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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 답답했으면” 정경심 판결에 등장한 대법원의 ‘빨간글씨’

Jimie 2022. 2. 4. 16:40

“오죽 답답했으면” 정경심 판결에 등장한 대법원의 ‘빨간글씨’

[법없이도 사는법]

자녀 입시비리 등 혐의로 1·2심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의 대법원 상고심 선고가 열린 작년 12월 2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방청객들이 법정을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연합뉴스

 

설 명절을 앞둔 지난달 27일, 대법원은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에게 징역 4년형을 확정하며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많이 알려진 대로 대법원에서의 핵심 쟁점은 동양대 강사휴게실 PC의 증거능력이었습니다. 정씨 측은 “PC압수수색 과정에서 정 교수가 참여하지 않아 포렌식에서 나온 자료들을 증거로 쓸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작년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임의제출 압수물의 경우에도 피의자의 참여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증거로 쓸 수 없다’는 판결을 내놓으면서 이 주장이 힘을 받는 듯 했습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주심과 정씨 사건의 주심이 같은 사람(천대엽 대법관)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정 전 교수와 남편 조국 전 법무장관이 함께 기소된 아들 입시비리 사건의 1심을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법이 이 판결을 기초로 동양대 PC 등에 대해 ‘증거 배제’ 결정을 해버리면서 정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한 1·2심이 뒤집히는 게 아니냐는 예상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7쪽의 보도자료 상당부분에 ‘빨간글씨’와 ‘파란글씨’ ‘밑줄’을 통해 정씨 사건은 참여권 보장이 문제되는 경우가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빨간글씨’와 ‘밑줄’ ‘굵은글씨’가 동시에 표시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임의제출자 아닌 피의자에게도 참여권이 보장돼야 하는 ‘피의자의 소유·관리에 속하는 정보저장매체’라 함은, 피의자가 압수·수색 당시 또는 이와 시간적으로 근접한 시기까지 해당 정보저장매체를 현실적으로 지배 관리하면서 전속적인 관리처분권을 보유·행사하는 경우로서 피의자를 그 정보저장매체에 저장된 전자정보에 대해서 실질적인 압수·수색 당사자로 평가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임”

“이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압수·수색 당시 외형적·객관적으로 인식 가능한 사실상의 상태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함”

“단지 피의자나 제3자가 과거 정보저장매체의 이용 내지 개별 전자정보 생성·이용 등에 관여한 사실이 있다거나 정보주체에 해당한다는 사정만으로 실질적인 압수·수색을 받는 당사자로 취급해야 하는 것은 아님”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며 대법원이 낸 보도자료. 동양대 PC 증거능력에 관한 부분을 빨간색 굵은 글씨와 밑줄로 강조했다./대법원 제공

 

즉, 피의자가 압수수색 전까지 PC를 관리·사용한 경우라면 다른 사람이 PC를 임의제출했어도 피의자가 포렌식에 참여해야 하지만, 동양대 PC는 2019년 9월 압수수색 당시3년 가까이 강사휴게실에 방치된 상태였기 때문에 정 전 교수의 참여권이 문제되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사소송법 218조는 “검사, 사법경찰관은 피의자 등이 유류한 물건이나 소유자·소지자 또는 보관자가 임의로 제출한 물건은 영장 없이 압수할 수 있다”고 돼 있습니다. 당시 검찰은 PC의 실질적인 소유·관리권을 행사하던 동양대로부터 조교를 통해 PC를 임의제출받았고, 조교는 포렌식 참여를 포기했기 때문에 정 교수의 참여권 흠결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논지입니다.

대법원은 또한 “전원합의체 판결의 법리에 따르더라도 피의자에게 참여권을 보장해야 하는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전원합의체 판결은 불법 촬영을 당한 피해자가 피의자로부터 휴대폰 두 대를 빼앗아 갖고 있다가 검찰에 제출했고, 검찰이 포렌식을 통해 여죄를 기소한 경우였습니다. 이처럼 기기의 소유자 및 사용자가 분명했던 사안과, PC가 3년간 공용 공간에 방치되다시피 한 정씨 사건을 같이 볼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법조기자를 하면서 대법원 판례 보도자료를 여러 번 접했지만, 이번처럼 다양한 형태로 ‘강조’가 들어간 경우는 이례적입니다. 빨간 글씨에 볼드체, 밑줄까지 동원한 이번 자료를 본 법조인은 “대법원이 오죽 답답했으면”이라고 합니다.

만일 정씨 측 주장대로 ‘피의자 참여권’을 확대적용하면 방치된 PC에서 나온 자료는 ‘정보 주체’가 포렌식에 참여하지 않으면 모두 증거로 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과 중형에 이르게 한 ‘태블릿 PC’ 도 역시 임의제출물인데, ‘정보주체’ 인 최서원씨(개명 전 최순실씨)의 포렌식 참여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유죄가 확정됐습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직전까지 피의자가 사용하던 휴대폰’사례를 ‘수년째 방치된 PC’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1심 법원까지 대법 판결을 적용해 ‘증거 배제’결정을 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대법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확산하고, 하급심마저 그런 해석에 휘둘리자 대법원이 ‘빨간 글씨’ 로 ‘선’을 그어줬다는 것입니다.

검찰은 조 전 장관 1심 재판부의 동양대 PC, 조 전 장관 자택 PC 등에 대한 증거배제 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한 상태입니다. 대법원의 ‘빨간글씨’ 교정을 받아 든 1심 재판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됩니다.

[양은경 기자]
조선일보 &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