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등대(燈臺)지기
헨리크 솅키에비치[폴란드]
Henryk Adam Aleksander Pius Sienkiewicz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Henryk Sienkiewicz) 소설가
출생-사망-1846년 5월 5일 (폴란드) 1916년 11월 15일.
학력; 바르샤바대학교 (중퇴)
데뷔; 1872년 장편소설 '헛되이 (Na marne)'
수상; 1905년 노벨 문학상
Henryk Adam Aleksander Pius Sienkiewicz (US: /ʃɛnˈkjeɪvɪtʃ, -jɛv-/ shen-KYAY-vitch, -KYEV-itch, Polish: [ˈxɛnrɨk ˈadam alɛkˈsandɛr ˈpjus ɕɛnˈkʲɛvit͡ʂ]; 5 May 1846 – 15 November 1916), also known by the pseudonym Litwos [ˈlitfɔs], was a Polish journalist, novelist and Nobel Prize laureate. He is best remembered for his historical novels, especially for his internationally known best-seller Quo Vadis (1896).
Born into an impoverished Polish noble family in Russian-ruled Congress Poland, in the late 1860s he began publishing journalistic and literary pieces. In the late 1870s he traveled to the United States, sending back travel essays that won him popularity with Polish readers. In the 1880s he began serializing novels that further increased his popularity. He soon became one of the most popular Polish writers of the turn of the 19th and 20th centuries, and numerous translations gained him international renown, culminating in his receipt of the 1905 Nobel Prize in Literature for his "outstanding merits as an epic writer."
Many of his novels remain in print. In Poland he is best known for his "Trilogy" of historical novels – With Fire and Sword, The Deluge, and Sir Michael – set in the 17th-century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internationally he is best known for Quo Vadis, set in Nero's Rome. The Trilogy and Quo Vadis have been filmed, the latter several times, with Hollywood's 1951 version receiving the most international recognition.
단편소설
등대(燈臺)지기
헨리크 솅키에비치[폴란드]
1
파나마 운하에 인접한 아스핀워르의 등대지기가 어느 날 갑자기 행방을 감추었다.
사람들은 등대지기가 간밤에 몹시 휘몰아치던 폭풍우 때문에 벼랑을 기어오르다가 그만 비바람에 휩쓸려 바다에 익사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등대지기를 채용하는 일은 파나마 주재 미국 영사관의 소관 임무였다. 그러나 하루 아침 사이 등대지기 후보자를 물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날 안으로 후임자를 빨리 구해야 한다는 점과 후임자는 어디까지나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 때문이었다.
이처럼 조건이 까다로운 데다가 등대지기란 무인 고도에서 살아야 하는 직업이므로, 누구나 그 직업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바로 그날 후보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칠십 고령의 백발 노인인데다 첫인상이 몹시 침착하고 성실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영사는 노인에게 물었다.
"영감님, 어디에서 오셨나요?"
"네, 전 폴란드 사람입니다."
"여기 오시기 전까지는 어디서 뭘 하셨나요?"
"그저 여기저기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영감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등대지기란 한 곳에 늘 붙어 살아야 하는 작업인데요?"
"이제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 이렇게 찾아온 것이죠."
"혹시 관청에 근무하신 적이 있는가요? 아니면 무슨 감사장이나 표창장 같은 거라도 받으신……?"
그러자 노인은 알았다는 듯이 낡아빠진 바지 호주머니에서 때묻은 지갑 하나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그 지갑 속에서 옛날 전쟁터에서 무공을 세운 여러 가지 빛바랜 훈장과 구겨진 표창장을 꺼내 보였다.
"네, 스칸빈스키라……. 여기 적힌 성함이 영감님 존함이신가요? 아휴 총칼 쓰는 기술도 대단하시군요……. 영감님은 옛날에 아주 용감한 군인이셨나 봅니다."
영사는 흡족한 듯이 여러 가지 훈장과 표창장을 훑어보며 말했다.
"저에게 일을 맡겨 주십시오. 부족하긴 해도 저의 성심성의를 다해서 …… 성실한 등대지기가 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영감님께서 다리가 튼튼하신가요? 원래 등대지기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저 가파른 벼랑을 오르내려야 하는데……."
"네, 그 점만은 안심하십시오. 저는 하루에도 보통 백 여리를 노상 걸어다녔으니까요."
"혹시 해상에서 근무하신 적이 있는가요?"
"네, 해상 근무랄거까지는 없겠지만……에……포경선을 타고 삼 년쯤 바다에서 파도와 싸운 적이 있지요."
"그렇게 바다를 누비던 할아버지께서 이처럼 고독한 곳에서 오래 머물 수 있을까요?"
"그럼요. 하도 이곳 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보니까…… 이젠 한 곳에 가만히 머물러 살고 싶어졌어요."
"좋습니다. 그러시면 오늘부터 등대지기 일을 맡아 수고를 해 주십시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네, 말씀하십시오."
"만약 영감님께서 직무를 게을리 하신다면…… 그땐 곧 면직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네, 물론이죠."
하는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는 새로 얻은 직업에 대한 기쁜 웃음이 파도처럼 여울지고 있었다.
바로 그날 밤부터 이 무인 고도의 암벽에 세워 놓은 등대에서는 스칸빈스키 노인이 켜 놓은 등대불이 칠흑 같은 바다를 향해 찬연히 빛나기 시작했다.
노인은 망대에 올라가 파도치는 바다를 멀리 굽어보며 지난날의 잡념을 잊고, 되도록 새 일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스칸빈스키 노인만큼 칠십 평생을 파란곡절을 겪어 가며 살아온 사람도 드물 것이다. 산에서, 바다에서, 들에서, 혹은 전쟁터에서 몇 십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살아왔고, 그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남모르는 딱한 풍상을 수없이 겪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은 마치 풍랑을 만나 파선당한 대양의 일엽편주처럼 온갖 시련과 고난의 인생 역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오늘 이렇게까지라도 살아 부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같은 파란만장한 생애 속에서 단 한번도 슬픈 자기 운명을 실망하거나 좌절해 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살아가노라면 언젠가는 행복한 날도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지내 왔던 것이다. 기나긴 겨울 지나면 봄이 오듯이, 봄이 오면 여름에는 반가운 일이 생기겠지 하며 그날그날을 희망 속에 살아왔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노인이야말로 마치 평생을 내일을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같았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쉴새없이 흘렀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노인의 까만 머리에는 백발이 늘어갔다. 그리하여 청년 스칸빈스키는 노인 스칸빈스키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건강하던 그도 이제는 기력이 쇠진하여지고, 눈마저 어두워졌다. 따라서 마음도 약해져 옛날에 그토록 희망에 가득찼던 꿈들이 이제는 하나, 둘 실망의 한숨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를 더욱 괴롭히는 일은 어릴 때에 떠나온 고향에 대한 불붙는 향수였다.
오직 이 노인의 하루 생활 중에서 날이 갈수록 간절해지는 것은 제비를 보거나, 참새를 보거나, 혹은 산을 보거나, 슬픈 음악을 듣거나, 가슴 속에 사무치는 것은 고향 생각뿐이요, 가능하다면 몸과 마음을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밖에 노인이 가진 욕망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한 곳에 조용히 정착하여 말없이 살아가면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것이 큰 소망이요, 바램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남들이 다 싫어하는 등대지기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일종의 만족감을 가지고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는 비결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뱃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바다의 파도가 심한 밤이면 캄캄한 바다 속에서 뭔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늙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밤보다 더 어둡고 바다보다 더 신비한 그 무엇이 바로 이 노인을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인생에 지치면 지칠수록 그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 올 것이다.
벼랑에 우뚝 선 등대는 스칸빈스키 노인에게는 거의 무덤이나 다를 바 없었다. 사실 이 세상에서 등대지기란 직업만큼 고독하고 외로운 직업도 없을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넓고 푸르게 파도치는 바다만 바라보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어제와 오늘이 언제나 똑같이 반복되는 고독한 생활 속에서 단 한 가지 변하는 것이 있다면 하늘의 천기(天氣)뿐이었다.
그러나 스칸빈스키 노인은 그렇게 단순하고 외로운 생활 속에서 전에 느껴볼 수 없었던 어떤 벅찬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다. 스칸빈스키 노인의 일과는 대략 이러했다. 새벽이면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 먹고, 망대에 앉아 바다를 굽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눈 앞에 전개되는 대자연의 경치 앞에 아무런 불평이나 싫증을 느끼지 못했다. 이를테면 파도를 뚫고 지나가는 큰 배나 작은 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남들이 미처 느껴보지 못하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등대를 사랑했다. 그는 바위에도 정을 쏟았다. 그리고 저녁 무렵이면 바위섬으로 모여드는 갈매기와도 친했다. 노인은 먹다 남은 밥찌꺼기를 으레 새들에게 던져 주었다.
갈매기와 새들도 노인과 친해졌다. 노인이 먹이통을 들고 나오면 갈매기들은 으레 노인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처럼 스칸빈스키 노인은 등대를 아끼고 바위섬을 사랑하며 갈매기를 아꼈다. 뿐만 아니라 바다를 그 누구보다 사랑했다.
비록 말을 건네 줄 말동무가 없어도 그는 이처럼 자연과 더불어 충분히 그 속에서 그가 지껄일 수 있는 모든 말을 할 수 있는 즐거움을 발견한 수 있었다.
스칸빈스키 노인이 섬에서 육지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일요일의 두세 시간뿐이었다. 그때가 오면 그는 은제 단추가 달린 등대지기 유니폼을 갈아입고 가슴에 십자 훈장을 달았다. 모처럼의 육지 외출로 그가 교회당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며 모두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새로 온 등대지기는 정말 훌륭한 노인이야."
그럴 때마다 노인은 몸을 으쓱하며 자랑스러운 듯이 그의 백발을 들어 보이곤 했다.
그러나 노인은 예배가 끝나면 유럽의 소식을 알려고 신문 몇 장만을 사 가지고 섬으로 곧장 돌아와 버렸다. 왜냐하면 육지가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신문을 사 보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이유 가운데서도 그의 고향인 유럽 소식을 아는 일이 제일 큰 것이었다.
비록 그가 나고 자란 고향 땅과는 수륙 수만 리에 떨어져 있지만, 늙고 외로운 마음 속에서도 고향 생각만은 항상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섬에는 수 주일에 한 번씩 연락선이 왔다. 연락선은 노인이 쓸 일용품과 물을 싣고 온다. 노인은 그때마다 연락선의 존슨이라는 사람과 곧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나다니기가 싫어져 나중에는 신문을 사러 육지로 나오지도 않았고, 연락선이 오더라도 아예 등대에서 내려오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 어느 누구도 등대지기를 본 사람이 없고, 스칸빈스키는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노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는 바로 섬에까지 날라다 준 음식이 없어지는 점과 등대불이 밤마다 환하게 비치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스칸빈스키는 확실히 세상일에 무관심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향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 그는 고향 생각마저 단념해 버렸다. 노인의 전세계는 이처럼 작고 코딱지만한 작은 바위섬에서 시작하여, 작은 섬에서 끝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섬을 떠나지 않을 생각으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잊고 살았다. 그는 등대 망루에 앉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푸른 바다를 멀리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적적하고 외로운 환경 속에서 노인은 날이 갈수록 인간에 대한 관심이나 흥미를 차차 잃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에워싼 자연과 점점 깊이 동화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그에게는 하늘도, 물도, 바위도, 등대도, 누런 모래톱도, 바람을 안은 돛대도, 갈매기도, 파도도, 모든 것이 자기와 하나로 합쳐진 신비의 공동 영혼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 신비스러운 영혼 속에서 그 영혼과 더불어 살고, 그 영혼과 더불어 자고, 그 영혼과 더불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처럼 스칸빈스키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반사 상태(半死狀態) 속에서 주위의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던 것이다.
2
그러나 때로 의식을 찾을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식량을 실은 연락선이 바위섬을 다녀간 뒤, 그것도 한 두 시간이 지난 뒤에야 스칸빈스키 노인은 물건을 가지러 바닷가로 내려갔다.
그날따라 운반된 짐꾸러미 속에는 색다른 꾸러미 하나가 놓여 있었다. 소포였다. 소포에는 미국 우표가 붙어 있었다. 겉봉에는 '스칸빈스키 씨 귀하'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궁금하게 생각한 노인은 그 책 가운데 한 권을 펼쳐 보다가 그만 자신도 모르게 책을 떨어뜨렸다. 그의 손은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 책은 바로 노인의 조국인 폴란드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아휴, 고맙기도 하지……. 한데 누가 이 책을 보내 주었을까?'
노인은 한참 동안 발신인의 정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마침내 생각이 났다. 그가 바로 등대지기로 취직한 지 얼마 안됐을 무렵에 신문에서 미국 뉴욕에 '폴란드 협회'가 조직된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었다. 노인은 부랴부랴, 그가 탄 월급의 절반을 그 협회에 우편으로 기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빨리 생각해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바로 그 협회에서 노인에게 고맙다는 감사장과 함께 폴란드 책을 몇 권 보내준 것이었다. 분명히 책은 까닭이 있어 부쳐 온 것이었지만, 노인은 한동안 그 까닭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러나 무인 고도에서 받아 본 조국의 책은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가!
노인은 눈을 지긋이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아득히 먼 곳에서 노인의 이름을 부르는 무척 그리운 목소리가 물결에 실려 들어왔다. 그러나 눈만 뜨면 그 소리는 산산히 부서질 것 같아서 노인은 그냥 눈을 감은 채 앉아 있기만 했다. 소포는 그 노인 앞에서 반나절을 햇볕만 쪼이고 있었고, 그 위에는 꾸러미가 풀려진 채 책이 놓여 있었다.
노인은 다시 두번째 집어 들었다. 그의 심장은 몹시 뛰었다. 그 책은 바로 시집이었다. 저자는 조국 폴란드의 유명한 시인이었다. 전에도 그의 시를 읽은 적이 여러번 있었다. 그 후 노인은 스페인 전쟁에 참전하였고, 그러고는 미국에 건너가 이 고생 저 고생 하느라고 한 사람의 폴란드인도 만나지 못하였으며, 더더구나 폴란드 책은 구경도 하지 못하였다.
노인은 벅찬 감회와 더불어 흥분을 가누지 못한 채 시집을 펼쳐 읽었다. 그러자 노인에게도 그 고요한 섬에서 마치 무슨 엄숙한 일이 생기기라도 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때는 마침 평화의 적막 속에 하루 해가 저물어가는 석양 무렵이었다. 아스핀워르 등대의 커다란 시계가 오후 다섯 시를 쳤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두 서너 마리의 갈매기가 푸른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섬 기슭에 부딪치던 파도도 잠시 숨을 돌리는 양, 온 주위 만물이 쥐죽은 듯 고요한 순간이 왔다. 노인은 되도록 그 시를 이해하려는 듯 천천히 시를 소리 높여 읽기 시작했다.
오, 그 옛날 그때, 나의 사랑하는 고향 리스토바여!
그대의 거룩한 모습
어찌 황금엔들 비할 수 있을손가?
이는 오직 나만이 알고……
오오, 내가 아는 속의 외로운 나그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운 그대 모습
이제 붓을 들어
그대를 찬양하는 노래를 쓰노니,
이 또한 그대 그리운 마음 때문일세.
여기에서 읽어 오던 스칸빈스키 노인은 문득 읽기를 멈추었다. 글자가 눈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산산히 부서져, 목이 메이게 울음이 북받치는 것만 같았다.
말을 잃은 노인은 한참 동안 눈시울을 닦다가 다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거룩한 여신
당신은 나의 거룩한 동포와,
아름다운 내 조국 강산을 지켜 주소서.
나, 그대에게 마음 다하여 바라노니,
그 옛날 자비로운 어머니 품 속에서
행복에 넘치는 눈짓으로 바라 보던
어릴 적 그 옛날 시절로
나를 끌어 데려가 주소서.
이제 그대의 기적으로
나를, 나를 그 영원한 고향, 조국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노인은 흐느껴 울면서 모래 사장에 엎드려 버렸다. 치솟는 감정을 더 이상 견뎌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조국을 떠난 지 사십 년!
사랑하는 조국의 말을 들어 본 지도 그 얼마였던가? 그런데 그토록 가슴에 사무치는 모국어가 제발로 스칸빈스키 노인을 찾아오지 않았는가.
바로 그 모국어가 바다를 건너 무인 고도 속의 몸도 마음도 외로운 노인을 찾아온 것이었다. 정말 언제 대해도 반갑고 다정한 모국어였다. 노인은 마치 그 모국어가 무한한 조국의 사랑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아, 엉엉 흐느끼고 울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모국어에 용서를 빌었다.
시간은 흘러갔다. 노인은 모래 사장에 엎드린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바다 위를 날던 갈매기들도 노인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듯이 노인 곁으로 날아와 그 주위를 에워쌌다. 마침 때는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줄 시간이었다. 한참 뒤 고개를 든 노인의 얼굴에는 설명할 수 없는 영감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머뭇거리더니 육지에서 날라온 음식들을 모조리 갈매기들에게 뿌려 주었다. 갈매기들은 울면서 노인 옆으로 모여들었다. 노인은 다시 시집을 손에 들고 수평선 너머 바다 밑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다시 시를 읽기 시작했다.
자, 이제는 나를 데려가 주오
저 우거진 수풀 언덕으로,
저 푸른 초장으로
고향 그리운 나의 영혼을.
시집에 적힌 글자는 노을빛 속에 묻히고 말았다.
노인은 바위 위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의 영혼은 오색 구름을 타고 그리운 고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숲이 보이고…… 맑은 시내가 보이고…… 고향의 옛 산과 들이 옛날 그대로 보였다. 모두들 그를 보고 '나를 기억하시나요?' 하고 물었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들도, 산도, 여기 저기 다정하게 모여 있는 마을도, ……모두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밤이 왔다. 여느 때 같으면 등대불이 비쳐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스칸빈스키 노인은 지금 고향에 있는 중이었다.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고향 꿈을 꾸고 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여러 가지 고향 생각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그러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만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을의 풍경만은 마치 어제 가 본 듯이 선하게 그리고 생생히 아른거렸다.
창마다 불빛이 환해 오는 집들, 나지막한 산, 물방앗간, 밤새 울던 개구리 소리들. 그는 언젠가 자기가 병사였을 때, 고향에서 보초를 서던 일을 회상하였다. 그가 보초를 서던 때 바로 고향 마을의 산 밑에 있던 주막이 눈에 띄었다. 그 주막에는 아직도 사람이 떠드는 소리와, 노랫 소리, 첼로 소리가 고요한 밤의 정적을 허물며 들려 왔다.
밤이 깊어갔다. 모든 집들의 창문에 불이 꺼지고, 마을은 온통 밤안개로 덮었다. 그 후 얼마나 지났을까? 마음에는 새벽 먼동이 트기 시작하고, 집집마다 닭 우는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이 모든 풍경은 그야말로 폴란드가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새벽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조국, 그리고 사무친 조국이었다.
스칸빈스키 노인이 이렇게 고향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갑자기 노인의 귓가에 이상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영감님! 영감님! 정신 차리세요. 왜 이러고 있소? 네?"
노인이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자기 앞에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노인의 뇌리에서는 고향에 대한 꿈이 채 걷히지 않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연락선 승무원인 존슨이었다.
"어디 편찮으신가요?"
하고, 존슨은 몹시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아닐세…… 아 아니, 아니야."
"헌데 왜 아직까지 등대불을 켜지 않았어요? 지금 등대불 때문에 야단이 났어요."
"아니 뭐가 야단나?"
"아, 글쎄 지나가던 배가 지금 모래 언덕에 얹혔어요. 다행히 큰 사고가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보나마나 영감님은 오늘로 파면당할 거예요! 어서 영사관으로 가 보세요."
노인은 파면이란 말에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졌다. 등대에 불을 켜지 않은 것을 그때야 비로소 알았던 것이다.
삼 일 뒤, 스칸빈스키 노인은 뉴욕행 여객선에 몸을 싣고 있었다. 노인은 가엾게도 파면을 당한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다시 방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노인은 요 며칠 사이 전에 없이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앙상한 얼굴로 두 눈만이 움푹하게 파여 반짝이고 있을 뿐이다.
새로 시작하는 방랑의 길에서도 노인은 가슴에 모국어로 된 시집을 꼭 껴안고 있었다. 마치 큰 보물덩어리라도 안은 듯, 혹시 뺏기지 않을까, 행여 잃지 않을까 가슴 조이며, 그 시집을 가슴에 힘껏 부둥켜안고 있었다. 모국어로 쓰여진 시집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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