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People

조선 최초 여류비행사

Jimie 2020. 4. 17. 12:32

   

최초의 조선 여류비행사?

그 회상 


가나가와 하코네 3 - 등산열차

모모타로 추천 2 조회 239 19.11.28 11:33    






또 한명의 여성이자 최초의 조선 여류비행사 권기옥 은 박경원과 같은 1901년생으로

평양 근교 삼수구리에서 태어났는데... 집에서 '권갈례' 로 불리게 되었으니

 '일찍 생을 마감한다'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의 탄생은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11살때 부터 은단 공장 에 취직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던 그녀는

12살이 되던 해 교회에서 운영하는 숭현 소학교에  입학을 하고

졸업한 뒤에는 기독교 계통 숭의여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 합니다.




권기옥 은 교사 박현숙의 영향으로 반일 비밀결사 단체인 송죽회 에 가담해

3.1운동이 일어나자 태극기를 만들고 애국가 가사를 등사해

김선주 목사의 독립 선언문 낭독하에 대한독립만세를 선창 하고 거리에서 만세 운동 을 펼칩니다.



그녀는 일본 경찰에게 주목 을 받게되고 유치장에 구금되기를 반복하던 중...

1917년 5월 여의도 비행장에서 열렸던 미국인 '아트 스미스' 곡예비행을 통해

비행사의 꿈 을 갖게 되었다니 박경원 보다는 5년이 빠른 셈입니다!



1920년 임시정부와 연계해 군자금 을 모집하던중 평양 청년회 와 연결된 것이 드러나

체포 되었다가 출소후 '브라스밴드단' 을 결성해 평안도와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며

민중 계몽운동, 독립운동의 연락책 으로 활동합니다.



그러던 중에 평남도경 폭파 를 위해 폭탄을 현장에 운반 하는 일을 돕게 되는데,

도중에 일본 경찰에게 들통이 나자 

 '조만식' 도움으로 중국 멸치배 를 얻어 타고는 상하이로 망명 했다고 합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손정도' 목사의 집에 머물며 비행사 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는 중국 항공학교 에 도전하나 '여자' 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 당하자....

그녀의 열정과 애국심, 그리고 오기 는 더욱더 불타오르게 됩니다.



 


1923년 12월 그녀는 유력 인사의 추천서를 통해 운남 육군 항공학교 입학에 성공하는데

 입학을 허가했던 '탕지야오' 조선 독립운동에 호의적 이었던 총사령관으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이국만리를 찾아온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고 입학을 승인한 것입니다.




운남 육군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해 한국인 최초의 여성 비행사 가 되고

 북경의 군벌 풍옥상군의 항공대 에 들어가서는 동로군 항공대의 부비항원으로 임명된후 

독립운동가 '유동렬' 장군을 만났으며 또 이상화 의 형인 '이상정' 을 만나 결혼합니다.




중국 공군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대령 에 까지 올랐던 그녀는 1931년 일본의 기습점령으로

상하이 전투 가 발발하자 일본군을 기총소사 를 하면서 항일운동 에 기여했으며....




1937년 중일 전쟁 발발후에는 충칭 으로 이동해 육군참모학교 교관 으로 근무하면서 

영어, 일본어 그리고 일본의 주요 인물 식별법과 성격 등을 연구해 강의합니다.




중국 공군에서 활약했던 그녀는 광복후 1949년에 귀국해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 으로

대한민국 공군 창단 에 중요한 힘이 되었고 전재산장학사업에 기탁 하는 등

마지막 생까지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박경원과 권기옥 두 사람의 조선 여류 비행사를 생각하는 사이 등산열차는

하코네 유모토에키 箱根湯本駅(상근탕본역) 를 출발한지 50분만에 

 해발 540미터 고라 强羅 (강라)역에 도착하는지라

케이블카 를 타기전에 먼저 고라코엔 强羅公園 공원 부터 보기로 합니다.




 역을 나와서 길을 걷는데 높은 산으로 날씨가 쌀쌀하지만 거리에 기념품 가게와 커피숍에

카페와 레스토랑을 지나니 "대나무가 우거진 한가한 시골길" 로 바뀌고 걸을만 합니다.




 이윽고 도착한 고라코엔 强羅公園 공원은 일본 최초의 프랑스식 암석정원 인데

열대 허브관 부겐빌라관 이 있으며 장미덩굴 아치 가 멋있었다고 합니다.




 특히나 여름에는 야간 개장 을 해서 불을 밝힌다는데 입장료는 500엔으로

도쿄 신주쿠나 오다와라에서 출발할 경우 하코네 프리패스 를 사면 무료 라고 합니다.





[출처]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는 누구인가

 

일제시대 하늘을 날았던 우리나라의 여성은 세 명이었다. 식민지시대 암울했던 민중들에게는 영웅과 구경거리가 필요했다. 당시 유행가 중에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가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고 싶었던 여성들이 있었다. 박경원, 권기옥, 이정희. 그들은 모두 마음속에 날개의 꿈을 품었던 진취적인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들의 미래를 철저하게 갈라놓았다. 나이는 박경원이 제일 많았고 권기옥, 이정희가 뒤를 잇는다.


             

 권기옥은 3ㆍ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1924년 초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생으로 들어간다. 1925년 2월 28일 항공학교를 졸업하자,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쏟아붓겠다는 일념으로 상해로 돌아온다. 그러나 임시정부에는 비행기를 살 돈이 없었다. 고민 끝에 원로 독립운동가의 추천으로 중국 군대의 항공대에 들어가서 비행기 조종사로 10년 넘게 활동한다.


한편 박경원이 일본비행학교를 졸업하고 3등 비행사 자격증을 딴 것은 1927년 1월 28일이었다. 따라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난 것으로 치면 권기옥이 박경원보다 2년 정도 앞선 것이 된다


  ▲ 1926년 4월 20일 항공처 부비행사 임명장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1921년부터 시행한 민간인 비행사 자격시험에서 주는 자격증을 말한다. 즉 '비행사'라는 명칭은 일본으로 유학 가서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시행하는 시험제도를 통과한 사람만이 갖게 되는 것이다

      ▲ '중국창공에 조선의 붕익, 중에도 여류비행가'(1926.5.21,동아일보)

      ⓒ2005 정혜주

 

당시의 신문자료를 살펴보면 그 시절 사람들은 권기옥과 박경원을 똑같이 '여류비행사'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1926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는 '中國 蒼空에 朝鮮의 鵬翼- 中에도 女流飛行家'라는 제목으로 권기옥을 소개하고 있다. 1928년 5월 25일자 <중외일보도> 권기옥을 '女飛行士'로 호칭하고 있다.

박경원을 소개한 <동아일보> 1926년 9월 4일자 기사 역시 '朝鮮의 女流飛行士 박경원 양'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민간인 비행사와 전투기 조종사를 구분하는 것은 비행기가 무기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 훨씬 후대에 와서이다.

     ▲ '풍군진중에서 활동하는 여비행사 권기옥'(1928.5.25, 중외일보).

     ⓒ2005 정혜주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충북 청원 소재)의 자료실에는 "권기옥은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 졸업(1925년)으로  한국인 최초의 여류 비행사이며 중일 전쟁 참가, 총 7000시간을 비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초창기 여자 비행사로 권기옥-이정희-김경오를 기록하고 있다.

1901년 6월 24일에 태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朴敬元)이 조종사로서 일본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27년 1월, 3등 조종사 시험에 합격하면서였다. 당시 도쿄 아사히 신문은 ‘조선출신 여성비행사 1호 탄생’이란 기사를 실어 그의 존재를 알렸다.



1933년 8월 7오전 10시 35분, 박경원은  장장 2000km의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을 위해 청연호(靑燕號)를 몰고 고국 하늘을 향하여 하네다 공항을 이륙하였다. 그러나 50분 만에 그의 애기(愛機)는 하코네 중턱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청연호의 동체는 두동강났고  33살의 한국 여류비행사의 꿈은  핸들을 잡은 채  사라져 갔다.




▲ '동양 첫 여류 비행사 권기옥 여사'(1978.2 한국일보 연재기사)

ⓒ2005 정혜주

 

권기옥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는 것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 대한민국이 공인하고 대중적으로 인정되어온 사실이다. 최근 영화 <청연> 제작사 측은 박경원과 관련 '최초' 시비가 일자 '최초의 민간인 여류 비행사'라고 홍보 문구를 바꾸었다.

'최초'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내용이다

 '최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다.

사실 '누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흔히 안창남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라고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1919년 가을 중국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하고 풍옥상군의 항공대 대장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서왈보를 최초의 비행사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대한민국 공군박물관은 1920년 임시정부의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이 미주교포들의 후원을 받아 캘리포니아에 세운 윌로스비행학교의 졸업생 6명이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라는 자료를 기록 전시하고 있다.

안창남과 서왈보, 윌로스비행학교의 졸업생들 중 과연 누가 우리 민족 최초의 비행사인가? 이견은 있겠지만 이 문제는 그리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비행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한민족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우리의 하늘을 최초로 날았던 비행사 안창남'… 윌로스비행학교를 졸업한 6명의 1기 졸업생들도 모두 우리 민족에게는 자랑스런 하늘의 용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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