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 a popular way of dressing during a particular time or among a particular group of people.
패션이라 함은 특별한 기간동안 또는 특별한 사람들 사이에 인기 있는 의상 스타일 같은 것일 터다.
촌자(村者)
(*村者는 촌눔의 한자어?ㅎ~ 순 우리말은 시골눔일텐데 촌눔이 더 말맛이 난다. 촌눔의 존칭은 촌분?)
소승(小生) 촌분(村者)
"꽃파는 아메리카 아가씨"의 패션에 눈이 꽂히었다.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뉴요크"의 '브로드웨이'?를 천 두조각을 윗도리로 걸치고
자연스럽게 당당하게 거니시는 아메리칸 아가씨(a fashionable Anerican lady)의 패션...
이 모두 ㅎ 아내를 노래하신 한강, 고 심연옥 여사님 덕분~.
일전 하늘 나라 가신
님의 명복을 빈다.
뉘 묻는다.
왜 산에 오르느냐고? '산이 있으니까'
왜 보느냐고? '보이니까'
왜 꽂혔느냐고? '보이니까' ~ㅋ~
심연옥(沈蓮玉) - 꽃파는 아메리카 아가씨♬
https://www.youtube.com/watch?v=CPtuAwDtekc
1.
샹데리아 불빛 속에 꿈을꾸는 뉴욕의밤
오페라에 님그리운 메트로폴리탄
무슨꽃을 드릴까요 핑크의 달리아
첫사랑의 그 윙크를 던져 주면서
나는야 꽃파는 아메리칸 아가씨
2.
무지개가 끓어솟는 꿈을꾸는 뉴욕의밤
밤새도록 춤을추는 나이트 캬바레
무슨꽃을 드릴까요 정열의 장미꽃
로즈마리 그노래를 불러 가면서
나는야 꽃파는 아메리칸 아가씨
심연옥(沈蓮玉, 1929년 ~ 2021년 10월 4일) 서울생.
1947년 KPK 악단에서 가수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 시기 KBC 레코드에서 <한강>(최병호 작사.곡)을 취입하였다.
김해송씨에게 발탁이 되어 뮤지컬 작품 《투란도트》(1948), 《카르멘환상곡》(1949), 《로미오와 줄리엣》(1950) 등에서 늘 주인공으로 활동을 하였다.
6.25가 발발하자 김해송씨가 납북된 후 한국에 뮤지컬을 제작 감독할 사람이 전무한 상태에서 사랑하던 뮤지컬 무대를 잃게 되었다.
그 이후 유행가요를 부르는 가수로 전향하여 몇곡을 취입하게 된다.
오리엔트레코드에서
황해도 금천군 출신 작사가 승응순이 금능인 이란 필명으로 쓴 손목인 작곡 김백희 노래의 <안해의 노래>를
유호 선생이 개사한 <아내의 노래>(1952)를 취입하였고,
한국전쟁 후에 도미도레코드에서 손로원이 개사한 <한강>(손로원 작사. 최병호 작곡)을 취입하였다.
1957년 가수 백년설과 결혼하면서 가수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1977년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주, 미국 뉴저지에 거주했다.
1980년 백년설 타계.
2021년 10월 4일 밤(현지시각) 미국 뉴저지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향년 93세.
1929년 서울에서 태어난 심연옥은 일제강점기 어린 시절부터 무용연구소에서 무용공부를 했지만, 딸 가진 부모들이 공연무대에 서는 것을 말리던 시절이라 그 일을 접고 중앙 공업연구소 타이피스토로 활동했다.
아버지가 일찍이 세상을 뜨심에 어린 동생들을 기르며 생활하기에 타이피스트로는 가정생활이 어려웠고 또 완고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뒤라 연예활동을 생각하고 있던 중 친구들과 극장공연을 관람하러 갔던 것이 계기가 되어 가극의 주인공이 되고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가수 심연옥의 탄생이다.
국도극장의 그 공연은 그 시대 대표적인 연예스타 김해송이 이끄는 KPK악단의 공연이었고 그 공연무대에서 옛 가무단에서 함께 활동했던 친구 주리를 보았다. 심연옥은 주리와 함께 그 악단의 지휘자 김해송을 만나 어렵지 않게 KPK악단 단원이 되었다.
김해송은 1930년대부터 이름을 날린 가수 이난영의 남편이고, 최초의 보컬그룹 김스터즈 아버지다. 뒷날 가요계의 거성 손석우는 김해송의 애제자였고, 신카나리아, 백설희, 김백희 등 당대 이름있던 연예인들이, 이 KPK악단의 단원이었다.
KPK악단의 단원이 된 심연옥은 김해송의 신임을 받았고 또 무용뿐만 아니라 노래도 불러줄 것을 권유받아 무용과 노래를 겸비한 배우로 등단, 중요한 가극의 주인공을 맡았다.
《투란도트》(1948), 《카르멘환상곡》(1949), 《로미오와 줄리엣》(1950) 등 무대의 주연을 맡으면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이 프로그램의 대담에서 김영우 아나운서는 그 시대에 심연옥을 아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6.25전쟁이 일어나 김해송은 납북되고 KPK악단은 해체되었으며 심연옥은 피난길에 올라 대구문화극장을 주 무대로 활동했다. 이때 만난이가 한강을 작사 작곡한 최병호였다. 그때 한강 노래를 방송국 전속가수 등 여러 가수들이 불러 빙송 전파를 탔지만 최병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최병호는 대구방송국 500W 출력을 10Kw로 올리는 출력증강의 책임을 맡았던 기사였다. 연예계에도 관심이 깊었던 최병호가 대구문화극장에서 실연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심연옥의 공연을 보았다. 그때 심연옥의 인기가 대단했고 이 한강을 부를 수 있는 가장 적격 가수라고 생각해서 서로의 얘기를 나누며 한강을 심연옥의 노래로 문화극장 무대에 올렸을 때 큰 호응을 받았다.
그로부터 한강은 심연옥의 노래로 굳어졌다.
심연옥이 한강을 부르던 무렵 또 한곡의 대 히트곡이 있었다. “아내의 노래”다.
이 노래는 원래 해방공간에서 "안해의 노래" 라는 이름으로 조명암이 작사하고 KBS전속 지휘자 손목인이 작곡해서 KBS전속가수 김백희가 부른 노래지만 조명암이 월북함에 따라 금지곡이 되어 KBS전속 작가 출신 유호가 시대상황에 맡도록 노래가사를 바꾸어 쓰고 심연옥이 그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역시 대 히트곡이 되어 “한강”과 “아내의 노래”는 심연옥 일생일대의 대표곡이 되었다.
1957년 심연옥은 백년설과 결혼을 하고 함께 연예활동을 했지만 백년설이 가수활동을 접고 사업을 하다가 미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1977년 9월 미국으로 건너가 LA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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