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연오랑(延烏郞) 과 세오녀(細烏女)

Jimie 2020. 5. 31. 05:46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東海面)

 

                                                                     연오랑(延烏郞) 과 세오녀(細烏女) 전설

 

《삼국유사》(권1, 〈기이〉1, 연오랑 세오녀) 및 《필원잡기》(권2)에 수록되어 전하는 설화이다.

원전은 고려 이전의 문헌인 《수이전》에 실려 있었다고 여겨지며, 태양신(太陽神)에 관한 한국의 신화일본 태양신 신화와의 비교연구가 주목되고 있다.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는 《수이전》에 원전을 두고 있었다고 여겨지나 《수이전》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의 일본 도래는 아달라왕대 신라에 있던 일부 정치세력 집단의 일본 이주를 뜻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본에 있는 비슷한 신화로 일본서기, 고서기의 천일창(아메노히보코) 신화와 가야 왕자 쓰누가 아라시토 신화가 있다.

포항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A)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

 오랑 세오녀

 

연오랑과 세오녀는 박인량이 지은 《수이전》에 나오는 설화이다. 《수이전》은 전하지 않으나 이 설화는 《삼국유사》와 《필원잡기》에 실려 전해졌다.

 

오랑 세오녀 설화는 전한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이사금 )즉위 4년(157년) 동해(東海)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랑이 미역을 따러 바위에 올라섰다, 바위(귀신고래라는 설이 있다)가 움직이더니 연오랑을 싣고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연오랑을 본 일본 사람들은 그를 신이 보냈다 여겨 왕으로 섬겼다. 세오녀는 남편을 찾다가 마찬가지로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신라에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고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말에 따라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청했으나 연오랑은 하늘의 뜻이라며 돌아 갈 수 없다 하고 세오녀가 짠 고운 비단을 주며 이것으로 제사를 지내라 하였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내니 다시 해와 달이 빛났다.

 

이때 제사를 지낸곳이 영일현[迎日縣:지금의 포항시(이전 영일군)]이다.

 

연오는 태양 속에 까마귀가 산다는 양오전설(陽烏傳說)의 변음으로 볼 수 있고, 세오도 쇠오, 즉 금오(金烏)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연오와 세오의 이동으로 일월이 빛을 잃었다가 세오의 비단 제사로 다시 광명을 회복하였다는 일월지(日月池)의 전설과 자취는 지금도 영일만에 남아 있다.

출처 : <위키백과 >

귀비고(貴妃庫)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전시관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

 

 

157년(아달라 4) 동해안에 살던 연오랑은 바닷가에서 해조를 따다가 갑자기 바위가 움직이는 바람에 일본에 건너갔다. 이를 본 왜인들은 연오랑을 비상한 사람으로 여겨 왕으로 삼았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그를 찾아나섰는데 남편의 신이 바위 위에 있었다. 바위에 올라갔더니 바위가 움직여 세오녀도 일본에 가게 되었다.

 

이에 부부는 다시 만나고 세오녀는 귀비(貴妃)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일관(日官)은 우리나라에 있던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일본으로 가버려서 생긴 괴변이라 했다.

 

왕이 일본에 사자(使者)를 보냈더니 연오랑은 세오녀가 짠 고운 비단을 주며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된다고 했다. 신라에서 그 말대로 했더니 해와 달이 빛을 찾았다. 이에 왕은 그 비단을 국보로 삼고 비단을 넣어둔 임금의 창고를 귀비고(貴妃庫),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 했다.

 

연오랑세오녀문화공원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호미로 3012

 

연오랑과 세오녀

연오는 태양 속에 까마귀가 산다는 〈양오(陽烏)전설〉의 변음으로, 세오도 쇠오, 즉 금오(金烏)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니혼쇼키 日本書紀〉의 〈천일창설화 天日槍說話〉도 태양신화이다. 

일본에서 신이 된 신라인들,

신라의 왕자 연오랑- 골정왕(骨正王)[아메노히보코 アメノヒボコ;天日槍]과 부인 세오녀 [아카루히메アカルヒメ; 赤留比賣, 赤玉女]

일본에 농작법과 철기문화, 제천사상 등 문화, 문명을 전파한 신라인들...지금도 남아 있는 그 발자취...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연오랑과 세오녀는 박인량이 지은 《수이전》에 나오는 설화이다. 《수이전》은 전하지 않으나 이 설화는 《삼국유사》와 《필원잡기》에 실려 전해진다.

 

 

-경북일보 <연오랑과 세오녀> 기사에서 발췌-

 

일본의 10월은 간나츠키(神無月)라고 했다. 매년 10월이 되면 전국의 신들이 시마네현(鳥根)으로 모이는데 그 장소가 이즈모다이샤(出雲大社)다. 이렇듯 전국의 신이 한 곳에 모이다보니 다른 지역에는 당연히 신이 없다. 신이 오는 세 갈래 길을 따라 연오랑 세오녀도 여기에 와 있을 것이란 궁사의 설명을 들었다.

 

세오녀를 모신 사당. 비단짜는 신으로 받들어 지지만 아픈사람을 치유하는 영험도 있다고 한다

 

일본에 있는 '귀한 여인의 섬'을 뜻하는 '히메지마(姬島)' 섬 이야기가 떠올랐다.

일본 큐슈(九州)동쪽 쿠니사키(國東)반도 끝 자락에서 6㎞ 더 간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총 6.85㎦, 둘레 17㎞의 작고 아름다운 섬.

 

세오녀를 모신 사당. 비단짜는 신으로 받들어 지지만 아픈사람을 치유하는 영험도 있다고 한다. 이곳을 특별히 보물섬이라 하는 것은 흑요석(黑曜石)이 나기 때문이다. 검고 단단한 유리를 닮은 흑요석은 화살촉, 칼날, 도끼날 등을 만드는데 사용한 고대의 중요한 석재였다는 것이다.

 

무쇠가 생산되기 전에는 무쇠촉, 무쇠칼, 무쇠도끼 등을 대신해 긴요하게 쓰인 생활도구와 무기의 원자재였으나 우리나라에는 흑요석이 나지 않았다. 때문에 히메고소라는 신라 여인은 한반도에 없는 귀한 흑요석을 찾아 일본 히메지마까지 갔다.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 역사책에 따르면 세오녀로 알려진 히메고소는 일본 규슈의 히메지마와 무나카타(宗象)등지에서 신으로 받아들여지는 신라여인이다.

 

□ 철광석 산지에 도착한 연오랑 세오녀

 

연오랑이 타고 간 바위, 안내판에 간단한 설명이 있다.

 

이들 고장에서는 히메고소진자(比賣語曾新社)라는 사당을 지어 지금까지도 히메고소를 극진히 모신다. 특히 규슈의 무나카타에서는 비단 짜는 신으로 추앙받는다고 했다. 아메노히보코 역시 신라 명신(明神)이란 신으로 받들여진다는 것이다.

 

'명신'이란 말 그대로 해와 달의 신을 뜻하는 말.

 

일본 역사서에 등장한 이 아메노히보코와 히메고소가 바로 신라의 연오랑 세오녀로 생각된다는 말에 일본 마쓰에(松江)시 교육위원회 지도강사 니시코리아키라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라 제철 기술자인 연오랑과 세오녀를 아메노히보코와 히메고소란 이름으로 부르며 한반도에서 온 신으로 떠받드는 일본.

 

니시코리 아키라시는 연오랑세오녀 연구소 개소식 참석차 포항에 와서 "연오랑세오녀가 철기기술을 비롯한 각종 문화를 전해준 것은 우주에 우주선을 쏘아올린것 만큼이나 위대했다" 할만큼 그들에 대한 신격화도 대단했다.

 

타지마는 신라와 가까운 동해 쪽의 한 지방이다. 일본으로 먼저 건나간 신라왕자는 이곳에 정착하기전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와코 북쪽 기슭 요고마을에 살았다고 기록됐으며 그가 연오랑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고'라는 지명이 연오랑의 '연오'와 소리가 흡사해 눈여겨 봐야 한다고 이영희교수(인재개발원)는 말한다. 이곳 '요고'에는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를 제사지내는 사당 '에레히코진자'가 있다. 에레히코의 '에레'는 납을 합금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연오랑의 이름자인 '연(延)'은 원래 납을 가리키는 '연(鉛)'연에서 비롯됐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 '세오녀'는 무엇을 뜻하는 이름일까.

 

'세'는 무쇠를 가리키는 신라말이라고 이영희교수는 설명한다. 그리고 '오'는 '오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즉 세오녀란 이름은 무쇠와 함께오는 여인을 의미한다는 것.

 

일본 역사책에서는 세오녀가 '히메고소'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히메는 귀한 신분을 가리키는 일본말, '고소'는 강모래에서 사철을 걸러내는 총책임자를 뜻하는 '거세'와 같은 말로 불린다. 세오녀와 히메고소가 동일인물이었다면 세오녀는 제철여왕이었다는 일본인들의 말이 맞는 셈이다.

 

'삼국유사'에는 남편이 먼저가고 아내가 뒤따라 간다로 기록돼 있으며 '고사기', '일본서기'에는 신라왕자 아메노히보코와 히메고소는 신라에서 부부로 히메고소(세오녀)가 일본으로 먼저 왔으며 남편이 뒤따라 왔다로 기록돼 있다. 히메고소는 비단짜는 신으로 받들여지며, 남편도 일본에서 해와 달의 신으로 받들어졌다고 역사책에는 기록돼 있다. 기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두 남녀가 신라인이었다는 점과 일본에 갔다는 사실은 일치한다. 또한 그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왕과 왕비, 그리고 신으로 받들여졌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 제 8대 아달라왕 4년을 서기 157년으로 확실하게 밝힌 사실 때문이다.

 

세오녀의 발자취를 따라 이즈모시와 마쓰에시 박물관 등을 돌아보면서 신라의 많은 유물이 일본에 전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즈모시는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큰 호수를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다. 호수 주변을 빙 돌아 건물이 들어서고 각종 관공서와 호텔 들이 들어서 있다.

 

니시코리 아키라씨와 찾아간, 세오녀를 모신 신사는 마쓰에시에서 삼나무 짙은 숲을 헤치고 승용차로 1시간 30분가량 달려야 도착할 수 있었다. 길은 원시림과 같았으며 끝없는 계곡이 펼쳐져 있었고 계곡 끝에 닿자 연오랑이 타고온 바위가 있었다. 거기에는 안내 팻말도 세워져 있었다. 1천500여년전 연오랑이 타고 온 바위, 연오랑 세오녀에 대한 막연한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일본인들이 그 오랜 세월을 자손 대대로 연오랑이 타고온 바위라 했고 산 꼭대기에는 세오녀 사당이 있었다.

 

고대로 부터 전해온 기록을 한 낱 설화나 전설로 몰아버리지 않고 역사로 받아들이고 있음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 근처에는 신라식 제철소가 있어 매년 정월에 쇠를 녹이는 작업을 한다.

 

 

출처: 경북일보 진용숙기자 <연오랑과 세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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