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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공군 초대 참모총장 김정열 장군과 빨간 마후라 김영환 장군

Jimie 2021. 11. 12. 15:45

 

김정렬(金貞烈, 1917년 9월 29일 ~ 1992년 9월 7일)은 일본 제국육군군인, 대한민국공군군인이다. 해방 이후 국방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창씨개명 당시의 이름은 가가와 사다오(香川貞雄), 아호서암(曙巖)·산남(山南)·이열(怡悅).

 

일제 강점기 경성부 사직정 출신으로 어릴적 시코쿠에서 보냈다. 그는 김신 등과 함께 대한민국 공군의 창군 주역의 한 사람으로 공군 군번은 1번(50001번)이었다.

 

1917년 9월 29일 경성부 종로에서 김준원과 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5년 경성공립중학교(京城公立中學校)를 졸업한 뒤 다시 편제가 바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4학년이 되었다. 193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예과사관학교에 들어갔다.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1941년 일본항공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조종수로 출전하였다. 해방 후 창군에 참여하고 1949년에는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참여하여 초대, 3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57년 중장 예편 이후 제7대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1963년 민주공화당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가 그 해에 주미대한민국대사로 부임, 1년간 근무했다. 1966년에는 반공연맹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67년에는 민주공화당 공천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었다. 1970년대에는 기업인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제5공화국 때 총리 서리로 발탁되어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백부 김기원대한제국 군인이었으며 김정렬의 부친 김준원도 광복 후 육군 창군에 참여하여 한국 전쟁 당시 육군 대령으로 참전하였고, 6.25 전쟁 당시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폭격의 위기로부터 구한 김영환은 그의 동생이었다.

 

 

김정렬총장 동상 제막

공군본부

2011 년 4월 22일

 

대한민국 공군  초대 참모총장 김정열 장군

 

 

공군창설의 주역과 공군독립의 큰별, 서암 김정렬 장군은 우리의 영웅이다.

준장(예)  최 규 순 ( 1기생 회장)

09.10.01

 

“현재의 북한 공군의 전투력으로 보아 만약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즉각적인 북한기의 공습으로 서울 시내는 불바다가 될 것이며 한강다리는 끊어지고 국민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

 

북한군의 6.25 남침이 일어나기 14개월 전에 이토록 끔찍한 상황을 정말 섬뜩할 정도로 정확히 예언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1949년 4월 사관학교 교육과정을 준비해 가며 첫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던 육군 항공사관학교 교장 김정렬 대령이 공군의 독립과 전투력 강화의 필요성을 널리 홍보할 목적으로 자비 출간하여 정부 요로에 배포한 『航空의 警鐘』이란 등사본 책자에서 “한국 공군력 부재시의 가상 시나리오”로 예측했던 내용 중 하나가 바로 눈 앞의 현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김정렬 장군의 공군 창군이라는 거대한 신화창조 프로젝트는 1946년 5월 사이공에서 동남아 지역 징병징용자 1,100명을 인솔하여 귀국한 지 몇 개월 뒤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신화창조의 첫 단계는 육군 내에 항공부대를 먼저 창설하는 것으로 하고 그 다음 단계에서 공군을 독립시키는 것으로 계획을 짜고 일단 인적 자원의 확보를 위해 남한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항공 관계 인사들의 명단을 데이터베이스로 정리하는 대사업부터 착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출신의 첫 비행사로 알려진 안창남 선생과 똑같은 시기에 중국 유일의 자일로스코프 비행기를 조종했던 중국 국방대학 출신 비행사 최용덕 장군을 비롯한 중국 항공대의 여러 인사들은 물론이고 일본군 항공정비대대장을 지냈던 박범집 장군을 비롯한 일본 육사 출신의 항공 장교들, 중일전쟁 시 전투기 10대를 격추시켰던 이근석 장군을 비롯한 소년 비행학교 출신 인사들... 총 9개 영역에서 조종사, 정비사, 통신사는 물론이고 공항관리 업무까지 총망라하여 무려 500여 명의 주소와 연락처를 계급이나 경력 순으로 정리가 완료되었습니다.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된 이 데이터베이스가 있었기에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 넘는 빠른 시일 내에 육군 항공대 창설과 공군 독립이 잇달아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최용덕, 이영무, 장덕창, 박범집, 김정렬, 이근석, 김영환 등의 일곱 분이 모두 부대장 급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육군항공대 창설을 위한 일념에 백의종군의 정신으로 조선경비대 보병학교 특별반의 이등병 입교를 기꺼이 수락한 과정도 우리 공군 역사에 길이 남을 커다란 사건 중의 하나였습니다.

 

1949년 1월 육군항공사관학교 개설, 6월 제1기 생도 입교식을 치르면서 새로운 인재 양성에 대한 일련의 작업을 마친 김정렬 대령은 같은 해 10월 1일 드디어 공군의 독립 창군을 이루어 냈고 동시에 장군으로 진급하면서 초대 공군참모총장에 올라서 전투 장비의 현대화 및 그에 따른 예산 확보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항공 분야에 종사했던 모든 인적 자원을 총망라해서 미국과 한국 정부 관계자들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도 빈틈없이 공군 창군을 성공시켰던 서암 김정렬 장군을 한때 일본군이었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어느 날 갑자기 그 찬란한 빛을 현저하게 퇴색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우리 공군에서는 갑자기 영웅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영웅도 배출하지 못한 무능한 군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초대 공군참모총장, 김정렬 장군

https://www.youtube.com/watch?v=urqMjOGW_3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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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 - 영화 “빨간 마후라”의 실제 이야기

 

1951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까지 한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재수복하고, 38선을 중심으로 북한군, 중공군과 대치하며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의 보급물자를 받는 중요한 길목이 평양 인근 대동강 지류인 남강에 설치된 승호리 철교였다. 이 다리를 폭파하기 위해 미 공군은 수차례 폭격을 시도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러자 이 작전은 대한민국 공군으로 인계되어 공군 10전투비행전대가 수행하게 됐으며, 전대장은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신 대령이었다. 김신 대령은 임무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우리 공군 최초 100회 출격 달성자인 김두만 소령에게 임무를 부여하였다.

 

1952년 1월 12일에 편대장 김두만 소령의 지휘 아래, 2번기 장성태 대위, 3번기 김금성 대위, 4번기 이기협 대위, 5번기 전봉희 대위가 탑승한 F-51 전투기 5기 편대가 강릉기지를 이륙하여 적 대공포진지를 무력화한 후 500파운드 폭탄 10발을 투하했으나 폭탄이 교각 사이의 모래바닥과 물속에 떨어져 폭파에 실패하였고 같은 날 후속 편대가 재차 폭격을 시도하지만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김신 대령은 참모들과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는 8000피트 상공에서 강하해 30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미군식 폭격 전술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공포화에 노출되어 더 위험하지만 저고도 폭격작전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한다.

 

1952년 1월 15일에 제1편대장 윤응렬 대위와 제2편대장 옥만호 대위가 이끄는 6대의 F-51 전폭기가 출발하여 1편대의 엄호 속에서 2편대는 폭격 작전을 실행, 마침내 승호리 철교를 폭파하는데 성공하여 한국 공군의 높은 전투기량과 감투정신을 과시하였다.

 

□ 빨간마후라 기원(한국 공군 홈페이지 자료 인용)

 

한국전에서 F-51무스탕 전투기로 수많은 전공을 세운 고 김영환 장군이 서울 출장 중에 친형(김정열-초대 공군 참모총장) 댁에 들려 형수에게 비행 시 착용할 새 머플러를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흰 천이 없어 빨간색 비단 천을 목에 두르고 강릉 기지로 귀환하게 된 것에서 유래함.

 

김영환 장군이 두르고 있던 빨간마후라의 붉은 색이 조정사의 투지와 우국충정을 잘 상징할 뿐 아니라 만약 조난 시, 눈에 잘 띄는 빨간색이 구조신호를 보낼 수 있다고 판단하여 당시 강릉 기지의 모든 조종사에게 빨간 마후라를 지급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대한민국 전투기 조종사의 긍지를 나타내는 상징이 됨.

(※마후라의 올바른 표현은 ‘머플러’이나 당시 표현을 그대로 유지하여 전통 계승의 의의를 두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