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굴지의 보물급 고분, 주인은 왜인? 백제인?
노형석 입력 2021. 10. 05. 05:06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국립광주박물관 '신덕 고분 특별전'
전남 함평 예덕리에 있는 신덕 고분의 1990년대 조사 당시 모습. 앞이 네모지고 뒤가 둥근 고대 일본 특유의 전방후원분 무덤 양식(장고형 무덤)을 보여준다. 무덤 봉분 곳곳에 깬돌을 쌓은 흔적(즙석)이 보이고 무덤 주위를 도랑으로 두른 것도 왜식 전방후원분의 특징이다.
“조사하러 온 무덤이 도굴됐습니다!”
성낙준 학예관은 파랗게 질려 전화를 붙잡고 보고했다. 그의 머릿속은 조금 전 목격한, 옛 무덤 봉분 한쪽에 뚫린 도굴 구멍의 참상으로 가득했다. 30년 전인 1991년 3월26일 오후, 성 학예관을 비롯한 국립광주박물관 직원들은 전남 함평 월야면 예덕리 언덕에 있는 6세기 초 대형 무덤을 측량하러 갔다. 7년 전인 1984년 발견된 신덕 고분 1호분이었다. 고대 일본 특유의 전방후원분, 앞은 각지고 뒤는 둥글게 생긴 열쇠구멍 혹은 장고 모양 무덤 형식으로, 그해 한반도 전방후원분의 첫 발견 사례로 보고된 해남 장고봉 고분과 더불어 학계의 각별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7년이 지나도록 실측조차 없이 방치돼 학계에선 정체를 둘러싼 뒷말만 돌았다. 사정을 아는 박물관 사람들이 묵은 숙제를 하듯 실측하러 갔다가 며칠 전 파헤친 도굴 갱을 발견한 것이다.
1990년대 신덕 고분의 1호 무덤방을 조사할 당시 바닥에서 발견된 목관의 나무 판재들. 일본산이 유력한 금송 재질이다. 무덤방에 금송 목관을 넣는 것은 공주 무령왕릉, 익산 쌍릉 등 백제 고위 계층의 장법으로 신덕 고분의 무덤 주인이 현지인이거나 백제계 인물임을 보여주는 근거 유물이다.
무덤 안은 처참했다. 도굴범은 돌방 남서쪽 벽을 뚫고 들어갔다. 내부 유물들을 건드리면서 금속붙이 공예품, 큰 토기류 등만 훑고 나머지는 팽개쳤다. 그 통에 돌방 벽이 훼손됐고 바닥 유물들은 밟혀 부스러졌다. 주검을 넣은 목관 관재들과 머리뼈, 치아 등 유골은 헝클어졌고, 도굴 갱 안팎엔 철기편과 도자편이 흩어져 있었다. 부장품들은 심상치 않았다. 부서지긴 했지만 관대에 나뭇잎 장식이 구슬 장엄과 함께 달린 금동관 파편은 고고했다. 꼰 고리 큰칼, 초록색·노란색 유리판을 겹치고 잇댄 외국산 연리문 구슬 등은 공주 무령왕릉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동남아산 고급품이었다. 돌방 입구 널길 바닥에선 제수로 쓰였을 참돔 뼈가 담긴 항아리와 여러 제물을 넣었던 뚜껑접시들도 무더기로 발견됐다. 호남 굴지의 보물급 고분이 털렸다는 급보는 정부를 놀라게 했다. 한병삼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서 직보를 받은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검찰총장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긴급수사를 요청했다.
신덕 고분 1호 무덤의 돌방에서 나온 금동관의 잔편. 육각형 무늬 안에 꽃무늬를 새긴 길쭉한 대 위에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을 단 얼개로 일본 시가현 가모이나리야마 고분의 출토품을 비롯해 규슈와 기나이 지역의 고급 고분에서 출토되는 관과 거의 동일하다. 무덤 주인이 왜인임을 주장하는 설의 유력한 근거 유물 중 하나다.
이런 내용이 보도되자 겁먹은 도굴범 일당은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 동문에 도굴한 철기류 상자를 맡겨놓고 사라졌다. 수거한 상자 안 유물은 철기 칼자루였다. 무덤 속에 남은 칼의 날과 맞춰보니 딱 맞아 부장품으로 확인됐다. 범인들은 1993년 9월 붙잡혔다. 토기와 투구편 등 65점의 ‘백제 유물’을 턴 것으로 드러났다.
신덕 고분에는 한반도 전방후원분 가운데 가장 많은 부장품이 남았다. 박물관도 도굴 뒤 9년 동안 체계적인 조사를 벌여 상당한 연구 성과를 확보했다. 하지만 30년간 보고서를 내지 않았고, 출토품 전시도 없었다. 이유는 이른바 ‘왜색’ 탓이다.
두개의 산 모양 무늬를 세운 대를 씌운 금동관과 꼰 고리자루 큰칼, 삼각형 철모 등 한·일 학계에서 바로 왜계로 동의할 만한 유물이 속속 드러나자 4~6세기 일본을 통일한 야마토 정권이 임나일본부를 두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식민사학자들과 일 극우파들 주장의 근거로 악용될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한반도 전방후원분 연구도 미진한 상황에서 공개하면 일본 학계와 논전할 상대가 되기 힘들다는 걱정도 있었다.
신덕 1호 무덤 돌방에서 나온 꼰 고리자루 큰칼(맨 위). 철봉 위에 은을 입히고 꼬아서 만든 고리로 칼끝을 장식한 이 칼은 한반도에는 없고 일본열도의 지배층 무덤에서만 나오는 최고급 유물이다. 금동관과 더불어 신덕 고분의 무덤 주인이 왜인이라는 설을 뒷받침하는 근거 유물이다.
이런 사정을 볼 때 지난 7월19일부터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열고 있는 신덕 고분 특별전 ‘비밀의 공간, 숨겨진 열쇠’(24일까지)와 뒤늦은 보고서 발간은 만시지탄이지만 반가운 소식이다. 한반도 전방후원분에 대한 최초의 기획전을 꾸리고 출토품들을 학계에 전면 공개하는 자리까지 마련한 것은 고고학사상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학계의 연구 역량이 성숙했음을 일러주는 까닭이다.
일본에 4천기 이상 남은 전방후원분은 역사적 긍지가 깃든 상징물이다. 3세기 중엽부터 7세기 초까지의 고분시대에 오늘날 오사카 일대 긴키 지역에 근거지를 둔 야마토 정권이 각지의 수장과 연합해 통일국가를 세운 역사적 지표로 꼽힌다. 긴키에서 시작된 전방후원분이 규슈와 간토 등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는 과정이 열도 통일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게 정설이다.
일본 나라 지역에 있는 6세기 중엽의 마루야마 고분. 일본 고분시대 말기 최후의 전방후원분으로 꼽힌다.
이런 전방후원분이 전라도 서남해안에서 현재까지 14기가 확인되고 핵심 격인 신덕 고분에서 왜계 금동관과 최고급 칼이 핵심 부장품으로 나온 건 논쟁적이다. 숫자가 적고 기간도 5세기 말~6세기 초 50년에 불과하지만, 무덤 주인이 왜계 실력자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하다. 일본 학계에서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에 영향을 행사했다는 추론으로 비약시킬 수도 있다. 폐기된 임나일본부설을 감히 제기하는 학자들은 없지만, 장고형 무덤의 연구 성과 공개는 일본 학계와 해석의 마찰을 부를 공산이 크다. 국내 학계도 무덤 주인을 놓고 왜인설과 현지인설, 백제인설이 엇갈린다. 무덤 모양과 구조, 핵심 부장품은 왜계이지만, 또 다른 단서인 금송제 목관 유물은 백제 고위층 장법이기 때문이다.
박물관 전시는 좀 더 적극적인 해석과 설명의 장을 펼치지 못한 한계도 드러낸다. 금동관과 칼과 다량의 토기, 관재들을 죽 나열해놓은 유물 보고전 식의 얼개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다. 전방후원분을 놓고 한·일 학계의 논란이 왜 불거졌는지, 임나일본부가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역사적 경위를 상세하게 풀어 설명하지 않은 점이 어색하다. 사료 부족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차분하게 팩트를 축적하며 논의하되 대중에게 전방후원분의 역사적 실상을 제대로 알리면서 무덤 주인 논란을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근대 민족감정에 따른 제약을 받는 한·일 학계는 앞으로 서로 교감하며 공동 이해를 찾는 구동존이의 자세로 만날 수밖에 없다.
광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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