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y from Me

성주(星州) 수륜면(修倫面) 형곡동(兄谷洞)노시가(老施家)

Jimie 2021. 6. 21. 14:44

대명단(大明壇)

성주군 용암면 문명리 대명동 소재

매년 봄이면 성주 고령 대구 등지에 사는 절강 시씨와 서씨 후손들이 모여

나라 사랑하는 숭고한 뜻을 이어 받기위해 4배의 의식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위 대명단은 인조14년에 시문용과 유격파총 서학장군과 같이 군성산 아래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면서 두 분이 단을 조성하고 삭망으로 단에 올라 조국중흥을 기원한 단이며 시인 이은상씨 등 많은 사람들이 시문용의 조국 사랑하는 충정을 기리는 글도 썼다.

 

과거엔 왕이나 유명인이 살면 지명이 바뀌듯 이때부터 마을 이름이 대명동이 되었다. 이후 세상이 조용해지자 시문용은 본래 실던 수륜면 보월동으로 가서 살다가 72세로 별세하여  마을 뒷산에 묘소가 있고, 서학은 이 마을에 절강서씨 시조가 되어 정착하여 후손들이 살고 있다

 

 

시문용 시조께서 사시던 곳 노시가(老施家)를 아시나요

시천수  09.12.13 20:24

 

약 400여년전 시문용께서 정인홍의 도움으로 합천군 가야면 야천동으로 장가를 가시고 1601년 합천에서 성주군 수륜면 형곡동(보월동)에 와서 사시며 큰 아들을 낳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보월동에서 자리를 잡고 사신 곳이 어디였을까?

 

이를 조사해 본 결과 시씨들의 과거 집성촌인 고령군 운수면 화암동 에서 성주군 수륜면 보월동(형곡동)을 가려면 먼저 화암동에서 대가천의 작천교를 건너서 200 여 미터 쯤 가면 전 전두환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의 생가라고 잘 알려진 *남은동(南隱里) 마을이 있으며, 마을을 우측으로 돌아 작은 개울 다리를 건너면 그곳이 보월동(형곡동) 1동이며 현재 시씨들이 사는 마을은 보월2동이다.

 

다리를 건너면 집들이 몇가구 살고 있고 우측으로 100여 미터쯤 가면 서남향으로 산세가 잘 내려와 있으며 그 곳에 지금은 폐교가 된 학교(월남초등)가 있다.  이곳 주위를 보월1동 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거의 노시개 라고 부른다. 사연을 들어본즉 과거 시문용께서 사실 때 시씨 노인이 사시는 집이 있다는 의미로 노시가(老施家)라고 불러 왔으며 지금은 부르기 좋게 노시개라고 부른다한다. 정확한 위치는 알수 없으나 보월1동에 사신 것이 확실하며 지리를 중시하는 분이시라 그 주위에서 산세 등이 제일 좋아 보이는 학교 자리일 것으로 추측 된다.

 

(과거에는 왕이나 유명한 사람과 관계가 있으면 동명도 바뀌고 지명도 바뀌며 지나만 가도 지명이 바뀐 예도 너무 많음)

참고, 지금까지 과거 기록대로 형곡동이라 했으나 현재 행정상 정식 동명인 보월동으로 불러야 하겠다.

 

 *산 아래에 하우스가 보이며 그 뒤에 폐교가 된 초등학교 건물이 있다

 

*남은동(南隱里)은 지사면(志士面)의 으로 존재했으나 1934년 4월 1일 수륜면 남은리(법산 法山마을)로 개편되었다.

 

 

모명재(慕明齋)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에 있는 시문용의 재실.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보월로 127.

 

절강 시문용의 묘(浙江施文用之墓)

소재지 : 경북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아래맏질 뒷산

 

시문용을 평생 모시던 마부의 묘를 아시나요

시천수 추천 0 조회 51 09.05.11 16:24

 

경북 성주군 수륜면 보월동 뒷산에 시문용의 묘가 있고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보러 온다.

 

생전에 왕실 풍수로도 있었으니 자기 묘 자리는 어떤 곳에 마련했는지 보러 오는 사람들이다.

 

인조반정으로  고향에 돌아와 살던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14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할 때 조선에 나와 있는 명나라 장수들을 잡아 보내라는 청 태종의 요구가 있자, 성주군 용암면 군성산으로 들어가 은거하게 되었다. 군성산정에 대명단을 쌓고 조국의 중흥을 기원하면서 많은 저서를 남기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형곡동에 자리잡고 여생을 보낸 후 형곡마을 뒷산, 지금의 묘지에 영면하다.

 

그런데 시문용의 산소로부터 50여m아래 자그마한 무덤이 하나 있으니 이 무덤은 중국에서부터 따라와 평생 시문용을 모시던 마부의 무덤이라고 전해온다. 죽어서도 상전의 무덤아래 묻혀졌고 누구 돌보는 이 없는 외로운 묘이다. 해마다 시문용의 묘사때는 시씨들이 한잔 술을 부어놓고 그의 영혼을 달래주고 있다.

뒤편으로 보이는 묘가 시문용의 묘이며

아래의 묘는 당시 이역만리 중국에서 따라와 시문용을 평생 모신 마부의 묘이다.

 

* 보월리(甫月里)

보동(甫洞)과 월촌(月村) 마을을 이름하는 보월리(甫月里)는 까치산에서 흐르는 계곡이 대가천에 합류하는 부위를 중심으로 별뫼(星山,230m )와 달뫼(月山,200m)주변과 그 북쪽에 위치하면서 탑안(塔內.洞), 새터(新基,새뜸), 보동(甫洞,보리골, 귀암, 귀만), 월촌(月村), 웃맏질(上兄谷) 아래맏질(下兄谷) 로 구성되어 있다.

탑동에는 5.1m 높이의 통일신라시대 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19호)이 있고 월촌에는 폐교된 월남초등학교가 있었다.

성주보월동삼층석탑 [星州甫月洞三層石塔]

 경북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852

넓은 절터에 많은 석재들이 산재하고 있어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임.

 

 

경상북도(慶尙北道) 성주군(星州郡) 수륜면(修倫面) 보월리(甫月里)

웃맏질·상형곡(上兄谷) / 아래맏질·하형곡(下兄谷)

 

수륜 형곡동(兄谷洞) 마을은 북쪽으로는 용암면 상신리와 접하고, 남으로는 고령 운수면과 접한다.

중국의 春秋時代 施伯의 후손인 明나라의 行營將軍 施文用이 壬辰倭亂 때 援軍으로 왔다가 戰後에 이곳에 정착함으로써 逝江 施氏의 集姓마을을 형성하였다. 이곳에 살던 형제 중 아우가 분가하여 아래 마을로 내려가게 되자 형이 살던 곳을 兄谷이라 하였다.

그후 세대가 늘어남에 따라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上兄谷, 혹은 웃맏질이라고 하고, 동생이 분가해 나간 곳을 下兄谷, 혹은 아래맏질로 구분하여 부르게 되었다.

 

현재 맏질에는 逝江 施氏 12호 25명, 星州 李氏 7호 15명을 비롯한 29가구, 60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 미작중심의 농업을 영위하였으나 근래에 들어와 참외농사 6호, 축산농 5호가 나타나게 되었다.

 

형제는 시문용의 아들 영건과 영달 형제를 지칭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