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People

아테네의 흰장미 -나나 무스쿠리

Jimie 2021. 11. 21. 17:27


흰 장미의 은은한 향기



검은 테의 안경을 걸친 그녀의 모습이란 그야말로 갈 데 없는 여학생~~
청순하고 이지적인 품위를 보이고 있지만 결코 빼어난 미모라고 말하긴 어려운 용모다.
그러나 그 독특한 마스크와 가냘픈 몸매와 그것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목소리와 조화될 때, 아무도 그녀를 가리켜 결코 평범한 여가수라고 부를 수 없게 된다.

나나 무스쿠리~~
마치 푸르른 초원에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결을 연상시킬 만큼 신선하다.
그녀의 그 이미지와, 그리고 우리들과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친숙해 온 '하얀 손수건' '여름의 마지막 장미' '아테네의 흰 장미'를 들으면서 그녀가 어느새 고희를 넘긴 72세나 되었다고 생각하는 팬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나나 무스쿠리의 이미지는 소박하고 청순해서 세속과는 저멀리 떨어진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나 무스쿠리와 같은 가수는 목소리의 아름다운 추억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좋을 뿐, 세월의 흔적을 얼굴에 아로새긴 현실의 모습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녀는 분명히 금세기 최고의 가수 중의 한 사람이다.

나나 무스쿠리는 그리스 아테네의 어느 작은 영화관에 근무하던 영사기사의 딸로 1934년 10월 13일에 태어났다. 집안 형편은 넉넉치 못했지만, 조촐하고 평화로운 살림이었고 의좋은 가족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음악 듣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영사 기사였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관 뒤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런 까닭에 많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 영화관의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인생은 나의 꿈이었다. 특히 뮤지칼 영화에 나오는 노래들이 가장 좋았다. 그래서 집으로 들아와 내가 본 영화의 주인공을 흥내내면서 마음껏 소리를 높여서 노래를 부르고 가사를 외곤 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녀는 기어이 노래로 성공해 보겠다는 의지를 품었었던 것 같다.
나나 무스쿠리는 처음에는 오페라 가수를 지망하여 성악도로서의 재질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음악원의 졸업 시험을 눈앞에 둔 어느날, 그녀는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선한 음악에 넋을 잃고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녀에게 새로운 음악세계가 열렸다고나 할까.
후일 나나 무스쿠리의 술회를 보면 '갑자기 밝은 햇빛이 비친 듯 나의 음악 세계가 눈부시게 밝아진 느낌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녀가 하이틴 시절에 강렬하게 이끌린 것은 오페라의 세계가 아니라 재즈 음악이었다.

15세 되던 해, 매일같이 새벽 3시에 일어나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주신 라디오로 아테네 방송의 재즈 프로를 듣는 것이 나의 첫 일과였다.
때문에 음악원의 공부시간에는 몰려드는 잠을 쫓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노래들을 노트에 채보하면서 노래 공부에 열중했다. 나는 정말 학교 공부는 젖혀 놓고 재즈에 미쳐 있었다.
빌리 홀리데이 듀크 엘링턴의 재즈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다.
물론 죠니 미첼 ·죤 바이에즈의 포크송도 무척 즐겼고, 자크 브렐이나 조르지 브라상, 레오 페레 같은 샹송 가수들은 나의 우상이기도 했다.
나에게 이 기념할 만한 라디오는 지금도 어머니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결국 나나 무스쿠리의 남달리 적극적이고 민감한 예술적 감각은 그녀를 아테네 음악원의 이단아로 만들고,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게 되는 상황을 낳게 한다. 학생의 신분으로 대중가수에 뜻을 두고, 아테네 라디오방송국에서 소편성의 밴드가 반주하는 유행가를 노래한 사실이 물의를 일으켜 규율이 엄격한 음악원 측에서는 그녀의 졸업시험 응시자격을 박탈한 것이다.

흔히 '오페라의 여신'이라고 불리는 마리아 칼라스도 아테네 음악원에서 로시니의 오페라로 널리 알려진 스페인의 명가수히달고에게 사사한 경력을 갖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나나 무스쿠리의 퇴학은 어쩌면 마리아 칼라스를 이을 인재를 잃은 반면, 유로 팝스의 역사상 불후의 위대한 스타를 탄생시킨 전화위복의 결과를 낳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수년간 나나 무스쿠리에겐 기약 없는 무명의 나이트 클럽 가수 시대가 계속된다. 이 고달프고 기나긴 슬럼프에서 그녀를 구해낸 사람이, 그녀의 평생의 은인이며 친구가 된 위대한 작곡가 마노스 하지다키스였다. 마노스 하지다키스는 영화 '페드라' '희랍인 조르바'의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더불어 현대 그리스 음악계의 최대의 거인으로 손꼽히는 작곡가로, 1960년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 Never on Sunday'의 음악으로 아카데미 작곡상을 수상한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1959년, 마노스 하지다키스는 아테네의 한 작은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부르고 있는 이 가냘픈 몸매의 무명가수 나나 무스쿠리를 발견하고 그녀의 대성할 자질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마노스하지다키스 같은 대작곡가의 작품으로 그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나 무스쿠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가수였다.
그녀는 1960년 9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지중해 가요제'에 그리스 대표로 출전하여 우승의 그랑프리를 획득, 새로운 스타로 탄생하여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때 그녀가 부른 곡이 마노스 하지다키스 작곡의 '아테네의 흰 장미'였다. 그녀의 인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곡이다.

나나 무스쿠리를 놓고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있다. 프랑스 '필립스 레코드'의 디렉터 루이 아장이다. 그는 나나 무스쿠리의 매력을 발굴하여 대스타로 만드는 데 공헌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 당시를 루이 아장은 이렇게 말한다.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의 공개 이후, 영화에서 부둣가 창부 역의 멜리나 메르쿠리가 흥얼거린 주제가의 인기는 파리를 뒤흔들 만큼 굉장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이 곡을 따라 불렀고, 독특한 울림을 전해 주는 그리스의 민속악기 부주키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에서 전해 오는 음악 중에는 보다 색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의 레코드사에 연락해서 그곳 가수들의 샘플 레코드를 부탁해 직접 찾아내기로 결심했다.
며칠 뒤 산더미 같은 레코드가 그리스에서 도착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듣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많은 시간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게다가 멜로디가 꽤 아름다운 곡이 몇 곡인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단조롭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점점 지루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전에 전혀 들어 보지 못했던 새릅고 신선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넋을 잃고 어느새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도취되었다. 얼마나 맑고 투명한 목소리인가!
누구의 노래일까?
그리스 어를 약간 아는 내 처 오딜이 레코드를 듣고 가수의 이름을 읽었다.
나나 무스쿠리~~
그러나 그녀는 우리들에게 전혀 미지의 인물이었다. 우리는 곧 바캉스를 취소하고 때마침 열리고 있는 에레니크 가요제에 참석하기 위해 아테네로 향했다. 나를 사로잡았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미 무대에 나타나기를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렸던지 지금도 나는 그때 일을 잊지 못한다.
아름답고 자신에 찬 미녀가수들이 무대에 나타날 때마다 나나 무스쿠리가 아닌가 하며 가슴을 두근거렸으나, 번번이 나의 기대는 어긋났고 그럴수록 초조감은 더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검은 드레스로 몸을 감싼 한 젊은 여성이 등장했다.
화장기 없는 깨끗한 얼굴에 코 위에는 안경을 걸친 그녀는 겨우 40킬로그램을 넘을 듯한 가냘픈 몸매를 한 볼품없는 여성이었다.
설마 저 촌스런 아가씨가 나나 무스쿠리는 아닐 테지~~
그러나 그녀가 수줍은 듯한 몸가짐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드디어 만났던 것이다. 나나 무스쿠리 를~~

나나 무스쿠리는 이때부터 유럽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프랑스와 영국 ·독일로 연주여행을 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196l년 아테네에서 나나 무스쿠리를 만난 해리 벨라폰테는 3년후인 1964년 그녀를 미국에 초청했다. 넓은 미국 무대에의 데뷔는 나나 무스쿠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꿈이었지만, 인종 분규가 절정에 이르렀던 미국사회의 분위기는 흑인 가수와 함께 무대에 서는 백인 여성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백인들의 숱한 협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흑인 가수 해리 벨라폰테와 공연한 유일한 백인 여성으로, 카네기 홀을 비릇한 미국 각지의 대학 캠퍼스와 극장에서 연주회를 가져 대단한 환영과 절찬을 받았다.
그녀는 미국을 정복하였던 것이다.

그 후 나나 무스쿠리는 계속해서 그 소녀와도 같은 가련함, 그러면서도 청순한 아름다움을 지닌 풍모와 섬세한 목소리를 과시하면서 숱한 히트송들을 발표해 왔다.
'로즈 Die Rose' '나부코 Nabuco' 등 FM 방송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그녀의 노래들은 모두 그 목소리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잊을 수 없는 주옥과 같은 히트 송들인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다른 연예세계의 스타들처럼 화려한 스캔들과 이혼 경력이 전혀 없는 정숙한 현모양처로써 격을 높이고 있다. 하나의 여자로서 그리고 가수로서의 행복을 한몸에 모으고 있는 그녀는 '아테니안스 Athenians'의 리드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인 남편 조르지 페실라스와의 사이에 세 딸을 두고 있다.

 

나나 무스쿠리 데뷔 46년만에 첫 내한공연



지난 2005년 10월 8일 밤,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펼쳐진 당시 71세의 그리스 여가수 나나 무스쿠리의 첫 내한 무대는 46년을 기다려 온 국내 올드팬들에게 진한 감동과 함께 젊은 시절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4000석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고희를 넘긴 나이임에도 세시간 넘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와 혼신을 다한 열정의 무대 매너를 선사한 이 '노래하는 지중해의 요정'의 투혼에 한국의 팬들은 아낌없는 환호와 찬사를 보냈다.
무대 위 세 개의 초대형 스크린 위로 반세기 가까운 음악 인생을 담은 흑백화면이 10여분간 흐르고 난 뒤 DJ 이종환의 소개와 함께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공연장안은 일순간 우뢰와 같은 함성으로 가득찼다.


그녀는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말을 건넨 뒤 첫 곡 'I’ll Remember You'로 무대를 열었다.
세월의 무게로 몸은 뚱뚱하게 변했지만, 특유의 검은 생머리에 커다란 뿔테 안경 등 소녀적인 이미지는 여전했다.
특히 '아테네의 흰 장미'란 별명에 걸맞게 그리스 여신을 연상시키는 흰색 의상을 입고, 마이크 스탠드에도 흰 장미 한송이로 장식을 해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Over and Over', 'Try to Remember', 'Song of liberty' 등 히트곡은 물론 'Love me Tender', 'Bridge over troubled water' 등 국내 팬들에게 익숙한 팝송들을 부르며 감미로운 선율의 향연을 이어갔다.
특히 흥겨운 리듬의 노래를 부를 때는 탬버린을 흔들고 심지어 '조촐한 댄스'도 선보이는 등 흥을 돋우며 관객과 한 마음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게스트로 참여한 팝페라 카스트라토 정세훈이 열창할 때도 무대를 떠나지 않고 의자에 앉아 경청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이날 공연을 절정으로 이끈 대목은 그녀가 한국팬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한국어 노래였다.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이 모두 기립해 박수를 끝없이 쏟아내며 커튼콜을 요청하자 그녀는 다시 무대에 올랐고, 미리 써 온 가사가 적힌 종이를 들고 "헤어지자 보내 온~~"으로 시작하는 번안곡 '하얀 손수건'을 한국어로 직접 부르며 가을밤 '추억 여행'을 마무리지었다.


한편 그녀는 공연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이번 내한 공연이 포함된 세계 투어를 끝으로 더 이상 상업적인 공연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노래가 잊혀지기 전에 먼저 떠나는 것이 좋다'는 말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선공연 등 특별한 자리가 있을 때는 언제든지 무대에 설 것"이라고 밝혔다.
유니세프 친선 대사이기도 한 그녀는 "유니세프를 통해 돌보는 3명의 아이들 교육에 전념할 계획"이라며 은퇴 후 계획을 소개하기도 했다.

 

출처 : 사람과 사람들의 기차여행
글쓴이 : 임상수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