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혼을 위하여 (161) 미소라 히바리와 구단의 어머니(九段の 母)
이일영 관장 ・ 2019. 8. 6. 19:44
가슴으로 존경하는 교수님이 늘 보내오는 깊은 울림의 음악 중에 어느 날 이슥한 밤 이웃나라 일본의 전설적인 가수 미소라 히바리 노래가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아득한 기억을 일깨운 소통에서 이야기의 봇물이 터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지난 30여 년 전에 많은 시간을 보냈던 가수에 대한 자료가 담긴 오랫동안 먼지 쌓인 상자를 다시 열었다. 이후 미소라 히바리의 대표적인 노래를 다시 듣게 되면서 가수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빛깔마저 바랜 오랜 세월 쌓아놓은 히바리에 대한 자료를 다시 찾아내어 살펴보면서 예전에는 간과하고 있었던 행간의 내용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한동안 깊은 생각을 거듭하며 운명적이라는 느낌을 앞세워 노래하는 종달새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웃 나라 일본 쇼와(昭和) 시대의 가장 빛나는 인물로 평가받는 가수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중심은 그가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가수라는 오랫동안 전하여온 전설과 같은 풍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가수가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억압의 땅에서 살아온 눈물겨운 재일 한국인의 소문은 끝없는 소문을 낳았다. 그러나 실체적인 검증이 없는 소문만을 붙들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결국 이를 노린 일본인들의 너무나 쉽게 정리한 내용에 따라 시대의 희망은 터무니없는 소문으로 남아버렸다.
(필자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지금은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인의 후예라는 희미한 개연성을 붙들고 있지만, 진실을 헤아리는 노력을 바탕으로 언제인가 역사에 담긴 진실의 등불을 환하게 켜 들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담는다.)
일본 가요사에서 가장 위대한 국민가수로 평가받는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1937-1989)는 1989년 6월 24일 히바리가 신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일본 정부가 수여한 가장 명예로운 국민영예상(国民栄誉賞)을 추서 받은 내용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일본 최대 잡지 문예춘추가 특집을 통하여 (전후 폐허의 어둠에서 일본이라는 주식회사를 만든 국민과 함께 그 사가(社歌)를 부른 가수 미소라 히바리)로 평가하였던 내용은 이와 같은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 대중문화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미소라 히바리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소문은 당시 일본 재일 한국인들은 물론 일본인들도 묵시적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일본인 대로 공개적으로 거론 되지 않는 내용에 안심하였으며 재일 한국인은 행여 가수에게 문제가 될 수 있는 우려 속에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가슴으로 공유하였던 시대 상황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의 대표적인 이야기가 있다. 히바리가 세상을 떠난 후 1989년 7월 우리나라 주간여성 잡지에 (미소라 히바리 그는 한국인이었다)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이는 작곡가 손목인(1913-1999)이 일본의 재일 한국계 가수 미야코 하루미(본명北村春美1948~)에게서 전해 들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인 기사였다.
작곡가 손목인은 경남 진주에서 출생하여 1932년 도쿄 제국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이후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편입하였다. 이후 1934년 조선일보 후원으로 열린 콜롬비아 레코드사가 주최한 음악대회에서 3등으로 입상한 고복수를 자신이 소속한 오케이 레코드사에 선발하여 첫 작곡 타향을 녹음하였다. 바로 오늘날에도 애창하고 있는 가요 타향살이다. 목포의 눈물에서 짝사랑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주옥같은 노래를 작곡한 손목인 작곡가가 재일 한국계 가수 미야코 하루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던 기자는 미소라 히바리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이와 같은 기사를 썼던 것이다.
이후 한 달이 지난 1989년 문예춘추 8월 호에서는 미소라 히바리의 탄생에 대한 특집이 실렸다. 당시 문예춘추는 ‘미소라 히바리가 태어나 자란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시 이소고구(横浜市 磯子区 滝頭)의 거주민에서부터 시대별로 미소라 히바리와 연관된 주요한 인물을 전방위적으로 인터뷰하였다.
특히 한국 잡지에 실린 히바리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기사에 대하여 당시 주간여성의 백승태(白承悦)차장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히바리가 한국계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오래전부터 전해져 온 상식과 같은 이야기라는 대답을 특집으로 정리하면서 미소라 히바리의 한국계에 대한 소문이 정확한 실증이 없는 것임을 부각시켰다.
이어 문예춘추는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 가토 마스키시加藤 増吉1911-1963의 고향인 오늘날의 닛코(日光)인 도치기현 카와치군 도요오카무라(栃木県 河内郡 豊岡村)의 토착 주민으로 현지 이마이치 시의회 부의장(今市市議会副議長)을 맡고 있었던 가토 츠(加藤 實)라는 인물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 내용은 히바리의 아버지 집안이 에도 시대부터 이곳에 거주하여온 집안으로 마을의 반장 격인 구미가시라(組頭)를 맡아 자신의 집안보다 직급이 위인 집안으로 히바리의 할아버지 카토 초사쿠(加藤 長作) 때에 집안이 몰락하여 자신의 집 토지를 소작하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하는 사실은 미소라 히바리 사후에 문예춘추가 특집으로 기획한 내용에 담긴 이야기들은 미소라 히바리 생전에는 언급조차 없었던 내용들이다.)
이와 같은 일본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의 재일 한국인에 대한 논란은 미소라 히바리 자신이 생전에 공개적으로 이에 대한 그 어떠한 언급이 없었다. 이는 당시 일본 사회에 히바리의 한국계에 대한 소문이 기정사실화되었던 상황에서 일본 언론에서 이에 대한 그 어떠한 인터뷰이거나 기사 자체가 없었던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지 깊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또한 히바리 스스로 본인의 가계가 순수한 일본인 출신이었다면 이와 같은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한국계에 대한 루머와 풍문에 대하여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일생을 마친 사실은 더욱 중요한 의미이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당시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분명하였음은 명확하다. 이에 히바리가 차별을 받는 한국계라는 소문에 단 한 번의 반론이나 언급이 없었던 내용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히바리의 한국계에 대한 소문은 많은 개연성 많은 가지고 있어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는 속담처럼 소문에 소문을 이어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낳고 또 낳았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일본의 주요한 언론은 히바리 생전에는 일체의 언급이 없었지만, 사후에 많은 이야기를 다루었다. 특히 문예춘추는 여러 차례에 걸친 특집을 통하여 히바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거듭하였다.
이와 같은 의문 속에서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살펴 가기로 한다. 현재까지 실체적인 기록으로 확인되는 미소라 히바리의 가계는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부터 확인된다. 그러나 히바리 아버지의 태생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히바리의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加藤 増吉1911-1963)는 1935년 24세 나이에 22살 나이의 도쿄 출신의 가토 기미에(加藤 喜美枝1913-1981) 와 결혼하였다. 2년 후인 1935년 5월 29일 큰딸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1937-1989)가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시 이소고구 다키가시라 2정목(横浜市 磯子区 滝頭2丁目)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가토 가즈에(加藤 和枝)이다.
이후 1939년 히바리의 여동생 사토 세츠코(佐藤 勢津子1939-)가 태어났다. 이어 1941년 남동생인 장남 가토 데츠야(加藤 哲也1941-1983)가 본명 가토 마스오(加藤 益夫)로 태어났다. 이어 1943년 둘째 남동생이며 막내인 카야마 다케히코(香山 武彦1943-1985) 가 본명 가토 다케히코(加藤 武彦)로 태어났다. 나중에 자세하게 이를 언급하겠지만 히바리의 세 동생은 모두 가수와 배우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2남 2녀의 자녀를 둔 히바리의 부모는 요코하마의 다카가시라 2정목(滝頭 2丁目)에 자리한 다카가시라 초등학교 방향의 지붕이 없는 시장(屋根なし市場) 끝머리에서 우오마스(魚増)라는 생선가게를 운영하였다.
미소라 히바리는 그가 태어나 자랐던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네 살 무렵에 오구라햐쿠닌잇슈(小倉百人一首)라는 시조와 같은 단가집(短歌集)을 거의 암송하고 있었을 만큼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한 아이였다. 또한, 뛰어난 기억력을 바탕으로 선천적인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단가집(短歌集) 햐쿠닌잇슈(百人一首)는 아스카 시대의 덴지 천황(626-672)에서부터 가마쿠라 시대의 슌도쿠 천황(1197-1242)에 이르기까지 100인의 단가를 일본 중세 시대 최고의 가인 후지와라노 사다이에(1162-1241)가 선별하여 엮은 책이다.
여기서 잠시 단가(短歌) 와 하이쿠(俳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단가와 하이쿠는 모두 정형적인 운율을 가진 시가詩歌이다. 단가는 와카(和歌)로도 표현되는 즉 일본의 노래 왜가(倭歌)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사회 집단의 감정을 담은 가요와 다르게 개인적인 사유의 철학과 감정을 표현하여 지은 시가이다. 이와 같은 단가는 한시漢詩에 대비되는 일본의 시라는 뜻을 품고 있으며 5·7·5.7.7의 정형적인 운율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하이쿠는 더욱 함축된 5·7·5의 운율로 이루어진 단형시로 이와 같은 하이쿠는 계절을 나타내는 즉 봄을 상징하는 봄바람(하루가제-春風)이거나 민들레(단포포-タンポポ)와 같은 계절(기고-季語)이 반드시 구성되어야 한다.
이렇듯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재능과 음악적 감성을 가지고 있었던 히바리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동네의 주요한 연회에 초청되어 노래를 불렀을 만큼 뛰어난 노래 실력을 자랑하였다. 이와 같은 바탕은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의 음악적인 재능에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히바리의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는 뛰어난 클라리넷 연주와 함께 동네에서 널리 알려진 노래 실력을 갖추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훗날 미소라 악단이 세워지면서 분명하게 확인되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히바리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는 히바리가 6살 되던 해 1943년 6월 요코스카 해병단에 징집되어 입대하였다. 요코스카 해병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 있던 일본 해군 부대였다. 일반적으로 요코진(横鎮)으로 불렀던 요코스카 진주부(横須賀鎮守府)가 관할하던 부대로 군항의 경비에서부터 해군의 효율적인 전투력을 위하여 편제된 부대였다.
이와 같은 출병식이 열리던 요코하마에는 입대하는 군인과 이를 환송하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다. 당시 6살 나이 히바리는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가 전쟁터로 떠난다는 막연한 불안 속에 환송 인파를 대표하는 어린 가수로 초대되어 있었다. 히바리는 당시 유행하였던 구단의 어머니(九段の 母)라는 노래를 불러 전쟁터로 떠나는 징집병과 보내는 가족 모두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당시 히바리가 불렀던 (구단의 어머니)라는 노래는 야스쿠니 신사에 일반 유족의 참배가 처음으로 허용되었던 시기에 발표된 노래였다. 노래는 군에 입대한 아들이 전사하여 신사에 봉안된 소식을 들은 동북(東北) 지방 시골 늙은 어머니가 신사에 참배를 가는 이야기를 담은 노래이다. 도쿄 우에노 역에 도착한 노모가 지팡이에 의지하여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区)에 있는 구단 언덕(九段坂)을 넘어 하루 종일 걸어서 신사에 도착한 애틋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노래였다.
이와 같은 구단 언덕(九段坂)은 에도 시대에는 도보로 갈 수 없었던 길로 니혼바시(日本橋)강에서 에도 성 입구의 다야스몬(田安門)으로 가는 길에 9층으로 이루어진 계단이 놓이면서 유래된 이름이었다. 이후 1923년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후 다시 정비되었다.
이 노래는 1939년 일본의 군가 가수로 잘 알려진 시오 마사루(1908-2003)가 불렀던 노래로 애틋한 가사에 담긴 이야기가 군에서나 세간에서 당시 널리 불렸다. 그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철도국에서 근무하다가 1937년 가수로 데뷔하여 당시 군가 풍의 노래를 많이 불렀던 가수였다. 그는 특히 움직임이 전혀 없는 군인의 부동자세와 같은 반듯한 자세로 노래하여 군인 가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구단의 어머니(九段の 母) 음원 듣기
https://artwww.blog.me/221204486013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와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加藤 増吉1911-1963)와 어머니 가토 기미에(加藤 喜美枝1913-1981) (출처 google)
미소라 히바리 부모가 운영하던 생선 가게 우오마스(魚増) (출처 google)
九段の母 / 美空ひばり
作詞:石松秋二 作曲:能代八郎。
https://www.youtube.com/watch?v=10o8dWULtjY
上野駅から 九段まで
かってしらない じれったさ
杖をたよりに 一日がかり
せがれきたぞや 会いにきた
空をつくよな 大鳥居(おおとりい)
こんな立派な おやしろに
神とまつられ もったいなさよ
母は泣けます うれしさに
両手あわせて ひざまずき
おがむはずみの おねんぶつ
はっと気づいて うろたえました
せがれゆるせよ 田舎もの
鳶が鷹の子 うんだよで
いまじゃ果報が 身にあまる
金鵄勲章(きんしくんしょう)が みせたいばかり
逢いにきたぞや 九段坂
*우에노 에키 카라 *쿠단 마데
*上野 駅から *九段まで
*<우에노>역에 내려서 *<쿠단>까지
캇테 시라나이 지렛 타사
勝手 知らない 焦れったさ
가는길을 잘 몰라 애를 태우며
쓰에오 타요리니 이치니치 가카리
杖を 頼りに 一日 がかり
지팡이에 의지해 하루종일 걸려서
세가레 키타 조야 아이니 키타
伜 来たぞや 逢いに 来た
내아들 왔 느 냐 너를 만나러 왔다
* 上野駅 = 東京에서 北東地方으로 나가는 始発駅, 北東地方에 東京으로 들어오는 終着駅。
* 九段 = 東京都 千代田区 (東京 中心部)의 地名으로, 이곳 九段坂에 第2次大戰에서 戰死한 장병들 위패를 안치한 <靖国神社>(아베총리참배가 문제가 되고있는)가 位置 해 있는 곳으로, 노래 주인공인 할머니가 일본東北 어느 시골에서 上野駅 에 도착, <靖国神社>가있는 九段까지(거의 영등포역~ 서울역 까지의 거리) 전사한 자기 아들의 위패가 안치되어있는 <靖国神社>까지 가는길 사정을몰라 하루종일 걸려 지팡이에 의지해 찾아가는 事情을 노래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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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오 쓰쿠 요나 *오오 토리이
空を 衝くよな *大鳥居
하늘을 찌를 듯한 *커다란<토리이>
콘 나 립파나 오야시로니
斯んな 立派な おやしろに
이렇게 훌륭한 신사(神社)에
카미토 마쓰라레 못타이 나사요
神と 祀られ 勿体 なさよ
신으로 모셔져서 황송한 마음에
하하와 나케 마스 우레 시사니
母は 泣けます 嬉しさに
엄마는 눈물이 나옵니다 기쁜 마음에
* 大鳥居 = <鳥居>(토리이>는 일본 절 <神社>入口에 세워놓은 큰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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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오테 아와세테 히자마 즈키
両手 合わせて ひざまずき
두손을 합장하고 무릎을 꿇고
오가무 하즈미노 오 넴 부쓰
拝む はずみの 御 念仏
빌다가 엉겁결에 나온 염 불
핫토 키즈이테 우로 타에 마시타
ハッと 気付いて 狼狽え ました
문득 깨닫고는 당 황 했 습 니 다
세가레 유루세요 이니카 모노
伜 許せよ 田舎者
아들아 용서해라 시골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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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가 타카노 코 운다 요데
鳶が 鷹の子 生んだ 様で
솔개가 매 새끼를 낳은것 같아
이마쟈 카호가 미니 아마루
今じゃ 果報が 身に 余る
이제는 과보가 분에 넘치는
킨시 쿤쇼오가 미세타이 바카리
金鵄 勲章が 見せたいばかり
무 공 훈 장 을 보여주고 싶을 뿐
아이니 키타 조야 쿠단 자카
逢いに 来たぞや 九段坂
만나러 왔 단 다 <쿠단 자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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