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尙北道 星州
伽倻山 정상
성주 七佛峰(1433m) & 합천 象王峰(우측1430m)
가야산 정상- 칠불봉(1,433m)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 산 162번지
가야산 정상- 칠불봉(1,433m)에서 바라 본 별고을 파노라마 ,성주분지
칠불봉에서 바라 본 파노라마- 성주
서쪽부터, 북쪽, 동쪽까지의 파노라마 입니다
성주군(星州郡)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서남부에 있는 군.
동경 128°02′∼128°24′, 북위 35°46′∼36°03′에 위치한다.
동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대구광역시와 칠곡군, , 남쪽은 고령군, 서쪽은 김천시와 경상남도 합천군, 북쪽은 김천시와 접하고 있다. 면적은 616.14㎢이고, 인구는 4만 502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9개 면, 233개 행정리(111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 있다.
가야산 일대는 가야산국립공원에 속해 있고 특히 만물상의 자연경관이 빼어나다.
특산물로 성주참외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가야산 만물봉 능선
경북 성주군 수륜면
자연환경
군의 남서부, 군계(경남북 도계)에 자리한 가야산(1,433m)을 비롯하여 형제봉(兄弟峰:1,022m)·독용산(禿用山:956m)·염속산(厭俗山:870m)·백마산(白馬山:716m)·영암산(782m)· 등이 군의 서·북부를 둘러싸고 있고 동부와 남부에는 선석산(禪石山, 일명 서진산棲鎭山742.4m)·도고산(道高山, 349m)·영취산(靈鷲山, 332m)·성산(星山, 389.2m)·칠봉산(七峰山517m) · 작산(鵲山, 532m)·등 비교적 낮은 산들이 분포하고 있다.
그밖에도 300~400m의 산들이 동부와 남부의 경계를 짓고 있어, 전체적인 형세는 높고 낮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남동부로 내려오면서 비교적 저평한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 중 월항면 인촌리와 칠곡군 약목면의 경계에 위치하는 선석산(禪石山, 일명棲鎭山)은 대부분 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토지리정보원 고시 제2000-302호의 자연지명으로 고시된 선석산은 그동안 근처 금오산에 사는 범이 포수들을 피해 이 산에서 하룻밤을 세우고 피난했다 해서 서진산(棲鎭山)으로도 불려왔다.
선석산 서남쪽 산기슭에는 고려 때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창건한 선석사(禪石寺)가 있고, 그 앞의 태봉(胎峯)은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세종의 여러 왕자들과 단종의 태를 안장한 태실이 있다. 주변의 골짜기와 개울들이 절경을 이루어 봄·가을에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하천을 보면 서북부의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대가천(大伽川)은 군의 서부를 동남류하여 고령군을 지나 낙동강에 유입한다. 강유역에는 비옥한 평야가 발달하여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이천(伊川)은 벽진면·성주읍 및 선남면 사이를 흐르는 하천으로, 벽진면의 고당산과 염표봉산에서 발원하여 남동류하고, 벽진면과 성주읍 남쪽을 지나 월항면 대산리에 이른다. 초전면백마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에서 남류한 지류 백천(白川)과 합류하고 다시 남동류하여 선원리 부근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연안에는 봉산들·섬안들의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어서 중요한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북서부는 평안계에 속하고, 중앙은 경상계에 속하며 화성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천연안의 평야는 신생대 제4기에 속하여 하성층(河成層)과 현무암층(玄武岩層)으로 되어 있고 충적토질(沖積土質)을 이루어 매우 비옥하다.
기후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는 온대 계절풍 기후 지역이나 분지형 지형과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연평균기온이 14.1° 정도로 다른 지역보다 낮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내륙분지인 까닭이다. 1월 평균기온 -0.9℃ 내외, 8월 평균기온 29.1℃ 내외로 한서의 차가 큰 편에 속하며, 연강수량은 850∼1,300㎜정도이나 6∼9월에 집중되는 편이다.
경북 김천시와 경남 거제시를 잇는 ‘남부내륙철도’ 노선 및 역사 위치도
伽倻山
*지도상 누진산은 선석산(일명 서진산)의 오기임.
역사
성주 지방에서는 아직까지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고인돌·청동검 등이 발견되어 대략 이 무렵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삼한시대에는 사회분화가 진행되어 소국(小國)으로 발전했는데, 반파국(伴跛國)이 이 곳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그것이 성산가야(星山加耶)의 모체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가야연맹의 한 나라로 발전하였던 성산가야는 늦어도 6세기 중엽까지는 신라에 복속되어 군현체제하에서 본피현(本彼縣)이 되었다.
성주는 6가야 중 벽진가야(碧珍加耶)로 가야연맹의 중심국 중의 하나였다. 신라가 가야 지역에 진출함에 따라 신라의 세력권에 들게 되어 벽진군(碧珍郡) 또는 본피현(本彼縣)이 설치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 성산군(星山郡:지금의 고령군 성산면 일대의 加利縣)의 영현이 되었다.
현재까지 성주읍 성산리, 월항면 수죽리 등지에 남아 있는 고분군은 성산가야시대와 신라에 편입된 직후의 유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757년(경덕왕 16) 본피현은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되어 성산군(星山郡)의 속현이 되었으며, 뒤에 벽진군(碧珍郡)으로 개칭되었다.
나말 여초의 전환기에 전국적으로 호족들이 할거하여 세력을 떨칠 때 성주지역에는 이총언(李悤言)이라는 대호족이 출현하여 인근의 중소 호족을 거느리고 군림했다. 태조 왕건의 회유정책으로 귀부하여 그의 아들 영(永)이 군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940년(태조 23) 성주는 경산부(京山府)로 승격되었고, 신안현·적산현(狄山縣)·수동현(壽同縣)·유산현이 통폐합되어 귀속되었다. 980년(경종 6)에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되었다가 995년(성종 14) 대주(岱州)로 개칭되면서 도단련사(都團練使)가 파견되었다.
1012년(현종 3)에 다시 단련사가 폐지되었고,
1018년(현종 9)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가 파견되어 고령군(高靈郡)을 속군으로 ·약목현(若木縣)·인동현(仁同縣)·지례현(知禮縣)·가리현(加利縣)·팔거현(八莒縣)·김산현(金山縣)·황간현(黃澗縣)·관성현(管城縣)·안읍현(安邑縣)·양산현(陽山縣)·이산현(利山縣)·대구현(大丘縣)·화원현(花園縣)·하빈현(河濱縣)· 등 1군 14현이 귀속되어 그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1295년(충렬왕 21)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가 되었다가 1308년에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되었으며, 1310년(충선왕 2)에 다시 경산부로 강등되었다. 고려 말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 때 성주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나, 우하(禹夏)의 활약에 의하여 왜구를 격파한 바 있다.
건국 이후에도 경산부로 지속되었으며, 태조 때 일시 계수관(界首官)이 되었고, 1413년(태종 13) 성주목으로 승격되면서 가리현·팔거현·화원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이 때 성주는 경상도에서는 가장 넓은 간전결수(墾田結數)를 보유하였고, 많은 제언(堤堰)이 축조되어 있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으며, 인재도 많이 배출한 영남의 거읍 중 하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일시 경상도 감영이 성주목팔거(현재 칠곡)에 두어지기도 하였다. 성리학이 널리 보급되면서 성주에서 정구(鄭逑)·김우옹(金宇顒) 등과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었고, 1558년(명종 13) 천곡서원(川谷書院)이 세워지는 등 영남학파의 한 중요한 근거지 구실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성주를 점령하자, 의병장 김면·정인홍 등이 세 차례의 격전 끝에 성주성을 탈환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하였다. 1614년(광해군 7) 이 곳 주민 이창록(李昌祿)이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비방한 사건이 발생하여 목(牧)이 혁파되고 고령현에 합속되었다가 1616년 신안현으로 개명되었다. 인조반정 뒤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614~23년에 신안현으로, 1631~40년에 성산현으로, 1736~45년에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1745년(영조 21) 다시 목으로 환원되었다. 그 동안 팔거현은 칠곡도호부에, 화원현은 대구부(大丘府)에 각각 이속됨으로써 가리현만 거느리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도 성주에서는 많은 서원과 사우가 설립되고 이진상(李震相) 등 영남학파를 계승한 성리학자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1895년 근대적인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성주군으로 되어 대구부에 속하였다가 1896년에 경상북도 성주군이 되었다. 1905년에는 인곡(仁谷)·덕곡(德谷)·노다(老多)·다산(茶山) 등 4개 면이 고령군으로, 노곡면(蘆谷面)이 현풍군(玄風郡)으로, 증산면(甑山面)이 지례군에 각각 편입되었기 때문에 관할구역이 자연히 축소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용산면·남산면·북산면·본아면이 성주면으로, 선남면·화곡면·산남면·오도면이 선남면으로, 대동면·두릉면이 용두면으로, 조곡면·초곡면이 성암면으로, 지사면·법산면이 지사면으로, 대리면·청파면이 청파면으로, 운곡면·명암면이 벽진면으로, 유곡면·초전면이 초전면으로, 유동면·당소면·망성면이 월항면으로 통합되고, 신곡면은 김천군에 넘겨주었다.
개화의 물결이 이 곳에도 미쳐 1906년 사립학교가 세워졌고, 일제의 국권 강탈 이후에는 이의 회복을 위한 민족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선남면·가천면·성주면·성주읍내장 등지에서 맹렬한 만세시위 운동이 일어났고, 다수의 인물이 일본경찰에 체포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경상도 유림이 중심이 되고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연서한 파리장서(Paris 長書)는 파리평화회의에 보내진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였는데, 이 고장 출신 김창숙(金昌淑)이 중국 망명시 휴대하여 평화회의에 우송했다. 세계 각국 및 전국 향교에 이 문서를 보내는 데에도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1934년에 용두면·성암면을 용암면으로, 지사면·청파면을 수륜면으로 통합·개칭.
1945년 8·15광복 후 안정되지 못한 사회 정세하에서 좌익의 주동으로 대구에서 시작된 10·1폭동사건은, 이 지방에도 파급되어 경찰서가 습격되는 등의 혼란이 있었지만 곧 질서가 회복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낙동강전선이 형성되었을 때 주전선(主戰線)의 배후지였기 때문에 공산군에 의해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973년 대가면 중산동이 가천면에 편입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 성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고령군 덕곡면 성동이 수륜면에, 용암면 유서동이 선남면에 편입되었고, 선남면 노석동이 칠곡군 약목면으로 편입되는 행정구역 조정을 거쳤다.
1988년 5월 9일 동이 리(里)로 개칭되었으며, 1989년에는 용암면 명포리·장학리가 선남면에, 월항면 어산리가 초전면에 편입되었고, 1990년벽진면 해평리가 수촌리로 개칭되었다.
별고을 성주는 오늘에 이른다.
선석산(禪石山742m, 일명捿鎭山)에는 사적 제444호로 지정된 星州世宗大王子胎室을 비롯하여 천년고찰 禪石寺와 자연 전망대 역할을 하는 용바위, 胎峰 등의 바위가 있다.
태봉에서 내려다보면 성주의 특산물인 참외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단지가 호수처럼 펼쳐진다.
태봉 근처에는 조선시대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19기가 있는 세종대왕자태실이 있다.
선석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 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이다.
성주군 선석산(禪石山742m, 일명捿鎭山) 중턱에 위치한 선석사(禪石寺)는 성주군에서는 가장 큰 사찰이다.
또 건너 봉우리엔 세종대왕 왕자 태실이 있어 예로부터 선석사는 태실 수호 도량으로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기도하고 왕조의 권력 투쟁으로 인한 태실의 변화를 지켜보아야 했다.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는 조선시대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
2003년 3월 6일 사적 제 444호로 지정되었다.
세종대왕의 아들 8대군과 10군의 태실 18기와 세손(단종)의 태실 1기로
전열에 11기, 후열에 8기가 서 있다.
원래는 1438년 (세종20년)에서 1442년까지 수양대군을 비롯하여 세종의 적서 18왕자와 단종등 20여기의 태실이 있었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반대하여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금성대군과 한남군,영풍군,화의군 및 안평대군의 태와 장태비는 1457년(세조3년) 태봉아래로 파내어 쓰러뜨려졌다.
이 5기의 기단석은 1975년 보수,정화하면서 찾아 원자리에 앉혔다.
세조가 등극한 뒤 세조의 태비앞에 홍윤성이 글을 지어 비석으로 세웠으나 지금은 심하게 마모되어 판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원래는 1438년 (세종20년)에서 1442년까지 수양대군을 비롯하여 세종의 적서 18왕자와 단종등 20여기의 태실이 있었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반대하여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금성대군과 한남군,영풍군,화의군 및 안평대군의 태와 장태비는 1457년(세조3년) 파내어 산 아래로 던져 졌으나 1975년 흩어진 묘단석을 찾아 복원했다.
세조 등극후 예조판서 홍윤성이 세조의 태가 이곳에 있음을 알리는 비를 세웠는데 세조를 미워한 백성들이 비석에 오물을 퍼붓고 돌을 갈아서 글자를 알수 없게 되었다고 ....
*장태비(藏胎碑)
안태(安胎), 장태(藏胎) 의식은 태를 깨끗히 씻어(洗胎) 태항아리에 넣고 매장하는데,
태실 앞에는 누구의 태인지를 알리는 돌비...
원손(元孫) 단종 태실과 장태비
* 원손 [元孫] 은 왕세자의 맏아들인 바, 세종의 왕세자(문종)의 맏아들(단종)
화강암으로 깍은 19기의 태실은 조선태실 의궤형식으로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백자로 된 태호를 넣었다.
태호속에는 태항과 태주의 이름및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을 넣고
지상에는 기단,간석,옥개의 형식을 갖춘 석조물을 안치하는 한편 각 왕자의 태실을 가리키는 표석을 세웠다.
영암산에서 본 선석산 (禪石山742m, 성주 월항) 정상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과 칠곡군 약목면·북삼읍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일명 서진산(棲鎭山)으로 불린다.
영암산(鈴岩山, 784m), 비룡산(飛龍山, 546m), 도고산( 348m)과 능선으로 이어져 영암지맥을 이룬다.
북봉에서 본 영암산(鈴岩山,784m 성주 초전) 정상(우측)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용봉리와 칠곡군 북삼읍 보손리와 김천시 남면 월명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 정상 주변에 방울을 닮은 바위가 있어 영암(鈴岩) 또는 방울암이라 불렸다.
영암산(鈴岩山)은 백두대간의 삼도봉에서 수도산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북쪽으로 분기한 산맥에 있다.
북쪽의 경호천 골짜기로 칠곡군 북삼읍과 김천시 남면을 잇는 국도 4호선이 지나며, 서쪽의 백천 벌판으로는 성주군 초전면과 국도 4호선을 잇는 지방도 905호선이 지나고 중부내륙 고속도로가 남북을 관통한다..
영암산에서 본 경상북도 구미시 금오산( 金烏山 ,977m)
금오지맥의 백마산(白馬山 716m)에서 보는 영암산( 鈴岩山784m )
좌 금오산, 중앙 영암산, 우 선석산
제가 태어나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객향 천리,이국 만리 비상할 수 있는 나래를 달아준 내 정든 고향 산하...
내 고향 별고을, 성주를 찾아주시어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별고을 추억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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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지나가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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