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People

빨간 마후라 김영환 장군

Jimie 2021. 11. 12. 16:24

원래 이름이 김영렬(金英烈)이나 나중에 김영환(金英煥)으로 개명했다

 

1921년 1월 8일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나 1931년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간사이대학 법과에 진학하였다. 칸사이대학 법과 재학 중 징집되어 비행훈련을 받았고, 실전에 투입되지는 못하고 일본군 육군 항공소위로 함흥지구에서 복무중  종전을 맞으면서 소집해제되었다. 

 

광복후에 1948년 조선 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항공부대 간부로 활동하였다. 조선경비대 정보국장을 거쳐 최용덕, 김정렬 등과 함께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7인의 간부로 앞장섰다.  

 

1949년 공군이 육군에서 분리되면서 김영환은 공군 비행단의 참모장이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T-6 훈련기를 직접 조종, 출격하여 폭탄과 수류탄을 투하하며 전투에 나섰다.

 

~기행 일화~

건국기가 도입되었을 때 김신, 장성환과 더불어 한강다리 밑을 지나는 기행을 선보였다. 또 이화여대를 지날 때마다 저공비행을 하며 여학생들을 놀래켜  민원이 자주 들어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인 김영환의 형 김정렬은 자꾸 그러면 영창 보낸다며  실제로  몇번 보내버렸다고도(?) 전해진다.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잔당 토벌을 위해 공습 임무를 수행하던 중 대공사격에 피격되어 섬진강 강변에 불시착하게 되자, 강으로 뛰어들어 수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빨간 마후라~

김영환이 형수를 만나러 갔다가 형수의 붉은 색 치마를 보고 “그 치마 천 남았으면 나 마후라 하나 만들어 줘요! 조종복에 잘 어울리겠는걸!” 하며 잘라갔다는 설도 있고, 비행 중 전투나 불의의 사고로 착륙하게 되면 가장 눈에 잘 띄는 색깔이라고 판단하고 시장에서 빨간 인조견을 구해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한편으로 김영환 본인이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에 열광했기 때문에 빨간 마후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영환은 리히트호펜이 쓰던 것과 비슷한 빨간 모자와 부츠를 신고 다녀 '멋쟁이 바론'이라고 불렸다.

 

 빨간 마후라(Red Muffler)

1964

영화주제가

https://www.youtube.com/watch?v=ILH30-IoQPQ 

빨간 마후라 김영환 장군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어린 시절 누구나 파일렅을 꿈꾼 적이 있다. 빨간 마후라는 대한민국 공군 파일렅의 상징이다.
빨간 마후라는 알아도 김영환 장군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공군 창설과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이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이가 고 김영환 장군(1921~1954년)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모른다.


▶6.25전생 당시 김 장군(당시 공군제1전투비행단 대령)은 51년 12월 1일 지리산 빨치산 소탕을 위해 출격했다.
미정찰기가 해인사 법당에 흰연막탄으로 폭격지점을 가리켰다.
장군이 이끄는 편대는 기관총만 난사하고 돌아왔다.
출격 전 김 장군이 해인사에 네이팜탄과 폭탄을 투하해서는 안된다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포살(砲殺)형에 처해야 한다고 노발대발했다.
미군 고문관이 주재한 군법회의에 나가
미공군 고문단이 그 이유를 따지자 “2차대전 때 프랑스가 파리의 문화를 살리기 위해서 프랑스 전체를 나치에 넘겼다”라고 당당히 말하며 “영국 사람들이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꿀 수 없다고들 말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준다 해도 해인사와 팔만대장경과는 바꿀 수 없다”고 답했다.

▶장군의 결단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판을 구한 것이다.
전시의 항명은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다.
목숨을 해인사 대장경과 맞바꾸려고 한 장군의 역사문화예술에 대한 선견지명에 고개가 절로 숙여질 따름이다.
무와 문을 아는 장군, 진짜 하늘의 사나이이다.

박도준 지역부장

출처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http://www.gnnews.co.kr)

 

 

'빨간 마후라' 김영환 장군

 

고두현 논설위원

한경닷컴
입력 2019.09.30 17:26 수정 2019.10.01 14:37 지면 A35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우리 군에는 전투기가 한 대도 없었다.
미국에서 넘겨받은 L-4, 5 연락기 10대와 T-6 훈련기 10대가 전부였다.
북한은 소련제 전투기 60대 등 220여 대를 앞세워 대거 남침했다.
 
우리 공군은 훈련기에서 수류탄과 폭탄을 던지며 싸워야 했다. ‘맨주먹 투혼’이었다. 당시 공군 대대장이던 김영환 중령도 그랬다.

전투기 도입이 시급했다. 그는 며칠 뒤 긴급 명령을 받고 동료 조종사 9명과 일본으로 날아갔다. 미국 극동공군의 전투기 F-51 무스탕 10대를 인수하기 위해서였다. 마음이 급해 훈련을 1주일 만에 끝낸 뒤 귀환 다음날인 7월 3일 곧바로 출격했다. 이듬해부터는 미군 지휘를 받지 않고 한국 공군 최초의 단독 출격 작전을 벌였다.
 

이때 조종사들이 착용한 ‘빨간 마후라’는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추락한 아군 조종사의 수색 방안을 논의하다가 눈에 잘 띄는 빨간색을 떠올렸다고 한다. 형수가 치마를 만들려고 둔 빨간 천을 보고 착안했다는 설(說)도 있다. 1차 세계대전 중 빨간색 전투기로 맹활약한 독일 조종사를 흠모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한국 공군의 상징이 된 ‘빨간 마후라’는 신상옥 감독의 영화와 주제곡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공비토벌 때 해인사 폭격 명령을 거부하고 팔만대장경 등 국보급 문화재를 지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시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라며 폭격을 기총소사로 대신한 그는 명령불복종으로 처형될 뻔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났다.

휴전 직후 1954년 초 준장으로 진급한 그는 1954년 3월 5일에 행사 참석차 강릉으로 비행기를 몰고 가던 중 악천후 속에 기체가 추락하는 바람에 동해안 묵호 상공에서 34세로 순국했다. 그의 아버지 김준원 육군 준장과 형 김정렬 초대 공군 참모총장보다 훨씬 먼저였다.
 
그가 F-51 무스탕을 몰고 처음 출격한 1950년 7월 3일은 ‘조종사의 날’로 지정됐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은 공군 창군 70주년 기념일이기도 하다.
전쟁기념관은 그를 ‘10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공군 창설의 주역이자 한국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였던 ‘하늘의 사나이’.
가난한 조국 영공에 ‘번개’처럼 ‘청춘’을 불사르고 간 그의 호는 ‘창공(蒼空·푸른 하늘)’이다.
그가 F-51로 외롭게 싸웠던 대한민국 하늘을 이제는 F-35 스텔스기 등 최신 전투기 400여 대가 지키고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The Red Scarf ( Ppalgan Mahura )(1964)

https://www.youtube.com/watch?v=7e4g10WcGcs&t=1349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