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처용아내, '신처용가'

Jimie 2020. 6. 1. 07:50

 

정숙(鄭 淑) 시인

본명; 정인숙
경북 경산 자인 출생
대구 경북대학교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졸
1993 년 '시와 시학' 여름호 신인상으로 등단

2009년 제1회 '님 시인상' 시집 '바람다비제'로 우수상 수상

전국 시와시학 시인회 회장 역임

 

 

경산이 배출한 여류 지역시인, 연작시 '신처용가'로 명성을 떨친 정숙 시인은

 

1948년 경산 자인에서 태어난 정숙시인은 경산 자인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로 건너가 대구시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류 시인이다.

정숙 시인은 경산 자인에서 큰 과수원을 운영하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셋째딸로 나고 자랐다. 지금은 대구에 살고 있지만, 고향인 경산을 떠올릴 때면 들장미가 가득 피어나던 과수원의 들과 개울, 계정숲과 제석사에서 놀던 어린 시절의 향수가 고스란히 떠오른다고 한다.

삼국유사 속에서 시의 씨앗을 찾다/ 정숙

 일연스님께

 

스님은 제 시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신 분 중의 한 분입니다. 천년도 넘어 그 아득한 시대에 어떻게 그런 설화들을 일일이 찾아 그것도 이두문자로 기록하려는 마음을 가지셨던 건지요? 특히 스님의 탄생지는 원효 설총 일연을 삼 성현으로 모시는 삼성산이 있는 경산시 자인면은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지요. 저는 시를 공부하는 분들께 삼국유사를 꼭 읽어보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그 속은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검색을 해보니 연출가이고 극작가인 이윤택의 ‘내 인생의 책](5)’에서 “나의 시적, 그리고 연극적 상상력은 <삼국유사>에서 나왔다. 내가 만일 소설가였다면, 나의 소설적 상상력은 삼국유사에서 나왔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만큼 <삼국유사>는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삼국유사>가 과연 그만큼 대단한 책인가? 역사서로는 오히려 <삼국사기>가 더 역사적 신빙성이 있는 정통서가 아닌가?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분명하다. <삼국사기>에는 단군신화가 없다. 만일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단군왕검의 자손인 줄도 몰랐을 것이고, 호랑이와 곰이 인간이 되기 위해 마늘과 쑥을 먹으며 동굴 속에서 지낸 내력도 몰랐을 것이고, 단군이 곰의 자손이라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한마디로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디서 온 자손인지 어떤 문화적 코드를 지닌 인종인지 그 원형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서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신화가 수록된 경전이며 시학서이다. 우리 시의 원류가 ‘도솔가’라는 것, 월명사라는 위대한 시인이 존재했다는 것을 <삼국유사>는 증거한다. <삼국유사>는 그 자체 한국공연예술사이기도 하다. ‘헌화가’ ‘처용가’ ‘서동요’ ‘해가’는 그 자체 극적 구조를 지닌 연행시다. 이 연행시에 악가무가 붙고 자연스럽게 극적 행위를 요구하는 스토리텔링이 곁들여진 것이다.<삼국유사>는 제도권적 시각에서 벗어난 한국의 변방 역사서이기도 하다.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제4의 제국 가야는 실종되었을 것이고, ‘구지가’가 없었더라면 거북신을 섬기는 해인족이 한반도 동남쪽 원주민으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삼국유사>가 존재함으로써 고대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건국신화와 문명사를 갖춘 한국인의 삶을 기억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대학시절 삼국유사 원본 강의 시간에 고 서원섭 교수님은 칠판에 작대기 네 개 그어 두 개는 처용아내 것, 두 개는 역신의 다리 이처럼 친절하게 설명하시는 모습‘ 참 유치하시다!’ 웃기도 했었지만 결혼하고 시집을 살면서 상실된 자아를 찾으려 결심하던 때 시의 불씨를 먼저 붙여주던 것은 처용가였습니다.

처용아내에 빠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어느 시전문지에 실린 시 가운데 처용아내를 화냥년이라 계속 읊조리는 데서 반발심을 갖게 되었고 처용아내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는 자유연애 시대라서 바람이 들었다 로 보기보다 좋은 씨를 받아 종자 개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제가 살아온 현대사회는 그렇지 않았지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권위를 지키기 위해 은장도를 목에 걸어주며 수많은 여성들을 울려 울화병을 앓게 했지요.


처용아내가 바람을 피기보다 열병에 걸리거나 문정희 시인의 시 ‘남자를 위하여’ 처럼 월경, 서답이 있어 처용을 받아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잠시도 못 참아내는 남성 처용의 상상력이 오해는 아닌지 아니면 필자의 ‘신처용가’에서처럼 처용이 한량인지라 열병에 든 아내를 다른 사내와 놀아난다로 노래한 것은 아닌지요. 변변찮은 상상력으로 스토리텔링을 한 것이 제 첫 시집 연작시 ‘신처용가’지요. 그 당시 시로 소설을 쓴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스토리텔링이 유행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합니다.

신라 향가중 처용가는 아내를 빼앗긴 분노가 단순해보이지만

동경 밝은 달밤에 밤드리 노닐다가들어가 자리 보니 가라리 네히러라둘은 내해요 둘은 뉘해언고본디 내해다마는 앗아날 어찌할꼬

그러나 악장가사에 실려있는 고려가요 '處容歌'는 처용이 疫神을 몰아내는 일종의 무가로 역신에 대한 처용의 분노가 더욱 절실하게 나타나 있어서 희곡적 분위기가 강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처용과 처용아내 누구 편을 들 것인가

 

이런저긔 處容아비옷 보시면 熱病神이아 膾ㅅ가시로다 千金을 주리여 處容아바 七寶를 주리여 處容아바 千金 七寶도 말오 熱病神을 날자바 주쇼셔 山이여 히여 千里外예 處容아비 어여려거져 아으 熱病大神의 發願이샷다


그래서 그런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신처용가’ 로 시극을 한다며, 시를 가지고 놀 줄도 알아야한다면서 만해마을과 여러 무대에서 청소년 시극 지도도 하며 전국행사를 휩쓸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그 가무와 노래가 질병을 몰아내는 주술적 양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조선시대 유교사상으로 여성을 억눌렀으니 이제 여성해방을 부르짖는 이들이 처용아내를 들먹일 때가 된 것이지요. 여기서 처용아내라 자처하는 필자의 [신처용가]에서 처용아내의 변을 들어보면 94년 그 당시에는 공감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웬 생트집?

처용아내 1

 

가라히 네히라꼬예?
생사람 잡지 마이소예.
달이 휘영청 청승떨고 있지예.
밤이 '어서! 어서!' 다구치미 깊어가지예.
임카 마시려던 동동주 홀짝홀짝
술삥이 혼자 다 비았지예.
용광로 부글부글 끓는데 임이 안오시지예.
긴 밤 지쳐 살풋 든 잠, 찔레꽃 꺾어 든
귀공자를 잠시 반긴 거 뿌인데예.
웬 생트집예?
셔블 밝은 달 아래서
밤 깊도록 기집 끼고 노닥거린 취기,
의처증 된기라예?
사철 봄바람인 싸나아는 간음 아이고,
외로움에 속 골빙 든 여편네
꿈 한번 살짝 꾼 기 죈가예? 예?

 

다시 외로움에 지친 봄밤의 처용아내 넋두리를 들어보면 부부사이엔 ‘봄밤이라예’ 한 마디로
오늘 밤 아내가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을 원한다는 사인으로 눈치 차려야 할 것입니다.

 

휴화산(休火山)이라예
- 처용아내 2 〔벼랑 끝의 꽃〕

 

보이소예,
지는예 서답도 가심도 다 죽은
死火山
인 줄 아시지예? 이 가슴속엔예
안직도 용암이 펄펄 끓고 있어예.
언제 폭발할지 지도 몰라예.
울타리 밖의 꽃만 꽃인가예?
시들긴 했지만 지도 철따라 피었다 지는
꽃이라예.
시상에, 벼랑 끝의 꽃이 예뻐보인다고
지를 꺾을라 카는 눈 빠진 싸나아 있다카믄
꽃은 꽃인가봐예?
봄비는 추적추적 임 발자국 소리 겉지예.
벚꽃 꽃잎이 나풀! 나풀! 한숨지미
떨어지고 있지예. 혼차 지샐라 카이
너무 적막강산이라예.
봄밤이라예. 안 그래예?


*서답 ; 월경
*시상에 ; 세상에
*카는 ; 하는
*카믄 ; 하면

 

1994년 ‘시와 시학’에 처용아내 연작으로 신작특집 5편 발표하고 좋은 반응을 얻었고 그것으로 1996년 첫 시집 ‘신처용가’가 발간되었습니다. 다음 시는 문정희 시인이 ‘남자를 위하여’라는 작품에서 처용아내가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 몸[월경]을 하고 있었다고 처용아내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한 달에 한번 그 며칠을 견디지 못하는 남자의 욕망을 비꼬고 있는 시를 살펴보면

 

처용 아내의 노래

문정희

 

아직도 저를 간통녀로 알고 계시나요

하긴 천 년 동안 이 땅은 남자들 세상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서라벌엔 참 눈물겨운 게 많아요

석불 앞에 여인들이 기도 올리면

한겨울에 꽃비가 오기도 하고

쇠로 만든 종소리 속에

어린 딸의 울음이 살아 있기도 하답니다

우리는 워낙 금슬 좋기로 소문난 부부

하지만 저는 원래 약골인 데다 몸엔 이슬이 비쳐

부부 사이를 만 리나 떼어 놓았지요.

아시다시피 제 남편 처용랑은 기운찬 사내,

제가 안고 있는 병을 샛서방처럼이나 미워했다오.

그날 밤도 자리 펴고 막 누우려다

아직도 몸을 하는 저를 보고 사립 밖으로 뛰어나가

한바탕 춤을 추더라구요.

그이가 달빛 속에 춤을 추고 있을 때

마침 저는 설핏 잠이 들었는데

아마도 제가 끌어안은 걔집이

털 난 역신처럼 보였던가 봐요.

그래서 한바탕 또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처용가랍니다.

사람들은 역신과 자고 있는 아내를 보고도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처용의

여유와 담대와 관용을 기리며

그날부터 부엌이건 우물이건 질병이 도는 곳에

처용가를 써 붙이고 야단이지만

사실 그날 밤 제가 안고 뒹군 것은

한 달에 한 번 여자를 찾아오는

삼신할머니의 빨간 몸손님이었던 건

누구보다 제 남편 처용랑이 잘 알아요.

이 땅, 천 년의 남자들만 모를 뿐

천 년 동안 처용가를 부르며 깔깔대고 웃을 뿐

 

[남자를 위하여] 문정희 | 민음사 | 1996

이처럼 향가를 실은 삼국유사가 시인 뿐 아니라 문학인들에게 시적 상상력의 씨앗을 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일연스님의 시와 마무리

 

향가는 시대와 역사의 산물이며 사회적 갈등을 함축하고 있는 서정시로 볼 수 있는 향가와 전승 설화를 <삼국유사>속에 채록하면서, 특히 구전 설화로서 기이한 내용에는 유독 관심을 가졌고, 그런 신이한 사건들은 일연이 승려로서의 신분, 나아가서는 이런 종교적 이적이 포교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삼국유사>는 시공을 초월한 불교의 윤회 및 내세관에서 비롯된 내용에 비중을 두고 일연에 의해 철저하게 재편집 구성되었고, 신라 화랑정신을 고려 혼란기 백성에게 고취 선양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발표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삼국유사 속에서 많은 시적 상상력을 찾아내려면 아직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은 일연스님의 시를 인터넷 스크랩으로 그의 인간적인 정서와 풍류를 음미하며 처용아내의 끝없는 갈증과 그리움 달래 봅니다.

 

2014년 < 시와 소금 >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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