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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近代三大音乐家와 中国人民解放軍軍歌

Jimie 2021. 10. 23. 08:47

中国近代三大音乐家

 

'중국국가'를 작곡한 섭이[ 聂耳 니에얼 : (原名 聂守信, 1912-1935)],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 [ 郑律成 정뤼청 : (原名 鄭富恩. 1914 -1976) ],

'황하대합창'을 작곡한 선성해 [冼星海 셴싱하이:(1905—1945)]중국3대음악가로 칭한다.

 

 

정율성(鄭律成)은 '중국인민해방군가'도 만들었고

해방후 북한에서 '조선인민군가'도 만들어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사람이다.

북한에서 '음악가 정률성' 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中國人民解放軍 軍歌

公木作詞,鄭律成作曲。1939年秋,創作於延安,原名為《八路軍進行曲》;

 

背景圖片: 中华人民共和国成立70周年

2019年 10月1日, 北京天安门广场

https://www.youtube.com/watch?v=Om10AJHXkfw&t=18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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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작곡가, 정율성 [ 郑律成 정뤼청 : (原名 鄭富恩. 1914 -1976) ]

 

1914년 7월 7일,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현 양림동) 79번지에서 출생.

1976년 12월 7일, 베이징에서 사망, 바바오산 혁명공동묘지(八寶山革命公墓) 안장.

 

 

정율성( 郑律成, Zhèng Lǜchéng, 정뤼청, 1914년 7월 7일 ~ 1976년 12월 7일)은

'중국 인민 해방군 군가' 작곡가로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이다.

 

일제 강점기 1914년에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현 양림동) 79번지에서 한학자 정해업(鄭海業)과 지방 명문가의 딸

최영온(崔英溫) 사이의 5남5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이들 형제자매 중 5명이 요절해 4남1녀가 됐다.

정율성의 호적 이름은 '부은'이었으나 '구모(龜模)'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부친 정해업은 전라도 관찰부 공방서기직, 대한협회 광주지회 회원, 광주 지역 신간회 간사, 광주 수피아여고 교직에 종사하였으며, 모든 자녀를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보낼만큼 민족정신이 투철했다.

정율성의 첫째형 정남근과 둘째형 정인제, 셋째형 정의은 등이 모두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다.

 

정율성은 큰 외삼촌인 최흥종 목사의 집에서 축음기를 통해 음악을 듣고 피아노를 치며 놀았고, 그가 활동하던 광주YMCA, 양림교회, 양림동 선교사촌을 통해 서양음악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정율성의 작은 외삼촌은 최영욱 박사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수학한 후 광주 제중원 원장을 지냈으며 미군정 하에서 초대 전라남도 지사를 지냈다. 최영욱 박사의 아내이자 한국YWCA 설립자 중 한 명인

김필례(金弼禮)는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일하며 교회를 빌려 때때로 음악회를 여는 등 정율성은 외가의 영향으로 음악에 친숙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정율성은 1917년 화순군 능주로 이주, 1922년에 능주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광주로 다시 이주하였다.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3월 5년제 전주신흥학교에 입학하여, 합창단에서 '내고향', '쪼각달', '고기잡이', '까투리타령' 등 노래를 지도하였다.

 

 

1933년에 정율성(鄭律成)의 셋째 형 정의은(조선공산당 당원)이 중국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2기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광주를 방문하자, 그는 4학년 1학기인 1933년, 전주신흥학교를 중퇴하고 누나 정봉은과 함께

목포, 부산,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5월 13일 상하이 푸동 항에 도착,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해 제2기(1933.9∼1934.4.)로 졸업하였다. 조선혁명간부학교 재학중 중 의열단에 가입. 난징(南京)의 고루(鼓樓) 전화국에서 일본군 정보 수집 활동을 함.

 

그 뒤 민족혁명당 당무를 보는 한편 신분은폐를 겸하여 남경과 상해를 오가며 소련 레닌그라드음악원 출신 여교수 크리노와(Krenowa)에게 성악, 작곡,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배웠다. 정율성이 정식으로 음악을 배운 시기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이 시기에 어릴적 이름인 '부은(富恩)' 대신에 '선율(旋律)'로써 '성공(成功)'하겠다는 의미의 '율성(律成)' 으로 개명하였다.

 

항일구국운동이 한창이던 1936년 5월 남경에서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 창립 대회에서 추취도(鄒趣濤)의 시를 바탕으로 작곡한 그의 처녀작 《오월의 노래》(五月之歌)를 만돌린을 연주하며 발표하는 한편, 상해에서 김성숙·박건웅 등이 건립한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에도 가담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남경을 떠나 1937년 10월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는 연안(延安)에 도착하였다.

 

연안에서 섬북공학(陝北公學)에 다니고, 1938년 5월부터는 루신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 음악학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中国人民抗日军事政治大学) 정치부 선전과에서 활동했으며, 1939년 1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해 12월부터 루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배치되어 음악을 가르쳤다.

 

1938년 4월 작곡한 ‘연안송’(延安頌)은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한 느낌으로 당시 중국 전역에서 애창됐다.

 

1939년 1월 중국 공산당 가입. 《팔로군행진곡을 포함하여 8곡으로 구성된 '팔로군 대합창(八路軍大合唱)'을 작곡. '팔로군행진곡'은 팔로군에서 애창되었으며 第二次國共內戰時 《解放軍進行曲》으로 곡명을 바꾸었다가 1965年 《中国人民解放軍軍歌》로 바꾸어 지금에 이른다.

 

1988년 7월 25일, 중공중앙(中共中央)비준,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소평(鄧小平)이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 로 정식 서명. 채택하였다.

 

中国人民解放軍軍歌 / 中国人民解放军进行曲

https://www.youtube.com/watch?v=Xd0lbAg7V0A

 

 

옌안에서 중국 공산당 활동중 정설송(丁雪松 딩쉐송 1918年5月— 2011年5月)을 만나 1941년 팔로군이 주둔하던 동굴에서 결혼하였다. 정설송은 항일운동가로 국무원 외사판공실 비서장, 대외우호협회 부회장을 거쳐 중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네덜란드와 덴마크 주재 대사를 지냈으며 초대 총리인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의 양녀이기도 하다.

 

1941년 7월부터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섬감녕분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陝甘寧分會), 이듬해 12월부터 태행산(太行山)의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華北朝鮮革命靑年學校) 등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옌안을 떠난 이후  조선 혁명군 정치학교에서 음악장으로 활동. 이후 '유격전가', '처녀 적녀성', '조선 의용군 행진곡',등 항일성이 짙은 노래를 작곡하여 명성을 얻었다.

1944년 4월 다시 연안으로 돌아온 뒤 해방을 맞이하였다.

 

1945년 해방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하여 해주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음악 인재를 양성하였다.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구락부의 부장을 지냈고, 인민군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다.  조선음악대학 작곡부부장에 임명되어 《조선인민군 행진곡》, 《조선해방 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등을 작곡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저우언라이의 요구로 김일성은 정율성을 중국으로 파견.  같은 해 12월, 중국인민지원군의 한 사람으로 귀국하여 전선 위문활동을 전개하였다. 1951년 4월 중국으로 돌아가서 음악 활동에 몰두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취득.

 

정율성은 1959년 중국반우파정치운동 기간 반당분자라는 누명을 썼으며 1966년 문화대혁명 초기 특무(스파이)라는 죄명으로 감금돼 음악활동 자격이 박탈되기도 했다. 1976년 문화화대혁명이 끝난 뒤 창작활동을 재개하였으나 베이징 근교의 운하에서 취미인 그물고기잡이를 하다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1976년 12월 7일 베이징에서 사망, 바바오산 혁명공동묘지(八寶山革命公墓)에 안장되었다.

 

 

생년의 수수께끼

 

정율성선생은 항일운동 당시 미성년자로 변신하기 위해 네 살 낮춘 결과 어떤 기록에는 1918년생으로 적었다. 그러나 한국의 친척·친구들의 상세한 고증을 거쳐 그해의 호적 자료를 비롯한 각종 서류를 점검한 결과, 1914년생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2005년 주한 중국문화참사관인 주잉제(朱英杰) 주한 중국문화센터 주임은 "정율성선생은 항일전쟁 당시 아시아에 희망을 준 음악가일 뿐 아니라 음악으로 평화를 주창했던 대표적인 음악가"라고 말했다.

 

2009년 왕전(王震) 전 중국 국가 부주석은 '작곡가 정율성선생은' 서문에서 "당대에는 중국애국가를 작곡한 녜얼(聂耳), 시안싱하이(冼星海)에 이어 걸출한 작곡가였으며, 중국 프롤레타리아 혁명음악 사업의 개척자 중 한 명이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2009년 정률성선생은 중앙선전부, 중앙조직부 등 11개 부문으로부터 <"신중국 수립에 기여한 영웅 모범 인물 100인">으로 선정되었다.

 

2005년11월11일 한국 광주시에서 유명 작곡가 정율성선생을 기리는 제1회 광주 정율성국제음악제를 개최하였고

2009년4월 인민음악가 정율성기념관은 하얼빈시 도리구 우의로 233호에 세워져 인민음악가 정율성의 혁명음악 인생을 조명하였다.

 

中國人民解放軍 軍歌

작사 : 궁 무 작곡 : 정율성,

 

1939년 발표 때는 '팔로군 행진곡' 이었으나

1988년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이 비준에 서명함으로써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로 채택되었다.

작곡가인 정율성은 항일단체 의열단 소속으로 1939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해방 후 정율성은 조선국가보안대(조선인민군 전신) 구락부(군 문화부 부장에 해당),

조선노동당 황해도선전부 부장,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 조선국립음악대학작곡부 부장 등을 역임했다.

 

6.25 전쟁에 중공군 개입 당시 중공군 위문공연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고

중국으로 귀화, 1976년 베이징에서 62세로 사망하였다.

 

< 광주 '정율성 거리 전시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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