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Lev Nikolayevich Tolstoy)의 부활 Voskreseniye

Jimie 2021. 9. 22. 12:46

復活唱歌(カチューシャの唄) 

~松井須磨子~

1914年大正3年)に発表された日本歌謡曲

https://www.youtube.com/watch?v=TiMpE83f8GM&t=6s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Lev Nikolayevich Tolstoy)

부활 Voskreseniye

한 소녀를 유린한 귀족이 도덕적으로 부활하는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톨스토이가 개종한 이후의 대표작에 속하며, 톨스토이 자신의 도덕적인 갈등을 바탕으로 당시 사법제도에 대한 비판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는 걸작이다.

 

19세기 러시아의 불합리한 사회 구조와 종교적 모순을 드러낸 문제작이자 ‘흔들리는 인간’에게서 부활의 가능성을 모색한 만년의 걸작 

 

『부활』은 톨스토이가 일흔이 넘어 완성한 만년의 역작으로 고골, 푸쉬킨, 도스토옙스키를 아우르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대한 오마주이자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와도 맞닿는 인간과 구원에 대한 최종적인 통찰이 담겨 있다. 톨스토이는 19세기 러시아의 불합리한 사회 구조와 종교적인 모순을 지적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에서 정신적인 ‘부활’을 향한 미약한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미약한 불빛을 과장하는 대신 파편적이고 불안정한 실체 그대로 서술함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한 뜨거운 비판과 애정을 드러낸다.

 

소설에서, 네흘류도프 공작은 살인 혐의를 받고 법정에 선 카츄샤의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한다. 대학생 시절의 공작은 카츄샤를 향해 순수한 애정을 품은 적이 있다. 그러나 군인이 되어 재회했을 때 다른 남성들에게서 배운 대로 카츄샤의 감정과 육체를 마음대로 다룬 후 그녀에게 돈을 찔러 주었으며, 그 후 캬츄샤는 인간에 대한 불신 속에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국 카츄샤는 법정에서조차 무책임한 법조인과 배심원들로 인해 죄도 없이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네흘류도프는 오랜 시간 자신을 옥죄던 죄책감과 함께 카츄샤를 구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는데, 그 노력의 일환으로 국가 기관들을 방문하면서 점차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타락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는 데 여념이 없고 잘못된 판결 앞에서 미안해하지 않는 재판장과 검사보, 사건의 진실이 아닌 절차의 정당성 여부만을 무심히 따지는 원로원 의원들, 무더운 날에 장시간 도보 이동을 시켜 허약한 죄수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죄수들을 똥물 위에서 자도록 방치하는 호송병들……. 이들은 특별히 가학적이거나 흉악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저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그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상관과 국가에 맡겨 버린 평범한 사람들이다. 양심에 귀를 기울이거나 스스로 사유하거나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을 잊은 사람들인 것이다. 이렇듯 『부활』은 두 인물 네흘류도프와 카츄샤의 개인적인 타락에서 시작해 법과 제도, 토지 문제, 종교 등 사회의 광범위하고 고질적인 타락으로 시선을 넓힌다.

 

톨스토이는 정부로부터 억압받는 두호보르 교도들을 돕기 위해 『부활』을 집필했다고 전해진다. 두호보르교는 18세기부터 러시아에 존재한 그리스도교 종파로 교회를 부정하고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거부해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정부가 이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학대와 폭력이 자행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톨스토이는 국제 여론에 호소하는 등 폭력을 멈추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특히 그는 1881년 이후 저술한 작품에 대해 저작료를 받지 않기로 한 원칙을 깨고 집필 중이던 『부활』을 필사적으로 마무리해 주간지 《니바》와 선금 1만 2000루블에 출판 계약을 맺어 그 돈을 전부 이주비에 보탰다. 이처럼 『부활』은 집필 과정부터 인간 사회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했지만 그럼에도 선한 영향력을 믿었던 톨스토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한 만년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

네흘류도프 공작은 살인 혐의를 받고 법정에 선 카츄샤의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한다. 대학생 시절의 공작은 카츄샤를 향해 순수한 애정을 품은 적이 있다. 그러나 군인이 되어 재회했을 때 다른 남성들에게서 배운 대로 카츄샤의 감정과 육체를 마음대로 다룬 후 그녀에게 돈을 찔러 주었으며, 그 후 캬츄샤는 인간에 대한 불신 속에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국 카츄샤는 법정에서조차 무책임한 법조인과 배심원들로 인해 죄도 없이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이 장면을 목격한 네흘류도프는 오랜 시간 자신을 옥죄던 죄책감과 함께 카츄샤를 감옥에서 꺼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작가 소개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1828년 러시아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844년 카잔 대학교에 입학하나 대학 교육에 실망, 1847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업 경영과 농노 계몽을 위해 일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이후 3년간 방탕한 생활을 했다.

 

1851년 맏형이 있는 카프카스로 가서 군대에서 근무했다. 이듬해 잡지 《동시대인》에 익명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작품 집필과 함께 농업 경영에 힘을 쏟는 한편, 농민의 열악한 교육 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학교를 세우고 1861년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했다. 1862년 결혼한 후 문학에 전념하여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을 집필,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이 무렵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그리하여 1880년 이후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면서 사유재산 제도와 러시아 정교에 비판을 가하고 『교의신학 비판』, 『고백』 등을 통해 ‘톨스토이즘’이라 불리는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또한 술과 담배를 끊고 손수 밭일을 하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하며 빈민 구제 활동을 하기도 했다.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출간되자마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번역되었으며, 출판으로 인한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1901년 『부활』에 러시아 정교를 모독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종무원(宗務院)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사유재산 및 저작권 포기 문제로 시작된 아내와의 불화 등으로 고민하던 중 1910년 집을 떠나 폐렴을 앓다가 아스타포보 역장의 관사에서 영면하였다.

 

작가 연보

1724년 표트르 안드레예비치 톨스토이(작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4대조 할아버지)가 표트르 대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음.

1821년 톨스토이의 외할아버지인 니콜라이 일리이치 볼콘스키 공작이 툴라현의 야스나야 폴랴나 영지에서 사망함.

1822년 파블로그라드 근위대 장교였던 니콜라이 일리이치 톨스토이 백작(1794~1837)과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볼콘스카야 공작 영애(1790~1830)가 결혼함.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 즉위. 제카브리스트 의거가 일어남.

1828년 8월 28일, 니콜라이 일리이치 톨스토이 백작의 넷째 아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이후 ‘톨스토이’로 약칭)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남.

1830년 3월, 여동생 마리야가 태어남.(1912년에 죽음.) 8월, 출산 후 건강이 악화된 어머니가 사망함.

1833년 형들을 가르친 표도르 이바노비치 레셀이 톨스토이를 가르치기 시작함. 작센 공국 출신의 독일인인 레셀이 『유년 시대(Детство)』에서 가정 교사 카를 이바노비치로 묘사됨. 열 살인 맏형 니콜라이가 동생들에게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질병도 전쟁도 없어지고, 아무도 다른 이들에게 화내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모두 다 함께 개미 형제단이 되는” 비밀을 알려 줌. 그는 자신이 이 비밀을 녹색 지팡이에 새겨 골짜기 끝자락의 길옆에 감춰 두었다고 말함.

1836년 푸시킨의 시 「바다에(К морю)」(60행)와 「나폴레옹(Наполеон)」(120행)을 아버지 앞에서 암송함.

1837년 1월, 가족 전체가 야스나야 폴랴나 영지에서 모스크바로 이주. 2월, 푸시킨이 결투로 사망. 6월, 아버지가 툴라에 토지 거래를 하러 갔다가 노상에서 원인 불명으로 사망.(독살되었다는 의혹도 있음.) 아버지의 여동생 알렉산드라 일리니치나 폰 오스텐-사켄 백작 부인(1795~1841)이 톨스토이가 남매들의 후견인이 됨. 아이들을 실제적으로 돌본 사람은 톨스토이가의 먼 친척이자 아버지의 집에서 어릴 때부터 지낸 타치야나 알렉산드로브나 예르골스카야(1792~1874)임.

1838년 5월, 할머니 펠라게야 니콜라예브나 톨스타야가 사망함. 6월, 톨스토이가의 자녀들인 드미트리, 레프, 마리야가 타치야나 알렉산드로브나와 함께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옴.

1839년 8월, 맏형 니콜라이가 모스크바 대학교의 철학과에 입학.

1840년 1월, 톨스토이가 타치야나 알렉산드로브나의 명명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랑하는 고모에게(Милой тетеньке)」라는 시를 씀. 오늘날까지 보존된 그의 작품들 가운데 최초의 작품임.

1841년 7월, 레르몬토프가 결투로 사망. 8월, 오스텐-사켄 백작 부인이 사망. 10월, 아버지의 작은 여동생 펠라게야 일리니치나 유시코바(1798~1875)가 새로운 후견인이 됨. 11월, 톨스토이가 남매들이 유시코바가 사는 카잔현으로 이주. 맏형 니콜라이도 카잔 대학교로 학교를 옮김.

1843년 형 드미트리와 세르게이가 카잔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1844년 5월, 톨스토이가 카잔 대학교 동양어과에 진학하여 아랍어와 튀르크어를 배움. 사교계에 출입하며 방탕한 생활을 함. 6월, 맏형 니콜라이가 카잔 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침. 9월, 수차례 보충 수업과 재시험을 거친 후 카잔 대학교 동양어과에 ‘아랍-튀르크어 문학의 자비 부담 학생’으로 학생 신분을 유지하게 됨. 12월, 맏형 니콜라이가 육군 18포병 여단에 입대.

1845년 8월, 진급 시험에 떨어진 후 법학과로 전과를 신청. 여름에 야스나야 폴랴나에 머무는 동안 철학에 매력을 느끼게 됨.

1846년 역사학 교수 이바노프의 수업을 결석한 것 때문에 대학교의 감금소에 여러 번 갇힘.

1847년 1월, 일기를 통해 매일의 원칙과 생활 계획을 세우고 실행 점수를 표시함. 3월, 임질 치료를 위해 입원. ‘철학과 실천의 결합’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일기를 쓰기 시작. 루소와 고골과 괴테의 작품을 읽음.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과 예카체리나 대제의 훈령을 비교 연구. 4월, 대학을 그만두고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감. 후견인이 관리하던 양친의 유산을 형제들과 분배하여 야스나야 폴랴나 영지를 비롯해 마을 네 곳을 상속받음. 새로운 방식의 농경을 시도하고 농노들을 계몽하고 그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함. 일기 쓰기를 중단함.

1848년 10월 이후 1950년 6월까지 약 삼 년 동안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서 방탕한 생활과 도박에 빠져 빚을 많이 짐. 음악 공부를 함.

1849년 4월,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법학 학사 자격 검정 시험에 두 과목을 합격했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귀향함.

1850년 6월 11일, ‘방탕한 삼 년’을 반성하기 위해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함.

1851년 3월, 단편 「어제의 이야기(История вчерашнегодня)」를 집필(미완성). 4월, 군대에 복무하는 형 니콜라이와 함께 캅카스를 여행하다가 형의 부대에서 병사로 복무. 로렌스 스턴의 작품을 읽음. 스턴의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지나는 감상적 여행(Sentimental Journey through France and Italy)』을 번역하기 시작함.(끝맺지 못함.) 『유년 시대』를 집필하기 시작함.

 

1852년 1월, 사관후보생 시험을 거쳐 4급 포병 하사관이 됨. 스타로글라드콥스카야에 주둔 중인 코사크 부대에서 지냄. 체첸인과의 전투 중에 포로가 될 뻔함. 3월, 고골이 사망함. 5월, 『유년 시대』를 탈고. 9월, 네크라소프가 편집장을 맡은 《소브레멘니크(Сов-ременник)》 9월호부터 『유년 시대』를 익명으로 연재함. 12월, 「습격(Набег)」을 탈고.

1853년 체첸인 토벌에 참가했으며, 이후 일기에서 전쟁을 비판함. 3월, 《소브레멘니크》에 「습격」 이 실림. 『코사크들(Казаки)』을 쓰기 시작. 9월, 「당구 계수원의 수기(Записки маркера)」를 탈고. 10월, 튀르크가 국경 인접 지역을 점령한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함.

 

1854년 1월, 소위보로 임명. 3월, 영국과 프랑스가 튀르크를 지원하며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크림 전쟁이 시작됨. 4월, 『소년 시대(Отрочество)』의 원고를 네크라소프에게 보냄. 9월, 군인 잡지에 싣기 위해 단편 「즈다노프 아저씨와 훈장을 받은 체르노프(Дяденька Жданов и кавалер Чернов)」와 「러시아 병사들은 어떻게 죽는가(Как умираютрусские солдаты)」를 씀. 10월, 야스나야 폴랴나의 오래된 저택을 매각함. 11월, 세바스토폴에 도착.

 

1855년 3월, 『청년 시대(Юность)』를 쓰기 시작함. 니콜라이 2세가 사망하고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 4월, 포위된 세바스토폴에서 가장 위험한 지점인 4요새에 체류. 6월, 《소브레멘니크》에 「12월의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 в декабре месяце)」이 실림. 8월, 《소브레멘니크》에 「1855년 봄 세바스토폴의 밤(Ночь весною 1855года в Севастополе)」이 실림. 이후 ‘5월의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 в мае)’로 작품명이 변경됨. 세바스토폴의 최후의 방어전에 포병대 지휘관으로 참전. 9월, 《소브레멘니크》에 단편 「벌목(Рубка леса)」을 발표. 11월, 페테르부르크를 방문. 투르게네프, 네크라소프, 곤차로프, 페트, 츄체프, 체르니솁스키, 살티코프-셰드린, 오스트롭스키 등 다양한 문인들과 친분을 맺음.

 

1856년 1월, 《소브레멘니크》에 단편 「1855년 8월의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 в августе 1855года)」을 발표. 작가인 톨스토이의 이름이 실린 최초의 작품임. 1월 9~10일, 폐결핵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둔 형 드미트리가 오룔을 방문함. 같은 달 22일, 형 드미트리가 임종. 2월, 시인 A. A. 페트와 친분을 맺게 된 일을 일기에 처음 기록함. 단편 「눈보라(Метель)」를 탈고. 3월, 중위로 진급. 크림 전쟁이 종식되고 평화 협정이 체결됨. 9월,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수록한 첫 단행본 『전쟁 이야기(Военные рассказы)』 출간. 11월, 군대를 전역함.

 

1857년 1월, 《소브레멘니크》에 『청년 시대』를 발표. 모스크바를 떠나 프랑스, 스위스, 독일을 여행함. 3월, 파리에서 단두대 처형을 목격하고 다음 날 갑자기 파리를 떠남. 5월 23일, “결혼해야 한다. 자신의 안식처에서 살아야 한다.”(일기) 바덴바덴에 체류하던 중 룰렛으로 큰돈을 잃음.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옴. 단편 「루체른(Люцерн)」을 탈고.

1858년 2월, 「알베르트(Альберт)」를 탈고. 5~9월, 야스나야 폴랴나의 농민 아낙인 악시니야 바지키나와 내연 관계를 맺음. 여름, 체조와 농업에 몰두. 12월, 사냥을 나갔다가 곰의 습격을 받음. 「세 죽음(Трисмерти)」과 장편 『가정의 행복(Семейное счасти-е)』을 탈고.

1859년 1월 1일, “올해 결혼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평생 못 할 것이다.”(일기) 5~10월, 다시 악시니야와 관계를 맺음. 10월, 학교에서 농민의 자녀들에게 공부를 가르침(1862년까지).

 

1860년 중편 「홀스토메르(Холтомер)」를 집필하기 시작.(1885년에 완성.) 5월, 악시니야와 계속 관계를 맺음. 형 니콜라이와 세르게이와 함께 외국으로 떠남. 7월, 여동생 마리야와 그 자녀들과 함께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독일, 스위스, 프랑스, 영국, 벨기에를 여행하며 외국의 교육 제도를 시찰함(1861년까지). 9월, 형 니콜라이가 폐결핵으로 숨을 거둠. “니콜라이 형의 죽음은 내 삶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일기) 11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육촌 형제이자 유배지에서 돌아온 제카브리스트인 세르게이 그리고리예비치 볼콘스키 백작을 방문. ‘제카브리스트들(Декабристы)’이라는 제목의 장편을 쓰기 시작함.(1861년까지 매달리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함.)

 

1861년 2월,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러시아 사상가 게르첸과 친분을 맺고 가까이 지냄. 알렉산드르 2세가 러시아에 농노 해방령을 선포. 3월, 브뤼셀에서 프루동과 친교를 나눔. 런던에서 찰스 디킨스의 낭독회에 참석. 4월, 러시아로 귀국. 5월,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발행하기 위해 인가를 받음. 같은 날, 크라피벤스키군(郡) 4관구의 농지 조정인으로 임명됨. 투르게네프의 스파스코예-루토비노보 영지를 방문하여 머물다가 투르게네프와 다툰 후 십칠 년 동안 교류를 끊음.

 

1862년 2월,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 첫 호 발행. 4월, 질병을 사유로 들며 농지 조정인 직무를 사임. 5월, V. 모조로프와 E. 체르노프라는 학생 둘과 함께 사마라 초원으로 ‘마유 치료’를 하러 떠남. 7월, 헌병대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가택 수사를 함. 8월, 톨스토이가 알렉산드르 2세에게 가택 수사에 대해 항의하는 서한을 보냄. 9월, 시의(侍醫)의 딸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1844~1919)와 크렘린 궁의 성모 승천 교회에서 결혼하고, 다음 날 야스나야 폴랴나에 도착함. 10월 1일, “학생들과 농민들과 결별했다.”(일기) 10월 8일, “우리 관계에는 정신적인 면에서 우리를 서서히 갈라놓는 단순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소피야의 일기) 12월 30일, “숱한 생각들, 그래서 쓰고 싶다.”(일기)

1863년 1월부터 《야스나야 폴랴나》를 휴간함. 장편 『전쟁과 평화(Война и мир)』를 집필하기 시작.(1869년 완성.) 2월, 「폴리쿠시카(Поликушка)」를 발표함. 2~5월, 꿀벌과 가금과 양과 송아지와 새끼 돼지를 기르고, 사과나무가 6500그루에 달하는 거대한 과수원을 조성하고, 이웃 지주와 합작하여 양조장을 만듦. 6월, 첫째 아들 세르게이가 태어남.(1947년에 죽음.)

1864년 8~9월, 톨스토이의 첫 번째 선집이 두 권짜리로 출간됨. 10월, 첫째 딸 타치야나가 태어남.(1950년에 죽음.)

1865년 2~3월, 모스크바의 미술 학교에서 조각을 공부. 이후 『전쟁과 평화』의 삽화를 맡게 될 화가 M. S. 바실로프와 친분을 맺음. 6~8월, 지휘관을 구타한 죄목으로 전시 군법 회의에 넘겨진 중대 서기 바실리 샤부닌의 문제에 개입함. 톨스토이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 샤부닌이 8월 9일 처형됨. 11월 27일, “시인은 자기 인생에서 최고의 것을 떼어 내어 작품 속에 넣는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아름답고 삶은 비루하다.”(수첩) ‘1805년’이라는 제목으로 『전쟁과 평화』 1부를 《루스키 베스트니크(Русски-й вестник)》에 발표.

 

1866년 1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Преступление инаказание)』이 《루스키 베스트니크》에 일 년 동안 연재. 톨스토이의 둘째 아들 일리야가 태어남. 4월, 러시아 인민주의 혁명가 드미트리 카라코조프가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함. 11월, 《루스키 베스트니크》에 ‘1805년’의 2부를 발표하면서 제목을 ‘전쟁과 평화’로 바꿈.

1867년 3월, 야스나야 폴랴나에 화재가 일어남. 6월, 형 세르게이가 사실혼 관계인 집시 여인 마리야 시시키나와 정식으로 결혼함. 9월, 『전쟁과 평화』를 위한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보로지노로 여행을 떠남.

1868년 3월, 《루스키 아르히프》에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에 덧붙이는 말(Несколько слов по поводу книги 《Война и мир》)」 발표.

1869년 『전쟁과 평화』의 에필로그를 완결. 5월, 셋째 아들 레프가 태어남.(1945년에 죽음.) 5~8월,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저작에 몰두. 9월 2일, ‘아르마자스의 공포’. 이 순간 중요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을 완전히 소멸시킬 죽음에 대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딱히 이유도 없는 슬픔과 공포와 두려움이 발작처럼 엄습함.

1870년 6월, “난 지금 벌써 엿새째 농부들과 함께 온종일 풀을 베고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군요. 내가 이 일을 할 때 느끼는 감정은 만족이 아니라 행복입니다.”(우루소프에게 보내는 편지) 12월, 페트에게보내는 편지에서 크세노폰과 호메로스를 그리스어 원서로 읽고 있다고 전함. 표트르 대제 시대에 대한 소설을 씀.(1873년까지 매달리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함.) 『읽기 교재(Азбука)』를 저술.

 

1871년 2월, 둘째 딸 마리야가 태어남. 6~8월, 사마라 초원에서 마유 치료를 받음. 9월, 사마라현의 광대한 대지를 헐값에 구입하고 공증을 받음. 러시아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스트라호프를 만남.

1872년 3월, 단편 「캅카스의 포로(Кавказкий пленник)」와 「하느님은 진실을 보지만 빨리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Бог правду видит, да не скоро скажет)」를 탈고. 11월, 『읽기 교재』를 출간. 넷째 아들 표트르가 태어남.

 

1873년 장편 『안나 카레니나(Анна Каренина)』를 집필하기 시작.(1877년에 완성.) 8월, 《모스콥스키에 베도모스치(Московские ведомости)》 제207호에 톨스토이가 사마라의 기근에 대해 쓴 편지가 발표됨. 톨스토이의 발언 덕분에 전국에서 기부가 이루어짐. 4월, 다섯째 아들 니콜라이가 태어남. 9월, 화가 크람스코이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그림. 넷째 아들 표트르가 크루프에 걸려 죽음. 『전쟁과 평화』 개정판을 포함해 톨스토이 전집이 네 권으로 출간. 11월, 톨스토이의 저작집이 여덟 권으로 출간.

 

1874년 9월, 《오체체스트벤니에 자피스키(Отечественные записки)》호에 톨스토이가 쓴 「민중 교육에 관하여(О народном образовании)」가 발표되어 큰 호응을 받음. 12월, 『새 읽기 교재(Новая Азбука)』를 집필함.

1875년 『안나 카레니나』를 《루스키 베스트니크》에 발표하기 시작함. 2월, 다섯째 아들 니콜라이가 뇌수종으로 죽음. 6월, 『새 읽기 교재』를 출간. 10월, 셋째 딸 바르바라가 조산으로 태어나 생후 두 시간 만에 죽음. 소피야의 건강이 위독해짐.

 

1877년 『안나 카레니나』를 탈고. 《루스키 베스트니크》의 발행인인 캇코프와의 불화 때문에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장인 8장을 자비로 출간함. 톨스토이가 소설에서 세르비아 전쟁과 핀란드에 대해 드러낸 시각에 캇코프가 반발한 것이 불화의 원인임. 12월, 여섯째 아들 안드레이가 태어남.

1878년 1월, 『안나 카레니나』를 책으로 출간함. 4월, 파리에 있는 투르게네프에게 편지를 보내 화해를 청함. 5월, 투르게네프가 톨스토이와 화해하고 우정을 회복하고 싶다는 답장을 보냄. 6~8월, 가족들과 함께 사마라 영지에 머무름. 8월, 투르게네프가 야스나야 폴랴나를 방문함.

 

1879년 3월, 바실리 셰골료프를 통해 많은 민담과 전설을 접하게 됨. 훗날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모태로 많은 단편을 씀. 『참회록(Исповедь)』(1882년에 탈고하지만 종교 검열관이 출판을 금지. 1884년 제네바에서 출판.)과 『교조주의 신학에 대한 연구(Исследование догматического богословия)』를 씀. 17세기 말부터 19세기 초를 배경으로 하는 장편을 구상하고 역사 자료를 연구함. 11~12월, 논문 「교회와 국가(Церковь и государство)」, 「그리스도인이 해도 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Что можно и чего нельзя делать христанину)」, 「우리는 누구의 것인가, 하느님의 것인가 악마의 것인가?(Чьи мый? Боговы или дьяволовы?)」를 저술. 12월, 일곱째 아들 미하일이 태어남.(1944년에 죽음.)

1880년 3월, 러시아 작가 V. M. 가르신이 야스나야 폴랴나를 방문. 11월,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을 완결함.(두 해 동안 집필.)

1881년 2월, 도스토옙스키의 부고를 듣고 슬퍼함. 3월,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암살을 당함.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와 함께 러시아 정부가 반동 정책으로 돌아섬. 톨스토이가 알렉산드르 3세에게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테러리스트 혁명가들을 사형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는 서한을 보냄. 알렉산드르 3세는 자신에게 범죄자들을 용서할 권리가 없다고 답변함. 암살자들이 처형됨. 7월, 투르게네프의 스파스코예-루토비노보 영지를 방문.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Чем люди живы)」를 탈고함. 9월, 가족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이주. 10월, 여덟 번째 아들 알렉세이가 태어남.

1882년 1월, 모스크바 인구 조사에 참가함. 2월, 논문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Так что же нам делать)」를 집필하기 시작.(1886년에 탈고.) 7월, 모스크바의 돌고루키-하모브니키 골목에 위치한 저택을 구입함.(현재 톨스토이 박물관으로 운영 중.) 10~11월, 성경을 읽기 위해 고대 히브리어를 공부. 12월, 크라피벤스키군의 귀족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거절함.

 

1883년 1월, 야스나야 폴랴나에 큰불이 남. 3월, 투르게네프가 임종을 앞두고 쓴 편지에서 톨스토이에게 예술을 저버리지 말라고 부탁함. 5월, 재산 문제를 소피야에게 완전히 위임함. 9월,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크라피벤스키군 지방 재판소에서 배심원 직무를 수행하기를 거부함. 10월, 사상과 사회 활동 면에서 톨스토이와 깊은 유대 관계를 맺게 될 블라지미르 체르트코프를 만남.

1884년 1월, 종교론 『나의 신앙은 무엇에 있는가(В чём моя вера)』를 탈고하지만 출판이 금지됨. 톨스토이가 이책을 집필하는 동안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게가 그의 초상화를 그림. 6월, 넷째 딸 알렉산드라가 태어남. 11월, 체르트코프가 민중에게 염가로 책을 보급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포스레드니크(Посредник)’(‘중개자’를 뜻함.) 출판사를 설립함.

1885년 1월, 아내 소피야가 톨스토이의 저작 출판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도맡음. 3월 ‘포스레드니크’에서 처음으로 책들이 출판됨.

1886년 출판사 ‘포스레드니크’를 위해 민중을 위한 이야기들을 씀. 「두 아들과 황금(Два брата и золото)」,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Где любовь, там и бог)」, 「두 노인(Два старика)」, 「세 노인(Три старца)」, 「바보 이반에 관한 이야기(Сказка об Иване-д-ураке)」,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Много ли человеку земли нужно)」 등. 1월, 여덟번째 아들인 알렉세이가 크루프로 죽음. 2월, 러시아 작가인 V. G. 코롤렌코와 친분을 맺음. 3월, 중편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Смерть Ивана Ильича)』을 탈고. 11월, 희곡 「계몽의 열매(Плоды просвщения)」를 집필하기 시작함.(1890년에 탈고.)

 

1887년 술과 담배를 끊기 위해 애씀. 러시아 작가N . S. 레스코프와 친분을 맺음. 1월, 알렉산드르 3세와 그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희곡 「어둠의 힘(Власть ть-мы)」을 낭독. 3월, 《루스키에 베도모스치(Русские ведомости)》 제64호에서 ‘포스레드니크’의 편집자가 작가의 희망에 따라 그 잡지에 발표되는 톨스토이의 모든 저작에 대해 저작권 사용료를 지불하지 않고 자유롭게 출판하기로 했다고 발표함. 8월, 『삶에 관하여(О жизни)』를 탈고.

1888년 담배를 완전히 끊음. 열세 번째이자 마지막 자식인 이반이 태어남. 첫 손주 안나(아들 일리야의 딸)가 태어남.

1889년 8월, 중편 「크로이체르 소나타(Крейцерова соната)」를 탈고. 장편 『부활(Воскресение)』을 집필하기 시작.(1899년에 완성.) 검열관이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출간을 허가하지 않음. 11월, 중편 「악마(Дьявол)」를 기고.

1890년 1월, 러시아와 베를린에서 희곡 「어둠의 힘」을 초연함. 2월, 알렉산드르 3세와 황후가 「크로이체르소나타」를 읽음. 황제는 이 작품을 마음에 들어 했지만 황후가 못마땅하게 여김.

1891년 4월, 발행이 금지된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출판 허가를 소피야가 알렉산드르 3세로부터 받아 냄. 7월, 톨스토이가 1881년 이후의 모든 저작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되 이전 작품들에 대한 저작권은 아내에게 넘기겠다고 발표하려 하자 소피야가 자살을 시도함. 9월, 툴라현과 랴잔현의 기근을 돕기 위한 운동을 조직. 육식과 술을 끊음. 《루스키 베스트니크》와 《노보예 브레먀》에 톨스토이가 1881년 이후의 저작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는 편지를 기고함.

 

1892년 4월, 랴잔현의 네 개 군에 매일 9000명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187개 식당이 문을 염. 7월, 톨스토이와 가족들 사이에 재산 문제로 다툼이 생긴 후 톨스토이가 모든 부동산 소유권을 아내와 자녀들에게 넘긴다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함.

1893년 1월, 희곡 「계몽의 열매」로 러시아 극작가상을 수상. 프랑스 작가인 모파상의 에세이를 위해 서문을 씀. 러시아 연극 연출가 콘스탄친 스타니슬랍스키를 만남.

1894년 러시아 작가 이반 부닌을 만남. 2월, 1881년 이후 저술한 저작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는 톨스토이의 예전 선언을 거듭 확인해 주는 편지가 외국 신문들에 개재됨. 11월,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함.

1895년 2월, 단편 「주인과 하인(Хозяин и работник)」을 탈고. 막내아들 이반이 성홍열로 죽음. 6월, 4000명의 두호보르교 신자들이 병역 거부 운동을 벌이자 당국이 톨스토이를 그 지도자로 지목하며 더욱 심하게 탄압함. 8월,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를 만나 『부활(Воскресение)』의 초고 일부를 건넴. 「어둠의 힘」이 페테르부르크 말리 극장에서 상연됨. 농노들에 대한 체벌에 항의하는 「수치스럽다(Стыдно)」를 씀.

1896년 중편 「하지-무라트(Хаджи-Мурат)」를 집필하기 시작.(1904년에 탈고했으나 작가의 생전에 발표되지 못함.) 10월,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교신자들에게 원조 자금을 보냄.

1897년 2월,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국외로 추방당하는 체르트코프를 배웅. 3월, 모스크바에서 병상에 누운 체호프를 방문함. 8월, 병역을 거부하는 두호보르교 신자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자는 내용의 편지를 스위스 신문에 기고함.

1898년 캐나다로 이민 가는 두호보르교 신자들을 재정적으로 돕기 위해 장편 『부활』과 중편 「신부 세르기이(Отец Сергий)」를 씀. 논문 「예술이란 무엇인가(Что такое искусство)」를 탈고.
1899년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만남.

1900년 희곡 「산송장(Живой труп)」을 씀.(사후에 출판됨.) 작가이자 혁명가인 막심 고리키를 만남. 니체를 읽은 후 그의 도덕적 ‘야만성’을 비난. 11월, 공자를 연구함.

 

1901년 2월,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면을 당함. 9월, 크림으로 요양을 떠남. 1회 노벨 문학상 후보로 당선이 유력했으나 결국 수상하지 못함. 이 결과에 대해 많은 비판이 일자 스웨덴 학술원은 톨스토이의 아나키스트적 성향이 노벨상 이념과 맞지 않아 수상자로 선정하지 않았다고 공식 발표함.

1902년 1월, 톨스토이의 병이 악화되자 고리키와 체호프 가 방문함. 2월, 톨스토이가 앓던 늑막염과 폐렴 증상이 한층 심해짐. 3월, 건강이 점차 호전됨. 5월, 톨스토이가 장티푸스를 앓음. 6월, 톨스토이가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옴. 도중에 하리코프와 쿠르스크의 기차역에서 대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음. 차르인 니콜라이 2세에게 전제 정치 폐기, 이주와 교육과 신앙의 자유, 토지 사유제 폐지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냄.

1903년 1월, 비류코프(톨스토이의 첫 번째 전기 작가가 됨.)의 요청으로 『회상(Воспоминание)』을 집필하기 시작.(1906년에 탈고.) 키시뇨프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에 항의함. 8월, 단편 「무도회가 끝난 후(После бала)」를 탈고. 9월, 논문 「셰익스피어와 연극에 관하여(О Шекспире и о драме)」에서 셰익스피어를 신랄하게 비판함.

1904년 중편 「하지-무라트」를 탈고. 2월, 러일 전쟁이 발발함.(1905년에 종식됨.) 7월, 체호프가 죽음. 8월, 형 세르게이가 죽음.

1905년 단편 「코르네이 바실리예프(Корней Васильев)」와 「기도(Молитва)」를 씀.

1906년 11월, 딸 마리야(결혼 후 성이 오볼렌스카야로 바뀜.)가 폐렴으로 죽음. 노벨상 수상자로 추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부의 뜻을 전함.

1907년 러시아 화가인 일리야 레핀이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그림. 단편 「교회 안의 노인(Старик в церкви)」을 씀.

1908년 1월, 토머스 에디슨이 야스나야 폴랴나에 축음기를 선물함. 5월, 사형에 반대하는 논문 「난 침묵할 수 없다(Не могу молчать)」를 써서 국내외에 발표. 7월, 톨스토이가 비밀 일기를 씀(7월 18일까지). 평소에는 V. G. 체르트코프와 알렉산드라 리보브나(톨스토이의 딸)가 톨스토이의 허락 아래 그의 일기를 정서함.

 

1909년 자신이 죽은 후 저작 전체에 대한 권리를 딸 알렉산드르에게 맡긴다는 유언을 작성. 7월 18일, 아내 소피야가 톨스토이에게 저작 전체에 대한 저작권을 넘기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함. 7월 26일, 소피야가 톨스토이에게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국제 평화 회의에 참가하면 모르핀을 복용하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출석하지 않음. 8월, 스톨리핀 수상에게 사형 제도와 사유 제도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냄. 비서 구세프가 혁명 선동과 판매 금지본 유포의 혐의로 체포되어 추방됨. 9월, 구세프를 추방한 문제로 현 지사와 내무 대신에게 항의함. 영국의 지배를 받는 비참한 상태의 인도에 대해 간디로부터 편지를 받음. 11월, 1881년 이후의 저작권을 체르트코프에게 넘긴다는 유언장에 서명함.

 

1910년

6월 22일, 소피야가 히스테리 증상을 일으킴. 톨스토이가 가출하기까지 그 증상이 단발적으로 계속 이어짐.

6월 25일, 소피야가 아편 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한 척함.

7월 10일, 소피야가 못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

7월 15일, 톨스토이가 은행 금고에 보관한 십 년 동안의 일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며(남편의 일기를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는 문학 작품으로 간주함.) 소피야가 자살 소동을 벌임.

7월 21일, 톨스토이가 그루몬트 숲에서 유서를 최종으로 정서하고 서명함.(톨스토이의 사후에 모든 저작에 대한 권리를 딸 알렉산드라에게 물려주고, 알렉산드라가 사망할 경우 다른 딸 타치야나에게 그 권리를 이양한다는 내용이었음. 톨스토이 사후에 그 저작권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것이 법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형식상 딸들을 저작권 상속자로 삼아 자신의 지적 유산을 민중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고자 함.)

 

7월 28일, 저작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톨스토이의 유언을 무효화하기 위해 소피야가 아들인 안드레이와 레프와 함께 톨스토이를 정신병 환자로 공표할 계획을 논의함.

9월 2일, 톨스토이가 없는 사이에 소피야가 그의 방들에서 ‘체르트코프의 혼을 몰아내기’ 위해 기도식을하고 그의 침실에서 체르트코프의 사진들을 전부 치움.

9월 6일, 소피야가 남편이 최근 들어 지력이 떨어졌다고 주장하며 아들들과 함께 톨스토이의 유언을 거부하겠다고, 차르에게 이 문제의 판단을맡기겠다고 선언함.

9월 23일, ‘프로스베셰니예’ 출판사가 소피야에게 톨스토이의 저작 전체에 대한 사용료로 100만 루블을 제안함.

 

10월 7일, 체르트코프가 톨스토이를 방문한 후 소피야가 히스테리를 일으킴.

10월 28일, 이른 새벽에 주치의 D. P. 마코비츠키와 함께 야스나야 폴랴나를 떠남. 남편이 집을 나간 것을 안 소피야가 못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 했으나 사람들에게 구조됨.

10월 31일, 톨스토이가 병세를 나타내 아스타포보 기차역에서내림. 역장이 자신의 숙사를 제공함.

 

11월 7일 오전 6시 5분, 폐렴으로 임종. 11월 9일, 유언에 따라 야스나야 폴랴나의 오솔길 옆(니콜라이 형과 그가 모든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비밀이 새겨진 녹색 지팡이가 묻혀 있다고 믿은 장소)에 영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