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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서 팔만대장경을 지킨 故 김영환 장군과 공적비

Jimie 2021. 11. 12. 14:22

1953년 사천 비행장, 공군 제1전투비행단 부단장 김영환 대령

 

 

6.25때 팔만대장경을 지킨 김영환장군

 

 

폭격을 거절한다.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지킨 '김영환 대령'

                                           합천해인사서 열린 추모제에서 금관문화훈장 추서


                                                     ◇ 故 김영환 장군 ⓒ문화재청
 
 
 
목조건물 국보 52호 장경판전(1995년 12월 세계문화유산 등재)을 지킨 고(故) 김영환 장군(1920~1957)에게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정부는 해인사(주지 선각스님)에서 봉행하는 ‘고 김영환 장군 호
국 추모법회’를 계기로 장군에게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유산을 지킨 공적을 기리고자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했다.


문화재청장은 경남 합천 해인사 탑 마당에서 봉행되는
‘고 김영환 장군 호국 추모법회’에 참석, 정부를 대표하여
훈장을 유족에게 전달했다.

추모재에서는 금관문화훈장 추서와 김영환 장학기금
2000만원
공군사관학교 교육진흥재단에 전달한다.
형인 김정렬 장군과 함께 공군을 창설한 7인 중 한 명인 김 장군은 6·25 당시 가야산에 숨어든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공군 편대장으로 출격했으나, "인민군 수백 명을 살려 보내더라도 민족의 소중한 문화재인  팔만대장경은 폭격할 수 없다" 며 공격을 포기, 팔만대장경과 해인사를 지켜냈다

고 김영환 장군은 이밖에도 공군의 상징인 빨간마후라를 
창안해 낸 공군 문화의 창시자로
영화 ‘빨간 마후라’의 실제 주인공이기도하다.

 

 

 

해인사에서는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판의 세계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계기로 2011년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을 열었.
[데일리안 = 최진연 기자]

 
 
 
                                                                 故 김영환 장군 공적비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김영환 장군은 공군 수뇌부로부터
 
공비 소탕을 위해 경남 합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끝까지 거부했다.
김영환 장군의 명령 거부가 없었다면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인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제52호),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은 역사에서 사라질 뻔했다.
 
해인사와 조계종은 1997년 장경판전 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을 계기로 김영환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을 추진, 2002년 6월 해인사 입구에 김영환 장군 공적비를 세웠다.
 
공적비는 높이 2.3m 크기로 팔만대장경 경판을 본뜬 모습으로 오석과 황동석으로 만들어졌다.
총 978자로 이루어진 비문은 글 지관스님(가산불교문화연구소장), 글씨 장하건 씨


여기 화살같이 흐르는 짧은 생애에 불멸(不滅)의 위업을 남기고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英雄)이 있다.


김영환 장군!(金英煥將軍) !
그는 1921년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나
형인 김정열(金貞烈)장군과 함께 우리 공군 창설과 그 육성에 신명(身命)을 기울이며
조국의 하늘을 지키는 명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였으며  6.25 한국전쟁 중에는 탁월한 결단으로
우리민족의 성보(聖寶)고려팔만대장경판을 포화의 위기에서 구하는 호국호법의 큰 공을 세우고 1954년 3월 5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전사 하여 그 고귀한 명예를 영원히 남기고 있다.


고려대장경판은 고려 말 몽고병을 물리치려는 거국적 원력으로 시작한 호국의 얼이 담긴 민족의 성보로
조선 세종 때에는 왜의 끈질긴 기증 요구에 중신들은 응하려 하였으나 세종의 결연한 의지로 보존되어 오다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 낙오자 900 여명이 해인사에 주둔함으로써 민족의 성보는 위기일발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51년 7월 경남지구 공비토벌에 참여한 김영환 장군은 동년 9월 18일 오전 6시 30분 지상군 부대의 긴급 항공지원 요청에  따라 4기편대로 합천 상공에서 정찰기와 만나라는 무전명령을 받는다.


정찰기로부터 지시된 훈령은 해인사의 공비소굴을 발사 폭격하여 지상군을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정찰기의 표시용 백색연막이  선명하게 목표를 가리켰고 그곳은 바로 대적광전(大寂光殿)의 앞마당이었다.


네이팜탄 1발이면 팔만대장경은 물론 해인성지가 곧 잿더미로 바뀌고 말 찰나에 놓였다.
바로 이때 김 장군은 목숨건상부의 폭격명령을 어기고 요기(僚機)에게 명령했다.


각기는 나의 뒤를 따르되 나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트탄을 투하하지 말라.
다시 정찰기로부터 독촉명령이 내려졌고 2,3,4번 기장들은 편대장에게 재차 폭격명령을 내려줄 것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편대장 김 장군의 뜻은 단호했다.


각 기장들은 일체 공격을 중지하라는 날카로운 명령만이 무전기를 통해 전해졌다.
다만 사찰 상공을 몇 바퀴 선회한 뒤 해인사의 뒷산 능선 너머로 폭탄과 로켓트탄을 투하하고 귀대했다.
대장경판이 보존된 장엄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참으로 목숨 건 탁월한 판단과 애국심으로 이룬 불멸의 위업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불교조계종 총무원 해인총림 대한민국 공군이 뜻을 모아
그의 빛나는 호국호법의 장렬한 공적을 영원히 기리고자 이 공적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