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대사 선시(西山大師 禪詩)
서산대사(1520~1604)는 조선 선조 때 고승(高僧)으로 속성은 최 씨, 1520년(중종 15)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태어났다.
▷ 서산대사(西山大師: 1519-1604)
조선 중기 승려·승병장. 속성은 완산 최씨(崔氏), 이름은 여신(汝信).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서산대사(西山大師)·풍악산인(楓岳山人).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양부(養父) 이사증(李思贈)에게서 자랐는데, 과거에 낙방하자 지리산에 입산, 숭인(崇仁)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일선(一禪)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그 뒤 영관(靈觀)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1549년 (명종 4) 승과에 급제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고 보우(普雨)를 이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56년 승직을 그만두고, 금강산·묘향산 등지를 편력하였다. 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에 연루되었다는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승병(僧兵)을 모집하였다. 이때 제자 유정(惟政;사명대사)은 금강산에서,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승군을 모았고 자신은 문도 1500명을 모아 이를 총지휘하여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고, 한양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俊敎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의 직위에 올랐다.
1594년 유정에게 병사(兵事)를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成寂庵)에서 여생을 보내다 세속 나이 85세로 입적하였다. 그는 교(敎)를 선(禪)의 과정으로 보아 선종에 교종을 포섭함으로써 선·교를 일원화하였으며, 유(儒)·불(佛)·도(道)가 궁극적으로 일치한다는 삼교통합론의 기원을 이룩하였다. 제자 가운데 유정·언기(彦機)·태능(太能)·일선(一禪) 등은 휴정 문하 4대파를 이루었다. 해남(海南) 표충사(表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청허당집(淸虛堂集)》, 편저로 《선교결(禪敎訣)》 《선교석(禪敎釋)》 《운수단(雲水壇)》등이 있다.
서산대사는 갑진년(甲辰年) 1월 23일 입적하기 전에 유촉하기를 '내 의발(衣髮)을 해남 대흥사에 전하라"하였다. 제자들의 말하기를 "문도가 1천여 있고 묘향산 또한 명승인데 어찌하여 벽지해우(僻地海隅)에 전하라 하십니까?"하니 서산대사가 말하기를 "하나는 그곳이 기화이초(寄花異草) 편시광경(片時光景)하고 포백숙율(布帛菽栗)이 항구하며 월출산과 달마산 천관산 선은산이 위호(圍護)하고 수류구곡(水流九曲)하니 만세불훼(萬歲不毁)의 땅이요, 하나는 왕화미급(王化未及)의 땅이라 나라의 관심을 받으라는 것이며, 하나는 처영(處英) 및 제자들이 모두 남녘에 있고 내가 출가한 곳이니 소귀처(所歸處)함이 당여하지 않겠나"하였다.
踏雪歌 (눈길을 걸을 때) /서산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제
不須湖亂行 (불수호란행) - 행여 어지러이 걷지 말지라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은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 마침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悟道頌 (오도송) / 서산대사
髮白非心白 古人曾漏洩
발백비심백 고인증루설
今聞一聲鷄 丈夫能事畢
금청일성계 장부능사필
忽得自家處 頭頭只此爾
홀득자가처 두두지차이
萬千金寶藏 元是一空紙
만천금보장 원시일공지
머리는 세어도 마음은 안 센다고 옛사람 일찌기 말했던가.
이제 닭 우는 한 소리 듣고 장부의 큰 일 능히 마쳤네.
홀연히 본 고향을 깨달아 얻으니 모든 것이 다만 이렇고 이렇도다.
수많은 보배와 같은 대장경도 원래 하나의 빈 종이로다.
청허 휴정(1520~1604),최여신은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양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1534년 진사 시험에 떨어진 뒤 지리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어느 때 남원의 한 마을을 지나다 문득 닭 울음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닫는다.
그 뒤 승과에 급제하여 봉은사 주지가 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임진왜란이 일러나자 73세의 나이로 승병을 모집하여 서울을 되찾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선종과 교종으로 분리된 불교를 통합하는 데 힘썼으며 삼교통합론을 내세워 유.불.도교를 하나로 합치려는 노력을 하였다.
숭유억불 치하, 배척받던 조선 불교가 잠시 부흥한 것은 명종 때 집권 소윤세력이 배출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시기다.
승려 보우(1509~65)는 왕즉불(왕이 곧 부처다) 논리를 통해 불교의 생존을 도모했다. 왕과 국가에 충성하고 유교체제에 순응하는 그의 유불동조론은 권력밀착형 불교로 훗날 두고두고 논쟁 대상이 됐지만, 왕실 후원을 발판 삼아 보우는 불사를 일으키고 승려들에게 도첩을 발급하고 승과를 부활시켰다.
그 승과에 급제하며 등장한 인물이 훗날 서산대사로 널리 알려지는 휴정(1520~1604)이다.
“물 길어 돌아오다 홀연 고개 돌려 보니 / 수없이 많은 청산은 흰 구름 속에 있구나.”
성균관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18살의 유학도 최여신이 불법을 접하고, 문자를 떠난 오묘한 경계를 깨달아 승려 휴정으로 거듭나면서 읊었다는 오도송(悟道頌)이다.
1551년 휴정은 승과 급제 뒤 3년 만에 교종판사에 이어 선종판사가 됨으로써 조선 불교의 선·교 양종을 총괄하는 최고 직위에 오른다. 1557년 그는 직책을 다 내놓고 다시 7년여 만행의 길에 나선다. 휴정에게 그 7년은 어떤 세월이었을까?
<선가귀감, 조선 불교의 탄생>을 쓴 고전문학자 김풍기 교수(강원대 국문과)는 그 당시 휴정의 심정은 “착잡함 그 자체였을 것”이라고 적는다.
보우는 휴정이 내놓은 양종 판사 직을 다시 맡아 불교 사업을 통괄하던 중 1565년 제주로 귀양을 갔다가 장살당한다. 다시 불교는 암흑시대를 맞는다.
거센 척불의 시대. 휴정의 삼교융화론은 바로 이런 고심 끝에 나온 것이다. 동아시아 전통 속에서 ‘유·불·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시대 흐름에 맞춰 발현됐는데, 비록 표면 모습은 다를지라도 지향하는 최종 목표는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보우의 왕즉불 논리와는 크게 다른 입장이었다. 유·불 종지가 궁극적으로 같다고 하는 태도 때문에 유불회통론으로도 불린다. 지은이는 유불회통론은 불교 생존을 위해 휴정이 전략적으로 선택한 논리라고 본다.
휴정은 유불회통론을 내세우면서 그 일환으로 책을 편찬했는데, 그것이 7년여 만행 끝에 1564년 내놓은 <선가귀감>(禪家龜鑑)이다. <선가귀감>은 휴정이 <유가귀감>, <도가귀감>과 함께 묶어 편찬한 <삼가귀감>의 하나로 집필됐다.
<선가귀감>은 기본적으로 출가수행자들의 발심을 일으키기 위한 입문서다. 참선 수행과 교학 공부, 염불 수행의 필요성, 선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불교 수행의 첫걸음을 떼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지도가 될 수 있도록 구성됐다. 간화선을 중심고리 삼아 염불 수행이 선과 이어질 수 있는 이론적, 실천적 태도를 구축했다.
<선가귀감>은 집권 유학계의 논리적, 현실적인 탄압 속에서 “휴정이 후학들을 위해 화답한 새로운 불교”였다. 사찰이 없어지고 지식층 승려가 급감하고 승려 지위가 천민으로 떨어지는 동안 불교계는 어떤 대응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상황을 휴정은 진리에 대한 열망과 수행, 불교 현실에 대한 가혹한 자기비판으로 극복하려 했다. 그렇게 조선 후기 불교계는 휴정 중심으로 재편됐고, “불교는 무종단 산중불교의 오명을 벗고 새로운 조선 불교로 탄생”하게 되었다.
척불 현실과 대결한 휴정의 논리는 그 문하에 정관일선, 소요태능, 사명당 유정, 편양언기 등의 제자로 그 법맥이 발현되면서 조선 후기 불교의 새 판도를 짰다.
휴정은 1604년 1월 23일 묘향산에서 제자들을 모아 설법하고 시를 쓴 뒤 가부좌를 한 채로 入寂한다.
대사가 남긴 시다.
“팔십년 전에는 네가 나였는데/ 팔십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나더니 팔십 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西山大師 사리가 안치된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浮屠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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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많은 절을 짓고 탑을 세웠으며 불전을 간행하고
불교교단을 후원하여 왔다. 내 이런 공덕이 얼마인가?”
“아무 공덕이 없소.”
“그렇다면 어떤 것이 성스러운 진리의 제일 법칙인가?”
“진리는 확연하여 아무것도 성스러울 것이 없소.”
“도대체 나를 맞대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모르오.”
달마와 양무제와의 첫 만남에서 나눈 짧은 문답.
달마는 곧바로 갈대를 꺾어 타고 양자강을 건너 숭산 소림사로 들어간다.
소프라노 박순복
“머리털 세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옛 사람이 일찍이 말하였다./
닭 울음소리 한번 듣고 대장부 할 일을 능히 마쳤도다./
홀연히 자기 집을 얻고 보니, 모든 것이 다만 본래 이러할 뿐/
천만금의 보배창고도 원래 한 장의 '빈 종이' 라네.”
서산대사 열반송(해탈시)
千計萬思量 천 가지 계획 만 가지 생각
紅爐一點雪 붉은 화로 속 한 점 눈송이
泥牛水上行 진흙 소가 물 위를 가나니
大地虛空烈 대지와 허공이 갈라지도다
1604년 1월 23일 세수85세 입적(入寂)
해남 두륜산 대흥사
서산대사 부도
서산대사 부도비
묘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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