檢定考試 / (school) qualification examination
大學入學資格檢定考試
Korean High School Graduation Equivalency Examination
*대학 입학자격 검정고시 →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1969년 명칭변경)
초ㆍ중등교육법 제27조의2(학력인정 시험) ① 제2조에 따른 학교의 교육과정을 마치지 아니한 사람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시험에 합격하여 초등학교ㆍ중학교 또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과 동등한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②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제1항에 따른 시험 중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과 동등한 학력이 인정되는 시험의 실시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한다.
③ 초등학교·중학교 및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과 동등한 학력이 인정되는 시험에 필요한 사항은 교육부령으로 정한다.
초ㆍ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8조(고등학교 졸업자와 동등의 학력인정) ①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은 상급학교 입학 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과 같은 수준의 학력이 있다고 본다.
1.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한 사람
②제1항제1호에 따른 검정고시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교육부령으로 정한다.
고향에 찾아와도
1958 최갑석
고려성 작사, 이재호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WBMOi5gmkTs
고향에 찾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두견화 피는 언덕에 누워
풀피리 맞춰 불던 옛 친구여
흰 구름 종달새에 그려보던 청운의 꿈을
어이 지녀 가느냐 어이 세워 가느냐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실버들 향기 가슴에 안고
배 띄워 노래하던 옛 친구여
흘러간 굽이굽이 적셔보던 야릇한 꿈을
어이 지녀 가느냐 어이 세워 가느냐
우리나라의 검정고시의 시작은 광복직후
대학입학자격검정고시 (大學入學資格檢定考試 ; 현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를 실시한 것이 효시를 이룬다.
당시 독학하는 사람은 대학에 진학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그들의 진학의 기회와 문호를 개방하기 위하여
연2회 문교부에서 대학입학자격 검정고시 중앙위원회를 두고
서울대학교를 포함한 전국 9개 대학에서 대학입학자격검정고시 대학교위원회를 두고 국비로 실시했다.
1969년 가장 먼저 입학자격 검정고시에서 졸업학력 검정고시로 이름이 바뀐 것은 대학입학자격검정고시이다.
1968년까지는 대학입학자격검정고시였고 시험도 6개 거점 국립대(서울대, 경북대, 부산대, 전북대, 전남대, 충남대)에서 실시했었다. 고졸검정고시로 바뀐지 아주 오래되었음에도 학원가 등에서는 여전히 대입검정고시라 부르기도 한다.
빅토리아풍의 경북대학교 본관.
아래는 본 블로거의 독학 스토리다.
나는 경북 성주중학교를 졸업하고 백형이 살던 부산으로 진학, 1964년 부산공업고등전문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전공인 전기통론은 과락을 맞으면서 1학년을 마치고 휴학하였다. 공업은 적성에 맞지 않았으며 취향도 아니었던 것이다.
* 국립 부산공업고등전문학교(현 부경대학교)는 공업입국 기치를 내건 박정희 정부가 공업입국 인재 양성을 위하여
부산공업고등학교를 국립 공업고등전문학교로 승격 신설한 학교였다. 당시 부산은 한국 공업시설의 80%를 담당할 정도로 상공업 중심의 항구 도시였다.
1965년 부산대학교에서 대입 검정고시 2(?)개 과목합격을 기록하고 낙향하여 농사일을 거들면서 독학의 길로 들었다.
가끔 대구로 나와 독서실에서 공부하면서 독학의 독한 과정을 거친 결과
경북대학교에서 "1967년 1회 문교부 시행 대학입학자격검정고시"에 응시, 합격하였다(6월 17일).
당시에는 40점 이하의 과락이 없어야 하고 전과목 평균 60점 이상이면 검정고시 합격증이 주어졌다.
나의 응시과목은 국어, 영어(외국어), 수학, 사회, 생물(과학), 농업(실업), 미술, 음악, 체육 등 9개과목으로 기억한다.
* 미술, 음악, 체육 과목은 이론 시험을 치렀었다.
평균 68(?)점 득점한 것으로 기억되는 바 합격증을 교부해 주던 담당자는 고득점이라고 칭찬해주었었다.
경북대학교 대학 본관 벽에는 60(?)여명의 합격자 명단이 나붙었고 그 중에 나의 이름도 눈에 들어왔다. 엄청 반가웠다.
청운의 꿈을 띄우던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 나는 합격증을 공군 입대시 제출하였다가 돌려받지 못하였는데 위의 양식에
1967년 6월 17일
대학입학자격검정고시 경북대학교위원회 위원장 발급이다.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0$미만으로 세계 최빈국 반열에 들어 있었다.
해마다 봄이오면 보릿고개를 넘던 춘궁기가 도래하여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헤메이던 가난의 시절이다.
농촌인구 70~80%에 높은 문맹률을 자랑하던 가난한 후진국의 실상 그대로였다.
사정이 그러한즉 중학교에 진학하는 여학생도 많지 않았고 여고생은 귀한 사람들이었으며 경북대학교, 부산대학교
입학정원이 500명(?)정도였으니 대학생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중학교 의무교육에 대학진학률 세계제1을 자랑하는 2000년대의 대한민국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런 시절이다.
1960년대 가난의 시절, 제반 사정으로 교육의 기회를 잃고 배움에 목말랐던 젊은이들에게 검정고시는 그들의 꿈과 희망을 향한 오로지 하나의 인생 등대였을 것이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독학도의 우상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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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입시에 합격하고도 입학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설혹 입학한들 월사금을 내지 못하여 일찍이 퇴학당하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다.
반값 대학등록금이 주요 이슈가 되고 온 세상이 복지열풍에 빠져들고 있는 지금에서는 꼭 거짓말 같은 낯선 나라의 얘기처럼 들릴 것이다.
1960년대에 연례행사로 봄이면 보릿고개를 넘었고 춘궁기를 맞이한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아침밥을 굶고 등교하였다. 다이어트를 위해서도 아니고, 등교시간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밥맛이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단체급식은 애초 꿈도 꿀 수 없었으며, 점심시간이면 김치냄새가 진동하는 교실에서 꽁보리밥 도시락에 행복해 하는 학생들 뒷 자락에는, 그런 도시락도 가져오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학생들은 자존심이 상해 운동장 뒷구석의 따뜻한 양지쪽으로 찾아 들곤 하던 풍경도 낯설지 않았다.
가난은 용돈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가난은 먹을게 없어서 굶어 죽는 것이다.
절망(絶望)과 기아선상(飢餓線上)이 그것이다.
2000년대의 한국
아침급식, 무상급식... 불과 50여년만에 같은 나라가 정말 많이 변했다.
하기야 오천년 가난의 기나긴 터널을 막 벗어난 거짓말 같은 천지개벽이 있었으니..............
그래도 변하지 않은 가치가 있다면,
"근면 성실" "도전과 응전" "정신일도 하사불성"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등등 독학도들을 채찍질 하여주던 여러 격문과 좌우명의 진리다.
요즈음 같은 사교육은 꿈도 꿀 수 없는 지경이니 오로지 스스로 자율적인 학습을 통하여 고등학교 교과 과정 전과목을 독학하여 대학입학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대학입학자격을 획득하였다는 성취감은 독학도들이 공유할 수 있는 특유의 보람이요 긍지며 고독한 위안이자 느낌일 것이다. 그들의 미래를 향한 길에 희망의 등불이자 축복이기도 할 것이고...
나의 독학은 고스란히 보릿고개 넘던 시절, 오천년 이어져온 가난의 시절에서 찾은 나의 인생 등대요 실같은 희망이었다.
그 한가닥 가는 끈을 놓을 수는 없었기에 대학 공부가 막막한 청년은 1968년 1월 군문에 들다.
군문에서 그나마 어렵게 공부한 야학도 세월 4년을 보내고 나니 알 수 없는 그 세월에 나의 조국은 어느새
오천년 가난의 기나긴 터널을 벗어나고 있었다.
굶어죽어 나가는 기아선상, 길게 드리운 어둡고 긴 가난의 그림자가 걷히고 푸른 하늘 새날이 밝아왔던 것이다.
기적은 존재하는가?
세상은 나의 조국을 일컬어
"한강의 기적"이라고 아낌없이 칭송하고 있었다.
동아대학교 (東亞大學校)
~부산 서구 동대신동3가 1번지 ~
나는
1968년~1973년 공군 하사관 복무중
1969년 제2회 대학입학 예비고사에 합격하여
1970년 3월, 우리나라 최초로(1953년) 2부대학(야간대학)이 개설된 전통의 동아대학교에 입학, 공부하였다.
나는
나의 인생행로에서
조우했던 수많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독학도, 야학도, 만학도의 길을 걸었던 나의 노력에 대하여 늘 동정과 격려, 배려와 인정을 과분하게 받았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음이니 참으로 다행이요 영광이며 독학의 보람이며 축복일지니 이 어이 감사하지 아니하랴.
나의 운명에...
나의 인생행로~
그 여정 돌이켜
미련(未練)도 후회(後悔)도 없노라~~~!!!
미련도 후회도 없다
1966 위키리
이달운 작사, 이인권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Ip1m4avPH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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