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
그리스어 γνῶθι σεαυτόν 그노티 세아우톤
"(Gnothi Seauton)”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격언으로, 그리스의 여행담 작가인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의 프로나오스(앞마당)에 새겨져 있던 것이라 한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과 신전 여러 곳에 새겨진 문구이며 그 기원을 알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한 격언이라 한다.
물론 소크라테스도 그 중 한 사람이고... 라틴어 'nosce te ipsum ' 영어 Know Thyself
이 경구는 흔히, 다음 6명의 그리스 현자 중 하나의 저작으로 간주된다.
다른 자료에서는 이 격언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인 페모노에 의 저작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는 절제와 자각에 대한 논의인 그의 저작 de caelo(천국으로부터)에서 그리스에 전해지는 다른 경구들과 함께 이 격언을 언급하고 있다(Satire 11.27).
이 격언을 라틴어로는 nosce te ipsum라고 한다.
<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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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철인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글 하나 남기지 않았지만 그는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서양철학(西洋哲學)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삶이나 일화(逸話), 행적(行跡) 등은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등 수많은 제자들의 저서나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소크라테스는 어린시절, 아테네에서 석공(石工)인 아버지 밑에서 석공일을 도우며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인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철학을 구가하며 살던 시기는 기원전 5세기경으로 '아테네 제국(帝國)'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성기와 쇠퇴기가 교차하던 격동의 시기였으며 또한 주변국가와 전쟁이 잦은 때 였다.
소크라테스는 산파(産婆) 일을 하는 어머니와 석공일을 하는 아버지 사이의 넉넉치 못한 집안 형편으로 아버지의 석공일을 도우는 일을 하였다.
가세가 어려운 소크라테스는 늦은 나이 50에 들어서 '크산티페'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처지에 사람들과 길거리 논쟁이나 하며 지내는 남편에 대해 과연 그 부인은 어떠했을까? 크산티페는 돈 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생활력없는 무능한 남편을 버리지 않았음에도 후세는 그녀를 천하의 악처로 별칭하였으니 그 사정도 잘 모르면서 쉽게 말하는 경솔한 세상, 그것은 크게 잘 못된 것이다 하겠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은 소위 '우주(宇宙)의 진리(眞理)'를 탐구하는 넓은 철학이었던 것에 반해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자기 자신의 내면(內面) 진리를 찾는 새로운 철학으로 그 당시 시대상 젊은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이미 40세를 전후로 자신의 철학을 완성, 설파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많은 추종자와 제자가 있었다. 그 가운데 유명한 제자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에 심취한 나머지 자신의 정치적 야망도 포기하고 철학에 빠져든 귀족 출신의 '플라톤'을 들 수 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60세 넘어서 만난 제자였다. 아테네 명문가 출신의 플라톤은 한때 정치적인 야망을 가졌으나 서로 죽고 죽이며 헐뜯고 모함하는 정치판에 환멸을 느끼던차 소크라테스를 만나게 된다. 스무살 젊은 혈기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 철학에 감동받고 깊이 빠져든 것이다.
소크라테스 사후 소크라테스 철학을 이어받고자 플라톤은 오늘날 대학(大學)의 시초인 '아카데메이아'를 설립하여 소크라테스가 많이 등장하는 내용으로 유명한 '대화편(對話篇)'이나 '정치학(政治學)', '윤리학(倫理學)', '형이상학(形而上學)', '인식론(認識論)' 등을 강의하고 저술 하였으며, 그도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의 대가(大家)인 제자를 두었다. 이후에도 아카데메이아는 천년의 세월 동안 학당(學堂)으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소크라테스는 앞이마가 벗겨진 대머리에 눈알이 툭 불거져 나오고 코는 양옆으로 뭉개진 모습으로 당시의 아테네 사람들이 중시하던 외모의 격은 아니었다. 그런 시대.사회에서 유명한 철학자로 명성을 날리며 널리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한창시절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건강한 젊은이면 누구나 당연히 겪어야 하는 군인으로서도 세번의 전장(戰場)에 참전하였으며 전장으로 떠난 것이 그가 유일하게 아테네를 벗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활동 영역을 아테네 밖으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한때는 아테네 민회(民會)에서 '500인회'의 회원(會員)으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도 잠시뿐 자신의 철학 활동 외에는 굳이 관심을 두려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생활과 철학에 충실했던 그가 아테네의 법정(法廷)에서 배심원(陪審員)들의 판결(判決)로 사형(死刑)을 선고 받고 고령 70세에 독배(毒盃)를 마시고 죽음을 맞아야 했을까?
"죄인(罪人)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믿는 신(神)을 인정(認定)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모신 죄와 젊은이들을 타락(墮落)시킨 죄까지 범하였다"
라는 죄의 형벌(刑罰)로 사형에 처해질 억울한 죽음을 앞 둔 스승에게 제자들이 도망을 할 것을 권하였지만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과 법을 지키겠다는 뜻으로 독배를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부터 죽음까지 이른 것을 목격하고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辯論)'에서 밝힌 내용과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의 회상(回想)' 의 책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유죄(有罪) 판결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각각 견해(見解)를 달리한다.
그를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폭압정치(暴壓政治)를 일삼았던 자들도 있어 스승이 그들의 죄를 대신했다는 것이나 법정에서 자신의 혐의에 대해 건방지고 무리한 변론(辯論)으로 배심원들의 미움을 샀다는 이야기는 그 근거는 뚜렷하지 않으나 소크라테스는 새 정권의 실력자 '아뉘토스'의 하수인인 시인(詩人) '멜레토스'에게 상당한 미움을 사게되어 고소(告訴)를 당했고 결국 아테네 법정에 서게 되었다.
360:140,
아테네 법정에서 500명의 배심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유죄와 사형을 확정시킨 것은 배심원들의 다수결(多數決)이다 .
'민주제(民主制)'가 잘 이루어진 아테네는 정치적인 사안이나 법률적인 사안에 '과반수(過半數)' 찬성으로 결정하는 제도를 도입,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수결에는 다수결이 지닌 모순(矛盾)과 소수의 소중한 것들을 간과하는 결함이 있다.
다수결로 소크라테스에게 유죄와 사형을 확정한 것은 그 죄목으로 보아 죄의 무게보다도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와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불쾌한 배심원들의 감정이 개입되어 유죄에 손을 들어주어, 한사람의 생명을 억울한 죽음으로 결과해 버리는 이상한 모순에 빠져버린 것이다. 다수결의 우(憂)를 범한 것이다.
아테네 법정에 참석한 배심원 대부분은 소크라테스가 저질렀다는 죄의 혐의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 앞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느 쪽인지를 보려했으며 다수편으로 기울어 결국 각자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 대세를 따른 결과를 보여준 것이다.
다수결로 결정되는 집단적 민주주의의 모순은 결과에 따라서는 엄청난 실책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법리적(法理的) 판단에는 신중함이 있어야하며 다수결에도 소수의 의견은 반드시 존중되어야하는 것은 마땅하다. 다수결이 어떤 문제를 해결(解決)하는 방법으로 '반드시 좋은 방법'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 하였지만 배심원들은 그의 말을 듣기 보다는 법정 분위기를 이끄는 어떤 세력에 휘둘리렸지도 모른다. 자신의 항변을 듣지도 않고 졸고있는 배심원들을 향해 심하게 꾸짖기도 하였다니...
어쩌면 그는 그들의 미움을 자초(自招)한 측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아테네는 이른바 아테네 사회에서의 지식층을 자처하는 '소피스트'들의 군웅할거로 궤변이 난무하고 지식의 혼란을 가져와 온 나라가 그들의 논리.논쟁으로 들끓고 있던 때인지라 소크라테스의 등장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그만큼 경계의 대상이었고 시기와 미움을 사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미움의 대상은 다수결이라는 집단적 민주주의를 이용하여 '마녀사냥' 하듯 다수의 힘으로 몰아낼 수도 있다.
다수결을 주도(主導)하는 세력이 언변에 능하고 재력과 지지세가 많다면 자신들이 의도하는 방향으로의 결정은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는 것이 다수결의 유혹이며 함정이다.
다수결은 어떤 사안에 대하여 공통적인 의견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때에 가능한 결정 방법, 수단이다. 그러므로 다수결은 민주적이며 비교적 어느정도의 판단에 대한 형평성을 가지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 없다.
하지만 다수결에 집착하여 소수의 중요한 의견을 무시해 버린다면 그 또한 매우 잘못된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결과한 다수결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특히 복잡 다단한 현대 과학 문명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수결 원칙을 수용하되 신중한 판단을 하여야 하고, 동시에 소수 의견도 경청하고 존중하는 세심한 배려도 반드시 따라야 한다.
총체적으로도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며 또 개인은 각각 그 자체로 존엄하고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수결이든 소수 의사든 어떤 사안의 결정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사람사는 세상사 인간사 그 어떤 사안이든 그 판단과 결정 과정은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 그리고 진리와 진실에 바탕하여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논거위에서 신중하고 냉정하게 치우침 없는 절차와 과정을 거쳐 결정이 이루어져야만
그것이 진실로 참된 민주적인 방법이며 민주시민의 민주적인 생활-민주주의 사회라 하겠다.
진리와 진실위에, 합리적인 판단과 결정, 그것이야말로 분명히 절대 다수가 동의하는 결정이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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