도 이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몇 년 전 도쿄대의 연구소 사람들과 도코로자와에 갈 기회가 있었다. 다른 건축물 견학을 가는 길이었다. 나는 도코로자와란 지명에 눈이 먼저 갔다. 나는 일행과 견학을 끝내고 도코로자와와 다치가와(立川) 시로 발길을 돌렸다. 박경원의 행동 반경이 도코로자와와 다치가와 시에서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5년 1월 드디어 비행학교에
박경원은 도쿄 가마다(蒲田)에 있는 일본비행학교 본교에 들어갔다. 1925년 1월이었다. 그녀는 원래 안창남이 교관으로 있는 오구리 비행학교로 가고 싶어했으나 오구리 비행학교는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불타고 없어졌다. 안창남도 가고시마에서 혼다(本田稻作)가 경영하는 수륙(水陸)비행장으로 옮겼고 그 뒷소식은 끊겨 있었다. 1925년 2월 경 중국 상하이에 가 있다는 뉴스뿐이었다. 안창남은 박경원보다 4살 아래였다.

그녀가 입학할 즈음 이미 일본 여류 비행사 두 명이 탄생하고 있었다. 3등 비행사였다.
당시 비행사 급수는 1, 2, 3등 비행사로 나눠지고 있었다. 20시간 비행 경력이면 3등, 50시간은 2등, 100시간이면 1등 비행사 시험 자격이 주어졌다. 순서는 3등부터 시작한다.
3등 비행사는 자가용 비행기로 운동장 주변만 비행하고, 2등 비행사가 되면 비행은 자유였지만, 조종은 자가용 비행기뿐이었다. 1등 비행사가 되면 영업용 비행기도 조종할 수 있었다. 그런데 1등 조종사는 남자에 한하여 자격이 생긴다.
‘여자는 엉덩이가 커서 조종은 무리'라는 성차별의 조롱도 있던 시대였다.

그녀는 이곳에서는 먼저 지상 교육을 받았다. 아직 자격과 경제력이 허락지 않아 조종과에는 들어 갈 수 없었다. 그 지상 교육이 자동차 운전이었다. 이것이 비행기를 이해하는데 중요했기 때문이다. 안창남도 먼저 자동차 운전을 배웠고 많은 비행사들도 그 코스를 밟았다.
그녀에게 후원자는 동아일보였다. 1925년 7월 9일자를 시작으로 9월 4일자, 12월 12일자에 연속으로 그녀에 관한 기사가 나갔다.
‘여 용사 박경원 양 비행학교에 입학,
부모의 거절과 많은 청혼도 버리고 단연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가 지원'(동아일보 1925년 7월 9일자)
‘녀자가 비행긔 공부를 한다고 그리 장할 것야 무엇이겟슴닛가마는 일본에서는 아즉 이에 뜻을 두는 녀자가 드물 뿐 아니라 조선 녀자로는 나 한사람뿐임으로 때로는 남달은 곤난을 격근 일이 만앗슴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선생들의 호의로 그 학교 조교수로 잠간 잇게 되엿섰슴니다. 그런데 작란 조화하는 일본 학생들이 하도 놀리고 못살게 굴어서 할 수 업시 남복(男服)을 하고 다닌 일까지 있었음니다마는 역시 그들의 성화로 결국 그것을 그만두게 된일도 잇슴니다.' (동아일보, 1925년 12월 12일)


그녀는 순회 간호부와 자동차 운전수를 하며 모은 돈으로 비행 훈련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 번 탈 때마다 돈이 들었는데, 1시간에 15원이었다고 한다. 기름이 귀할 때였다. 면허증을 따려면 2천원이 든다고 했다. 당시 대학 초임이 40원일 때이고 500원이면 웬만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때였다. 
조종과에 정식으로 입학한 것은 1926년 2월 1일이었다. 이은 왕세자는 구한국 정부 학부대신을 지낸 이용직(李容稙, 1852-1932)을 통해 거금을 기부했다.

 

조선인 젊은이들이 닦은 터
박경원은 1926년 2월 이른 봄, 일본비행학교인 다치가와 분교에서 비행기 조종 연습을 위해 시모 다치가와 정(下立川町)으로 이사왔다. 이곳 주변은 뽕나무 밭이 많았고 붉은 바람이 유난히도 심하게 부는 곳이었다.
다치가와 역에서 북쪽으로 5분, 비행학교에서 남쪽으로 10분 거리였다. 스즈키(鈴木) 집이었다. 집은 단층 목조로 방 두 칸에 부엌, 현관, 목욕탕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1927년 3등 비행사가 돼
1927년 초까지 그녀는 194회 째 비행 기록을 세웠고 25시간 44분, 이상을 탔다. 1회 비행은 보통 3분에서 5분이므로 25시간은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1927년 1월 25일 그녀는 3등비행사 시험에 합격했다.
일본에 온지 3년 만이었다. 28일 면허증을 받았다. 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월 29일 가마다 본교에서 졸업식이 열렸다.(동경 朝日新聞, 1927년 1월 30일자)
그녀는 이어 2등 비행사에 도전했다. 일본 최초의 2등 여류 비행사도 탄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8년 7월 12일 관동비행구락부 주최로 도쿄 시부야 구(澁谷區)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제 4회 비행경기대회가 열렸다. 이때 일본비행학교에서는 박경원을 포함 네 사람이 참가했다. 그중 여류 비행사는 박경원과 같은 한국 여인 이정희(李貞喜, 1910-?), 그리고 일본 여자 1명이었다.
박경원은 고도상승 경기에서 3등으로 입상했다. 30분간 요요기 연병장 상공을 나는 것이었다. 2회, 3회 때는 입상하지 못했으나 이 때는 입상한 것이었다. 삼궁교(參宮橋)에서 시상식이 행해졌다.
박경원은 같은 해 7월 30일 2등 비행사가 됐다. 면허증 번호는 81번이었다. 여성으로는 일본인 두 명에 이어 세 번째였고 우리 나라 여자로는 모두 처음이었다. 물론 한국 최초는 안창남이었다.

그녀가 2등 비행사가 됐을 때 일본인 교장과 교관들은 “박 양은 일본 비행학교의 꽃으로서, 머리가 좋은 미인이다"고 칭찬하고 있었다.
이정희도 2등 비행사 면허를 받았다. 이정희는 박경원보다 1년 늦게 비행학교에 들어 왔다. 1927년 2월 13살 어린 나이였다. 서울의 숙명 여학교를 나온 그녀는 박경원보다 출신이 좋았다. 그녀는 무용가 최승희(崔承喜, 1911-?)와 동기동창이었다. 박경원이 동승해서 직접 조종 지도를 해주었다.

그녀는 박경원의 뒤를 이어 1927년 11월에 3등, 1929년 7월에 2등 비행사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최승희의 영향으로 무용가의 길로 진로를 바꾸고 박경원을 떠나갔다. 그녀는 1930년대 초 서울 누상동에 살다가 1933년 8월 14일 음독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그들보다 조금 뒤에 또 한사람의 여류 비행사가 탄생한다. 그녀는 김복남(金福男)이다. 1939년 3월 2등 비행사가 되었다.
남자 비행사로는 당시 오사카의 일본항공수송연구소에 근무하는 장덕창(張德昌)이란 1등 비행사가 있었다. 박경원과는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또한 강세기(姜世基)란 이름도 보인다. 그는 충청남도 출신으로 이정희와 입학 동기였다. 그는 어렵게 공부하여 3등 비행사 자격증을 땄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1929년 4월 18일 도코로자와 비행장에서 비행 연습을 하다가 추락사했다. 기체는 1미터 흙 속에 처박혀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시신도 마찬가지였다. 23세의 꿈 많은 젊은이였다. 이정희, 강세기 모두 꿈을 접고 있었다. 

 

1929년 9월 10일 일본 한국 여객
다치가와 일대도 변모하고 있었다. 1929년 4월 이곳에 도쿄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민간 정기편을 운영하는 일본항공수송회사가 이 일을 맡았다. 일본과 조선 그리고 만주를 연결하는 비행장이었다.
8인승 네덜란드제 비행기와 6인승 미국제 비행기가 투입되었다. 9월 10일부터 후쿠오카-울산-경성-평양을 지나 만주 대련에 이어지는 여객 수송이 시작되었다.

시간표를 보면 아침 8시 다치가와 출항, 오사카 10시 30분 도착, 후쿠오카 밤 12시 57분 도착, 새벽 2시 50분 후쿠오카 출항, 울산에는 4시 46분 도착했다. 후쿠오카 울산은 240km구간이었다. 아침 7시 울산 출항, 서울 여의도의 일본 육군 이착륙장에는 9시 32분 도착이다. 다치가와에서 서울까지는 비행거리 1,500km였다. 물론 운임이 비싸 처음 승객은 호기심 많은 사람, 돈 많은 사람, 고관대작 등이었다.

 

고국 비행 꿈꿔
당시 일본 비행사들은 면허를 따면 자신의 고향까지 비행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굳어져 왔다. 그들에게는 금의환향이었다. 선전 도구로도 이용되었다. 안창남의 경우도 그런 것이고, 박경원도 고향 방문을 계획하고 있었다.
1930년 현재 일본에서 2, 3등 비행사는 12명이었는데 그중 직접 비행을 하는 여류 비행사는 박경원 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시아의 여류 비행사를 꿈꾸고 있었다.

1931년 4월 3일 그녀는 도쿄 제국호텔에서 고이스미 체신대신과 처음 만난다. 그 대신이 몇몇 여류 비행사를 점심에 초대했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그녀는 고국 방문 비행기를 불하 받기를 원했다.
1931년 8월 29일에는 하네다(羽田) 공항이 개장했다. 1929년부터 하네다 앞 바다를 메워 만든 공항이었다. 다치가와의 동경국제비행장 시대는 이제 끝났다. 1967년 나리다(成田) 공항에 국제공항 지위를 물려줄 때까지만 해도 하네다는 일본의 현관이었다. 지금은 국내선 위주로 운항되고 있다.
그녀는 도코로자와 육군비행학교로부터 비행기 ‘살무손'을 불하 받았다. 무척 다행스런 일이었다. 체신대신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오해도 생겨났다. 함께 고려신사를 간다든가 개인적인 만남이 신문 가십란에 오르내렸다. 

그녀는 비행기 이름을 ‘파란 제비 호'라 붙였다. 이제 이 비행기는 그녀의 소유였다.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1931년 10월 23일)은 이를 보도하고 있다. 
“드디어 11월 20일경 정비가 완료될 전망이다. 이 조선 비행의 출발에 직접 관계가 있는 다치가와 시 및 민간 비행관계자들은 대대적으로 전송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 연락비행'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비행을 해야 했다. 제국비행협회에서 지어낸 명칭으로, 군국의 냄새가 물씬 나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녀의 고국 비행은 비행사에 뜻을 둔지 13년, 일본비행학교에 들어가서 9년, 2등 비행사가 되는데 5년이 걸린 후였다.

이즈음 그녀의 후배로 윤창현(尹昌鉉)과 윤공흠(尹公欽)이 입학한다. 
윤창현은 1931년 7월 일본비행학교에 입학, 11월 2등 비행사가 되고 1932년 5월 15일 다치가와 시를 날아 서울로 갔다. 윤공흠은 윤창현보다 한달 뒤 입학하여 1932년 6월 초순 2등 면허를 땄다. 그는 조선으로 비행 중 히로시마에 불시착했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은 미뤄지고 있었다. 

 

마지막 비행
1933년 8월 7일 오전 10시 35분 ‘파란 제비호'는 하네다 국제 비행장을 이륙했다. 그런데 이날 날씨는 아주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은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으나 일정 상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기수는 도쿄를 벗어나 가와사키 공장지대 상공을 지났다. 멀리 잿빛 구름이 낮게 깔리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도카이도선(東海道線)의 선로를 건너 에노시마(江ノ島)를 지났다. 이제 별장, 해수욕장이 즐비한 오다하라(小田原) 상공을 지나고 있다. 고도 400-500이었다. 이어 아타미를 지나 하코네 산을 넘는다. 비행 40분이 경과하고 있었다. 빽빽한 구름과 난기류가 그녀의 비행기를 둘러쌓다. 
그녀의 비행기는 11시 17분 하코네의 남쪽에서 폭음을 울린 후 사라져 버렸다. 하코네 항공 무선소에 폭음이 들려 왔다. 얼마 후 시스오카 현 전방군(田方郡) 다하촌(多賀村) 상다하(上多賀) 현악치(玄岳峙)에 기수를 거꾸로 밖은 채 그녀의 비행기가 발견되었다. 시계는 11시 25분 30초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가슴을 강타 당한 채 조종석 핸들을 잡고 죽어 있었다.  모든 꿈은 사라졌다. 33세의 생애는 마감됐다.
서울에서 그를 기다리던 많은 군중들은 그 충격적인 뉴스에 어쩔 줄 몰라했다. 4일 후인 8월 11일 제국비행협회 강당에서 장례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일본 육군대신, 체신대신, 척무대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동군 참모장 등이 조화를 보내왔다. 그녀의 유골은 14일 오전 10시 47분 대구 역에 도착해 불교 포교원에 안치되었다.
조난 당한 그 자리에는 ‘1933년 박경원양 조난위비'라고 새긴 돌기둥이 세워졌다. 1983년 8월 7일 아타미의 의왕사(扇王寺)에서 ‘박경원 추락사 50년제’가 열렸다.
이제 우주로!를 외치는 시대, 우리 최초의 여류비행사, 그녀의 잊혀진 기록을 다시 살펴보았다.

출처_}김정현의 역사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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