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혼을 위하여 (158) - ‘미소라 히바리’ 가족 이야기
.breaknews.com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2/08 [18:35]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加藤 増吉. 1911~1963)는 1935년 24세 나이에 22살 나이의 도쿄 출신의 ‘가토 기미에’(加藤 喜美枝. 1913~1981) 와 결혼하였습니다.
2년 후인 1935년 5월 29일 큰딸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1937~1989)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이소고구 다키가시라 2정목’(横浜市 磯子区 滝頭2丁目)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본명은 ‘가토 가즈에’(加藤 和枝)입니다.
이후 1939년 ‘히바리’의 여동생 ‘사토 세츠코’(佐藤 勢津子. 1939~)가 태어났으며 1941년 남동생인 장남 ‘가토 데츠야’(加藤 哲也.1941~1983)가 본명 ‘가토 마스오’(加藤 益夫)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943년 둘째 남동생이며 막내인 ‘카야마 다케히코’(香山 武彦. 1943~1985) 가 본명 가토 다케히코’(加藤 武彦)로 태어났습니다. 나중에 자세하게 이를 언급 하겠지만 '히바리'의 세 동생은 모두 가수와 배우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렇게 2남 2녀의 자녀를 둔 ‘히바리’의 부모는 ‘다카가시라 2정목’(滝頭 2丁目)에 자리한 다카가시라 초등학교 방향의 지붕이 없는 시장(屋根なし市場)끝머리에서 ‘우오마스’(魚増)라는 생선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 (좌)히바리 부모가 운영하던 생선가게 ‘우오마스’(魚増)터 (중) ‘다키가시라’ 초등학교 사 사진 (우) 히바리 아버지 출정식 날 기족 사진 출처: http://daddy99432you.wixsite.comhttps://ameblo.jp/tamaorihime/entry-11498194208.html © 브레이크뉴스 |
‘미소라 히바리’는 그가 태어나 자랐던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네 살 무렵에 ‘오구라햐쿠닌잇슈’(小倉百人一首)라는 시조와 같은 단가집(短歌集)을 거의 암송하고 있었을 만큼 어려서부터 뛰어난 기억력을 바탕으로 선천적인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단가집(短歌集) ‘햐쿠닌잇슈’(百人一首)는 ‘아스카 시대’(飛鳥 時代)의 ‘덴지 천황’(天智天皇. 626~672) 에서부터 ‘가마쿠라 시대’(鎌倉 時代)의 ‘슌도쿠 천황’(順徳 天皇. 1197~1242)에 이르기까지 100인의 단가를 일본 중세 시대 최고의 가인(歌人) ‘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 定家. 1162~1241)가 선별하여 엮은 책입니다.
여기서 잠시 ‘단가’(短歌) 와 ‘하이쿠’(俳句) 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단가’(短歌) 와 ‘하이쿠’(俳句) 는 모두 정형적인 운율을 가진 ‘시가’(詩歌) 입니다. ‘단가’는 ‘와카’(和歌) 로도 표현되는 즉 일본의 노래 ‘왜가’(倭歌) 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회 집단의 감정을 담은 가요(歌謠)와 다르게 개인적인 사유의 철학과 감정을 표현하여 지은 시가(詩歌)입니다. 이러한 단가는 ‘한시’(漢詩) 에 대비되는 일본의 시라는 뜻을 품고 있으며 5·7·5.7.7의 정형적인 운율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하이쿠’(俳句) 는 더욱 함축된 5·7·5의 운율로 이루어진 단형시로 이러한 ‘하이쿠’는 계절을 나타내는 즉 봄을 상징하는 ‘봄바람’ (하루가제-春風)이거나 ‘민들레’(단포포-タンポポ)와 같은 계절어 ‘기고’(季語) 가 반드시 구성되어야 합니다.
이렇듯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재능과 음악적 감성을 가지고 있었던 ‘히바리’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동네의 주요한 연회에 초청되어 노래를 불렀을 만큼 뛰어난 노래 실력을 자랑하였습니다. 이러한 바탕은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의 음악적인 재능에서 물려받은 것으로 ‘히바리’의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는 뛰어난 클라리넷 연주와 함께 동네에서 널리 알려진 노래 실력을 갖추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훗날 '미소라 악단'이 세워지면서 분명하게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히바리’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는 히바리가 6살 되던 해 1943년 6월 ‘요코스카해병단’(横須賀海兵団)에 징집되어 입대하였습니다. ‘요코스카해병단’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가나가와현 요코스카(横須賀)시에 있던 일본 해군 부대로 일반적으로 '요코진'(横鎮)으로 불렀던 요코스카 진주부'(横須賀鎮守府)가 관할하던 부대입니다. 군항의 경비에서부터 해군의 효율적인 전투력을 위하여 편제된 부대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출병식이 열리던 요코하마에는 입대하는 군인과 이를 환송하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습니다. 이때 6살 나이 ‘히바리’가 ‘구단의 어머니’(九段の 母)라는 노래를 불러 운집한 인파의 눈물바다를 만들었습니다.
‘히바리’가 불렀던 ‘구단의 어머니’(九段の 母)라는 노래는 당시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일반 유족의 참배가 처음으로 허용되었던 시기에 이 노래가 발표되었습니다. 노래는 군에 입대한 아들이 전사한 동북(東北) 시골지방의 늙은 어머니가 도쿄 우에노역(上野驛)에 도착하여 지팡이에 의지하여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区)에 있는 ‘구단언덕’(九段坂)을 넘어 하루 종일 걸어서 신사에 도착한 눈물겨운 노모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단 언덕(九段坂)은 에도 시대에는 도보로 갈 수 없었던 길로 ‘니혼바시’(日本橋)강에서 에도성 입구의 ‘다야스몬’(田安門)으로 가는 길에 9층으로 이루어진 계단이 놓이면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이후 1923년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후 다시 정비되었던 것입니다.
이 노래는 1939년 일본의 군가 가수로 잘 알려진 ‘시오 마사루’(塩 まさる.本名 塩 正吉. 1908~2003)가 불렀던 노래입니다. 애틋한 가사에 담긴 이야기로 군에서나 세간에서 당시 널리 불렸던 것입니다. 그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철도국에서 근무하다가 1937년 가수로 데뷔하여 당시 시대 상황에서 군가 풍의 노래를 많이 불렀던 가수입니다. 그는 특히 군인의 부동자세와 같은 움직임이 전혀 없는 반듯한 자세로 노래하여 군인 가수라는 별명이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잠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면 1988년 12월 KBS 가요무대에 출연한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노가수가 있었습니다.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최병호’(1916~1994) 가수이었습니다. 그는 1940년 오케 콩쿠르에 전남지역 예선을 거쳐 본선에 입상하여 8월에 데뷔하였습니다. 1941년 ‘아주까리 등불’과 1943년 ‘황포돛대’와 같은 유명한 곡을 노래한 가수입니다. 그가 바로 일본의 가수 ‘시오 마사루’와 음색과 움직임 없는 노래하는 모습이 같아 한국의 ‘시오 마사루’로 불렸던 가수입니다.
1943년 6월 ‘히바리’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가 입대한 이후 2차대전은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일본 패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1945년 5월 29일 미국의 B-29 폭격기 517대와 P-51 전투기 101대에 의한 요코하마시를 강타한 요코하마 대공습이 일어나 약 1 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마침내 1945년 8월 6일 인류 최초의 원자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이후 3일 후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다시 투하되면서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을 알리는 육성과 함께 2차대전이 종전되면서 ‘히바리’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히바리' 나이 8살이었으며 ‘다키가시라’ 초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히바리’는 군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연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음악에 대한 많은 기초를 공부하게 됩니다. 당시 노래 잘하는 생선가게 딸로 잘 알려진 ‘히바리’는 지역의 주요한 행사에 다니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때 ‘히바리’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가 개인재산을 들여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자신과 함께 드럼 그리고 트럼펫과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지역의 음악인들로 구성된 ‘미소라 악단’(美空 楽団)을 만들어 딸 '히바리'가 노래하는 무대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이 이어지면서 소녀가수 ‘히바리’의 노래에 대한 반응이 뜨거워지자 ‘히바리’ 부모는 ‘미소라 카즈에’(美空 和枝)라는 예명을 지었습니다. 쇼와(昭和)시대의 ‘和’와 어머니 이름 가토 기미에’(加藤 喜美枝)에서 ‘枝’를 합하여 이루어진 하비리의 본명 ‘가토 가즈에’(加藤 和枝)에서 ‘미소라 카즈에’(美空 和枝)로 예명을 지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명에서 오늘날의 아름다운 하늘을 나는 종달새라는 뜻을 가진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로 다시 바뀐 시기는 1947년 10월이었습니다.
‘히바리’의 공개적인 무대는 1945년 12월 ‘미소라 악단’과 8살 소녀 가수 ‘히바리’가 요코하마 ‘스기타 극장’(杉田劇場) 공연 무대에 게스트로 출연하였으며 9살이던 1946년 다시 스기타 극장 무대에 게스트로 공연하였습니다. 이후 공식적인 데뷔무대로 평가받는 무대는 1946년 9월 1일부터 요코하마 아테네극장(アテネ劇場)에서 3일간 주야 2회로 열렸던 ‘스타 가수 ‘미소라 화지(美空 和枝) 출연’ ‘미소라 악단 연주회’라는 명칭의 독립된 공연입니다.
이후 ‘히바리’는 1946년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요코하마 공원 야외 음악당에서 열렸던 '제1회 요코하마 종합 예능 경연 대회'와 12월 NHK의 아마추어 노래자랑에 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심사위원들은 어린 소녀의 너무나 능숙한 노래에 당황하면서 어린아이의 성인을 흉내내는 모창을 지적하며 합격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눈물의 고배를 연거푸 마신 ‘히바리’는 이후 1947년 1월부터 3월까지 요코하마 ‘스기타 극장’에서 열린 일본의 대표적인 만담가로 훗날 일본 만담학교를 설립하였던 만담가 ‘이구치 세이와’ 井口静波. 1898~1968)와 가수이었던 ‘오도마루’(音丸.1906~1976)부부의 공연무대에 오프닝 가수로 출연하여 큰 박수를 받게 됩니다.
이 무렵 어느 봄날 ‘요코하마 사쿠라기초’(横浜 桜木町) 야외 특설 무대에서 ‘시민 노래자랑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히바리가 불렀던 노래 ‘슬픈 대나무 피리’(悲しき竹笛)를 들은 일본 엔카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심사위원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1904~1978)가 ‘너는 이제는 이런 곳에서 노래할 아이가 아니다,’ ‘너는 지금 바로 가수다.’라는 절찬의 평가를 내렸습니다. 일본 엔카의 창시자 다운 ‘고가 마사오’의 예리한 감각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후쿠오카 출신인 '고가 마사오'는 일제 강점기에 1912년 인천에 이주하여 1914년까지 거주한 이후 서울로 옮겨 1922년 선린상고를 졸업한 인물입니다. 이후 1923년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 엔카의 창시자가 되었던 그와 '미소라 히바리'의 만남은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가 마사오’에게 절찬의 평을 들은 이후 ‘히바리’는 ‘이구치 세이와’ 부부의 지방 순회공연에 참여하게 되면서 1947년 9월 공연단 일행과 함께 ‘시코쿠’(四国) 순회공연 중에 마주쳐 오는 트럭을 피하려던 버스가 절벽으로 추락하면서 버스에 타고 있던 일행 모두가 사망하는 사고에서 혼자 살아남는 기적을 맞게 됩니다, 당시 '히바리'는 왼쪽 손목에 상처를 입고 기절하여 마을 의사의 응급조치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것입니다.
▲ (좌) 구단 언덕 그림(風俗画報』177号「東京名所図会・麹町区之部中1988) (중) ‘시오 마사루’의 구단의 어머니 앨범 (우)미소라 악단 사진 출처:https://namu.wiki/출처: https://blogs.yahoo.co.jp/tiggogawa66/58443659.html © 브레이크뉴스 |
이 사고로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는 히바리의 연예활동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히바리’는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겠습니다. 라는 강력한 소망을 밝히며 눈물로 호소하여 다시 무대에 서게 되면서 아름다운 하늘을 날며 노래하는 종달새라는 비장한 소망을 담은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1937~1989)라는 예명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1947년 10월이었습니다.
필자는 80년 전에 태어나 3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천재 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삶과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추슬러오면서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많은 개연성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상식적인 소문으로 보편화 되어있던 ‘미소라 히바리’의 재일 한국인 설에 대하여 일본이 다양한 경로와 방법을 통하여 사실이 아닌 소문이 낳은 거짓이라는 여론의 조성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이에 필자는 명확한 실증을 위하여 훗날을 기약하며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자료를 상자에 담았습니다.
이렇듯 가슴에 묻어버린 이야기들을 새롭게 헤아리게 만든 친구 김명수 교수의 감성에 이끌려 오랜 세월 동안 빛이 바랜 상자를 다시 열었습니다.
이에 다음 칼럼에서는 ‘히바리’의 여러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그동안 필자가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와 ‘히바리’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미소라 히바리’의 재일 한국인 설에 대한 의문으로 남은 역사적인 내용을 제시하여 이에 대한 답변을 요청하려 합니다.
‘미소라 히바리’ 노래 ‘구단의 어머니’(九段の 母) 음원 듣기
http://artwww.blog.me/221204486013
다음 칼럼은 (159) ’미소라 히바리‘ 일본에 묻는다.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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