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단죄하고 사형당한 청년 이재명, 유해 어딨나
- 오마이뉴스
- 김종훈(moviekjh1@naver.com)
- 입력2021.09.30 07:08 최종수정2021.09.30 07:54
서대문형무소 인근 발굴 유골, 1년 5개월째 임시 보관 중... "2022년 유전자 검사 예정"
1909년 12월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가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한 장소. 명동성당 앞으로 현재 의거비가 세워져 있다. ⓒ 김종훈
시작은 단순했다. 취재 현장을 가는 길에 명동성당이 있었고 모퉁이에 새똥이 덕지덕지 붙은, 수많은 인파가 지나지만 누구 하나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재명의사의거터' 비석을 발견해서다. 가만히 서서 읽어보니, 이렇게 초라하게 관리될 비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재명은 친일매국노 이완용을 척살하려 한 독립운동가다. 1909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찔렀으나 복부와 어깨에 중상만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돼 이듬해 순국했다.
그랬다. 평안도 출생 스물셋 청년 이재명은 나라 팔아먹는데 가장 앞장섰던 친일매국노의 대표주자 이완용을 단죄한 인물이다.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등록된 <독립운동사>에도 "이재명은 왜적에게 나라를 파는데 앞장섰던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도륙하기로 작정했다"며 "이완용을 비롯한 역적들이 12월 22일 오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다가 매국노 이완용이 거만한 모습으로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비수를 들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어 거사를 진행했다"라고 기록됐다.
독립운동가 이재명과 그의 손에 처단당한 매국노 이완용 ⓒ 자료사진
그러나 이재명의 칼에 치명상을 입었던 이완용은 대한의원(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후송돼 일본인 의사들의 수술을 받아 살아난다. 이듬해인 1910년 8월 이완용은 대한민국의 내각총리대신으로서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함께 한일병합조약을 조인한다. 결과적으로 거사에 실패한 청년 이재명은 나라가 망한 뒤 한 달이 지난 시점인 1910년 9월 30일 서대문형무소(당시 경성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그의 나이 스물넷에 불과했다.
이재명은 재판 과정에서 "나는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라면서 "이 일에 찬성한 사람은 2000만 민족이다.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해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 죽어서 그 원한을 갚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완용은 1910년 한일합병의 주인공으로 역할한 직후 순종 황제로부터 대한제국 최고훈장인 금척대수훈장을 받았다. 이후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아 남은 일생을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다 1926년 68세의 나이로 죽었다. 당시 이완용이 죽은 직접적인 원인은 폐를 다친 후유증으로 알려졌다. 1909년 12월 이재명이 이완용을 찌른 칼은 이완용의 폐를 관통했다.
스물넷 청년 이재명,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
이완용을 처단한 이재명 의사가 순국한 서대문 형무소. 이재명 의사가 사형당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현재 연못이 자리해 있다. ⓒ 김종훈
이완용을 처단한 이재명 의사가 순국한 서대문 형무소. 새로이 조성된 사형장 앞에 통곡의 미루나무가 있다. ⓒ 김종훈
이재명은 1887년 10월 16일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나 8살 때 평양으로 이주해 성장했다. 평양 일신학교를 졸업한 뒤 열여덟 되던 해인 1904년 미국 노동 이민회사의 모집에 응해 하와이로 갔다. 1906년 3월에는 학업에 보다 매진할 것을 이유로 미국 본토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안창호를 만나 안창호가 창립한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07년,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행동에 나설 것을 결심한다. 그가 속한 공립협회도 발맞춰 거사에 나설 실행자를 선발했다. 청년 이재명은 모든 상황을 포기하고 거사 지원자로 나섰다. 거사를 결의한 후 이재명은 힘겹게 고국 땅으로 돌아온다. 기회를 엿보던 이재명은 1909년 12월 이완용이 명동성당에서 거행되는 추도식 참석 소식을 듣고 마침내 결행에 나섰던 것.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방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1910년 9월 30일 이재명 의사는 서대문형무소 초기 사형장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그리고 현재 이 자리는 서울 서대문구에 자리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10옥사와 11옥사 사이에 위치한 연못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1908년 10월 서대문형무소가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뒤, 연못이 자리한 현재 위치에 교수대 2개가 설치됐다. 이재명 의사를 비롯해 서울역 폭탄 의거 주인공 강우규 의사, 의병장 이강년, 허위, 이인영 등 7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사형을 당했다. 1919년 3.1운동 후 유관순 등 재소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일제는 1921년 옥사를 신축하고 사형장을 새로이 조성했다. 서대문형무소 정면 기준 좌측 북단에 새롭게 만들어진 사형장에서 무수한 독립운동가들이 1945년 일제가 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죽음을 당했다. 사형장 바로 옆에는 당시 형장으로 끌려갔던 지사들이 원통한 마음을 붙잡고 울었다는 '통곡의 미루나무' 한 그루가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인 오인성, 이재명 순국 후 독립운동 하다 요절
이재명 의사는 1907년 성모여학교 교사인 함마리아의 소개로 평양 출신 오인성을 만나 결혼한다. 당시 이재명은 스물하나, 오인성은 열일곱이었다. 그러나 부인 오인성은 이재명의 거사를 알고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이재명이 거사 후 잡혀가자 경찰에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독립운동가 사료집에도 부인 오인성이 이재명 의사가 사형당한 뒤 "하늘을 우러러 목을 놓아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국적 이완용은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데, 우리집 가장은 무슨 죄로 사형에 처함을 당하여야 하느냐' 하면서 피눈물로 얼굴을 적시었다"라고 기록됐다.
이재명 순국 후 오인성은 중국 지린과 상하이 일대를 돌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시 귀국했고 이 일로 일제에 체포된 뒤 증거부족으로 석방됐지만 일제의 감시를 더 심하게 받았다고 한다. 오인성은 다시 중국으로의 망명을 도모하던 중 병을 얻었고 이로 인해 스물아홉 나이에 요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대문 형무소 인근에서 나온 유골, 누구 것인가
2020년 4월 유골이 발견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 현장 터 ⓒ 김종훈
지난해 4월 29일 오전 서울 서대문 형무소 북단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공사 현장에서 백골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경찰은 "범죄 혐의점은 없는 것으로 보고 국과수에 감식을 의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당시 학계를 포함해 광복회 등 유관단체에서 '발굴된 유골이 이재명 의사처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지만 수습하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이 아니냐'라는 기대감이 일었다.
그러나 <오마이뉴스>가 보훈처를 통해 확인한 결과 해당 유골은 발견 1년 5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유전자 감식 등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29일 보훈처는 서면 답변을 통해 "출토 유골에 독립유공자 포함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있어 관련 기록 검토했다"며 "국과수에서 유골에 대한 유전자 검사를 5.18 민주화운동 관련 광주 출토 유골 검사 등으로 여력이 없어 2022년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내와 현재 유해를 시설에 보관 중"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기념관 조직 출범 이후 유전자 검사를 추진할 것"이라며 "후손이 남아있는 순국자를 찾아 유족의 DNA를 추출한 다음 유골의 DNA와 대조하는 등 확인 작업 착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골이 발견된 자리에 지어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오는 11월 23일 개관식을 갖을 예정이다.
우리 정부는 이재명 의사에 대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2001년 12월에는 이재명 의사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그러나 이 의사와 아내 오인성과의 직계 후손이 없어 지금까지도 그의 훈장을 정부가 보관하고 있다. 그의 유골 역시 사형 집행 후 제대로 수습되지 않아 순국 1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이재명 이름 석자 새겨진 위패 하나를 올려놨을 뿐이다. 부인 오인성의 묘도 알려지지 않았다.
김종훈 기자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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