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강 시씨(浙江施氏)는 중국에서 유래된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시문용(施文用)은 명나라 장수로 임진왜란 때 참전하고 조선에 귀화하였다.
-인구(2015년) 2,011명
절강(浙江)은 중국 동남부 동해 연안에 위치하여 양자강 하류의 남부를 점하고 있으며 전당강에 의하여 동서로 나누어져 항주(杭州)를 성도(省都)로 하고 있다.
시씨(施氏) 는 본래 중국 오흥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주나라 경왕(敬王:제26대 임금, 재위기간: BC 519 ∼ 476) 때 성유(聖儒) 공자(孔子)의 제자였던 시지상(施之常)의 후예로 전한다.
//시씨(施氏)는 원래 희(姬)라는 성으로 약3800년전 중국 은나라 7민족의 하나로 내려오다 약3100년경 희창(姬昌)은 주역(周易)을 썼고 역사에 유명한 사람이며 나중에 아들 희발(姬發)이 주(周)나라를 세워 이가 무왕이며 희창은 문왕(文王)에 추대 되었고 문왕의 9대손 노혜공(魯惠公)의 아들로부터 시씨(施氏)로 내려오며 노혜공의 8대손이 공자 72제자 중의 한분인 시지상(施之常)이고 중국 삼국지 저자 라관중의 스승이며 수호지 저자인 시내암 등이 있고 현재 중국 대만 홍콩 등 십여개 국가에 사는 시씨들이 모여 세계 시씨 종친회를 만들어 장학 경로 사업 등을 대대적으로 하여 한국도 가입할 예정으로 있다 .//
우리나라 시씨의 연원인 시조 시문용(施文用, 1572년 ~ 1623년)은 명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 을 지낸 시윤제(施允濟)의 아들로, 조선 선조조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명군 마귀(麻貴) 제독 휘하의 유격중군(遊擊中軍)으로 참전 유격장군 람방위(藍芳威)의 행영중군(行營中軍)으로 합천(陜川) 등지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치는 등 7년간 참전했던 무장(武將)이다.
// 1차 이여송이 나와 평양 등을 수복했고 5년뒤 정유재란 때는 시윤제가 아들 시문용을 장군으로 파견하여 1597년 6월 천명의 절강성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마귀(麻貴) 제독을 따라 나와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도 말하는 9월 직산 (소사평)전투에 참전하고 12월 울산전투에 참전하여 절강병이 전공을 세운 기록이 있고 1598년1월. 람방위(藍芳威)가 3300명의 절강성 군사를 거느리고 추가로 나오자 시문용은 이 부대를 실질적으로 통솔하는 행영중군(行營中軍)으로 편성되어 공주 공산성에 주둔하였는데 후세 백성들이 당시 군대가 공산성에 주둔하며 왜적을 막아주고 민페가 없었다고 송덕비를 세워 현재 삼장비가 공산성에 남아있다 .//
시문용(施文用)은 전쟁이 끝나고 명군이 철수될 때 어깨의 큰 부상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경북 성주에 정착하여 정인홍의
주선으로 합천의 창녕장씨(昌寧張氏) 장함(張涵)의 딸과 혼인하여 시영건(施永建)과 시영달(施永達)을 두어 절강 시씨의 양대산맥을 이루게 하였고, 본향지인 중국 절강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시문용은 풍수에 능통한 장수로 영의정(領議政) 정인홍(鄭仁弘)의 추천으로 선조 3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에 제수되었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나 정인용이 실각되자 성주로 돌아와 학문연구에 전력했다.
특히 시문용은 의학과 병법에 조예가 깊어 『병학기정兵學奇正』과 『의복결유醫卜訣有』·『감여지남堪輿指南』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문하에 훌륭한 학자를 많이 배출하여 문명을 떨쳤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인조가 삼전도(三田度: 지금의 송파구 송파동에 있던 한강 상류의 나루터)에 수항단을 쌓고 청나라 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한 후, 청태종이 조선에 남아있는 명나라 유민들을 모두 체포하여 강제 송환을 시키려할 때 문용은 성주군 용암면 문명동 군성산 기슭에 은거하며 청나라에 망한 모국 명나라의 재기를 기원했다.
영조대에 이르러 당시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임진왜란 참전용사> 후손들의 생활상을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하자 영조는 시문용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하고 ‘시문용 후손들을 천역(賤役)의 명단에 이름을 두지 말라.’고 조세와 부역을 면하게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가맥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영조 때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지낸 유정(有鼎)과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한 유영(有榮)이 유명했으며,
정조때 시문용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93년(정조 17년) 그의 자손들을 녹용(錄用)하였다.
한익(漢翼)은 정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에 올라 문장으로 명망이 높았던 치황(致璜)·정석(廷錫)·영석(暎錫)·민식(敏植)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쳐 절강 시씨를 더욱 빛냈다.
//정조17년9월2일 시문용의 후손 유영과 한익을 경비를 지급하여 한양으로 올려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이때 시문용의 사손(嗣孫)유영(有榮)에게 선전관 한익(漢翼)으로 훈련을 시킨후 무과 훈련원 첨정(僉正)의 벼슬을 내렸으며 시문용의 후손으로 매년황단망배(皇壇望拜)에 참례 하도록 명하였다 그후 5년뒤 교서(敎書)를 성주 정당(政堂)에 계시하여 영구히 준수 하도록 하였다 .//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절강 시씨는 남한에 총 526가구, 2,2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가구수 675호와 인구수 2,121명으로 286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155위이다.
절강시씨 항렬표 (浙江施氏 行列表)
世 | 行列字 | 世 | 行列字 | 世 | 行列字 |
9 | 錫(석) | 10 | 潤(윤) | 11 | 植(식) |
12 | 炳(병) | 13 | 奎(규),基(기),埈(준) | 14 | 鎭(진),鍾(종) |
15 | 淵(연) | 16 | 17 |
<풍천재기>
석성이 병부상서(국방부 장관)일 때 병부시랑(국방부 차관)은 시윤제였다. 시윤제는 시문용의 아버지였다. 이는 정신(鄭藎)의 <풍천재기>에도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임진년(1592)에 왜노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거늘 선조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피란할 때, 나의 종선조(從先祖, 집안 선조)인 서천군(정곤수)이 왕명을 받고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러 갔다.'로 시작되는 <풍천재기>의 중간 부분을 읽어본다.
'(정곤수 등이 원병을 요청했을 때) 명나라 대신들이 듣지 않았다. 병부시랑(국방차관) 시윤제가 우리나라 사신과 관사에 함께 머물면서 힘을 다해 주선하였다. 이 때문에 지원병이 우리나라에 와서 신속히 섬오랑캐들을 쓸어내어 다시 나라를 회복하게 되었으니 시공(시윤제)의 힘은 진실로 많았다. 공의 아드님 문용이 당시에 도사관(都司官)이 되어 중군(中軍)의 행영(行營)으로 4년 동안 종군하면서 여러 번 기이한 공을 세웠으니, 그 또한 위대한 일이었다.
명나라 군대가 철수할 때 공(시문용)은 동방(조선)에 오래도록 태평의 기운이 있다 하여 드디어 머물러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살면서 마을 이름을 대명(大明)이라 하고,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배전(拜奠, 절하고 제사지냄)의 예를 행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오래도록 첨망(瞻望, 바라봄)할 곳으로 삼아 머리를 흐트리고 왼쪽으로 옷깃을 여미는 오랑캐의 풍속으로 변하지 않고, 명나라의 옛모습을 보전한 지 어언 200년이나 되었으니, 공의 처음 가진 선견(先見, 앞날을 내다봄)이 아니면 어찌 이러할 수 있겠는가?' (<성주 누정록>의 번역문 인용)
절강 시문용(浙江施文用)의 유허비 [遺墟碑]
풍천재(風泉齋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문명리 1258번지, 대명마을뒤 산기슭 )입구
풍천재는 1834년(순조 34). 유허비는 1835년에 건립됨
시문용(우측),서학(좌측)의 유허비
절강 시문용의 묘(浙江施文用之墓)
소재지 : 경북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아래맏질 뒷산
대종묘사
일시:음력 10월 첫째주 일요일 10:00
장소:경북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아랫맏질(시조할아버지 산소)
'The Story from M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삷을 白 (0) | 2021.09.12 |
---|---|
성주(星州) 수륜면(修倫面) 형곡동(兄谷洞)노시가(老施家) (0) | 2021.06.21 |
절강 시효열 (浙江 施孝烈) (0) | 2021.06.06 |
금오(金烏), 내 마음의 山 (0) | 2021.06.01 |
대관령 길손~ 추억은 미련으로~, (0) | 2021.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