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산장의 여인(山莊의 女人)권혜경(權惠卿)

Jimie 2020. 7. 30. 06:10

반야월 선생과 권혜경 여사의

‘산장의 여인(山莊의 女人)’

 

반야월 선생이 노랫말을 쓴 수많은 가요 중에서 권혜경씨가 불러 히트한 <산장의 여인>에 얽힌 이야기다.

 

한때 가수로서 인기절정을 달렸지만, 권혜경씨의 운명은 기구했다.

 

권오명(權五明)

 

<산장의 여인>으로 유명 가수가 된 직후인 1959년 심장판막증 진단을 받은 뒤 '호반의 벤치'와 '동심초'는 병상에서 녹음을 해야 할 정도였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지만 인연이 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련을 이기기 위해 불교에 귀의한 그는 생의 절반 이상을 봉사활동에 바쳤다. '대명화'라는 법명을 받고 70년대 이후 전국 교도소를 돌며 재소자들을 격려해 수많은 수인(囚人)들로부터 '어머니'라고 불리기도 했다.

 

심장판막증, 후두암 등 각종 병마로 평생을 투병하였으며 인생 말년 14년간 충북 청원군 남이면 산촌에 홀로 살다가 2008년  5월 25일 청주 효성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7세.

 

생전에 결혼은 하지 않아 자식은 없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로 시작되는 <산장의 여인>처럼 외로운 여인의 운명-- 한 평생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7myY7OTVB4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에 위치한 국립 마산 병원의 산장 병동을 무대로 한 대중가요이다.

 

<山莊의 女人>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1*♬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2*♬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풀벌레만 애처러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님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히 살아가네.

 

마산 출신의 작사자 반야월은 6ㆍ25 직후 고향 마산에서 위문단을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한번은 국립 마산 병원[마산 결핵 요양소]로 환자 위문공연을 가서 <불효자는 웁니다>를 구성지게 불렀다. 노래를 부르며 보니 하얀 옷을 입고 객석 뒤편에 앉아있는 창백한 얼굴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계속 눈물을 훔치고 있더란다. 그래서 공연 후 사연을 물으니 그녀는 병원 건너편 숲속에 있는 ‘산장병동’에서 요양 중인 폐결핵환자였다.

 

<병사(病舍)와 부속건물의 잔해>

1941년에 상이군인요양소를 설립하면서 '가포 결핵 요양소'가 시작됨

1946년 국립 마산요양원 출범.

 

<국립마산결핵병원 건너편 '산장병동'이 있었던 숲으로 들어가는 길>

울창한 숲 속에는 산장이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작은 건물의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다.

 

▲ 병사에서 멀지 않는 곳에 남아있는 성모마리아상

 

결핵은 오늘 날은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나 당시엔 요양 중 사망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외롭게 투병중인 이 미모의 젊은 여인에게 마음이 끌려 반야월이 써내려간 가사가 <산장의 여인>이다.

 

<한국결핵협회 발간『한국결핵사, 1998년』에 실린 2인병동 카티지>

‘ 山莊의 女人"山莊

 

국립 마산 결핵 병원(가포동)의 본관 건너편 숲속에 있었던

산장은 일제 때 세워진 카티지(cottage)로 2인용 병사(病舍)였다.

이 숲속에는 病舍 10동과 부속건물들이 있었는데, 1950년대 후반에 모두 철거된 뒤 지금은 잔해만 남아 있다.

 

 

<산장의 여인>은 마산 결핵 병원에 입원한 적 있었던 작곡가 이재호 [1914~1960]에게 넘겨져 곡으로 완성되었다. 이재호는 그 자신이 마산결핵병원에 요양했던 일도 있고 한쪽 폐를 잘라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니 반야월의 가사가 더욱 가슴에 와 닿았을 것이다.

 

1957년 KBS 중앙 방송국의 전속 가수 권혜경이 <산장의 여인>을 불렀고, 음반으로 제작되어 널리 사랑받게 되었다.

 

권혜경씨는 자신의 인생 역정이 <산장의 여인>의 가사와 너무 비슷해 이 노래의 작사자를 원망하기도 했다고 한다.

 

 

‘노래가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는 말도 나왔다. 그녀는 ‘열렬한 연애를 한번 해 보는 게 꿈’이라고 했으나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전국의 재소자 시설을 찾아다니며 위문과 강연 등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다.

 

재소자들로부터 ‘어머니’라 불렸다. 이 같은 봉사활동으로 1982년 세계 인권 선언 기념일에 ‘인권유공표창’을 받는 등 많은 상을 받았다.

 

1931년 강원도 삼척 출신인 권혜경이 마지막으로 산 곳은 충북 청원군 남이면이다.

그녀는 여기에서 1994년 5월부터 2008년 5월 눈 감을 때까지 14년을 살았다.

세상 떠나기 3년 전쯤 이곳을 찾아온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서씨에게 자신의 묘 앞에 <산장의 여인> 노래비를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집안의 냉장고에는

‘나 죽으면 연락해 주세요.

손성미, 전화 02) 907-XXXX'

이라고 쓰여진 메모지가 한 장 붙어있었다.

*손성미는 셋째언니 딸로 서울에 사는...

 

산장의 여인(山莊의 女人) 권혜경(權惠卿)씨는 2008년 5월 25일 영면했다.

 

1994년 5월 충북 청원군 남이면의 농촌에 정착하여 2008년 5월 타계할 때 까지, 인생말년 14년간 그녀는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 외로운 이 산장에'로 시작되는 그녀의 히트곡 '산장의 여인' 노랫말처럼, 홀로 적적히 쓸쓸한 노년을 살다가 '첫사랑의 화원'처럼 꽃 피고 새 울던 어느 봄날, 2008년 5월 25일, 쓸쓸한 운명의 길 따라 외로히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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