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혼을 위하여 (168) 미소라 히바리 아버지에 대한 폄하의 진실
이일영 관장 ・ 2019. 8. 9. 1:07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재일 한국인 설에 대한 상식적인 정황은 헤아릴 수없이 많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논란이 뒤엉킨 사실을 헤아려 가기는 쉽지 않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오랜 세월이 지난 자료 속에서 눈에 들어오는 기록이 있었다. 그것은 1962년 4월 26일 자로 발행된 일본의 주간잡지인 주간실화 특보(週刊実話特報)에 실린 기사 내용이었다. 필자가 게재한 사진 자료의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잡지는 3대 특집 중 하나로 미소라 히바리가 중병에 있는 아버지에게 기도(美空ひばり重病の父に寄す祈り)라는 제목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를 담고 있었다.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일본 최대의 영화 제작사인 도에이(東映)와 와타나베 쿠니오(渡辺邦男1899-1981)감독을 살피게 된다. 이는 당시 히바리의 민요 시리즈 영화 중 제3탄 작품 구마모토(熊本) 민요 오데모양(おてもやん)을 바탕으로 민요의 여행 사쿠라지마(民謡の旅 桜島)라는 작품을 구마모토와 가고시마(鹿兒島)에서 현지 촬영 중이었던 것이다. 당시 촬영지인 구마모토의 야마가 온천(山鹿温泉)에 히바리를 보려는 7만 명의 인파가 인근 도시에서 몰려들었을 만큼 히바리의 인기는 일본열도를 달구고 있었다. 이와 같은 히바리에게 긴급한 상황이 감지되었다.
이는 당시 히바리 곁에 그림자처럼 존재하던 매니저이며 어머니인 가토 기미에가 며칠째 보이지 않으면서 그 사유를 추적하던 기자들 사이에 히바리 아버지 위독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취재 경쟁이 더욱 치열하였다.
그 진상은 당시 3월 1일부터 요코하마 중앙병원에 결핵으로 입원하고 있던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의 상태가 악화한 것이다. 당시 히바리의 자택과 병원 그리고 촬영장을 오가며 취재하였던 기자의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자가 찾아간 히바리 자택의 가정부에게서 상세한 상황을 얻지 못하고 병원으로 달려가 취재한 담당 의사는 현재 상태는 긴급한 상태는 아니지만 중병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어 매니저로 늘 곁에 붙어있던 어머니 가토 기미에가 남편의 간호를 위하여 병원으로 떠나 혼자 있던 촬영장의 히바리는 촬영 일정에 밀려 아버지에게 가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어 히바리가 구마모토 촬영에 들어가면서 만났던 아버지에게서 유언을 들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뜻은 지켜 내고 싶다는 히바리의 매우 깊은 생각을 전하고 있다. 또한, 무엇이든 나를 잘 아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히바리의 말을 전하면서 어떤 각오를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기자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어 기자는 천재 스타의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의 조용한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 히바리 아버지가 스타의 부모라는 사실을 과시하거나 명성을 이용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딸 히바리에 대하여 깊은 배려를 하며 스타로 성장하는 딸의 모습을 따뜻하게 지켜온 인물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어 히바리 아버지가 히바리 어머니를 만나 결혼한 이야기에서부터 삶의 터전이었던 생선가게를 통하여 부인과 함께 딸의 음악적 재능을 키워온 그 중요한 바탕이 바로 아버지라는 사실을 담고 있었다. 또한, 생선가게 이후 1945년 히바리 아버지가 전쟁 종전 후 군에서 돌아와 개업하였던 미소라의 초밥집(美之 壽詞) 이야기와 함께 당시 최근 부동산 회사(藤美産業)를 설립한 이야기까지 기록하고 있있다.
이와 함께 히바리의 천재적인 재능을 살려주기 위하여 당시 패전 이후 요코하마 해군 군악대에서 입찰에 내놓은 악기 작은북과 기타와 그리고 트럼펫 바이올린 클라리넷등을 사들이고 요코하마 청년단이 소장한 큰 북을 빌려 미소라 악단을 만들었던 내용에 이르기까지 실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필자가 많은 자료를 헤아려 오면서 가장 실체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쓰인 기사로 느껴진 자료였다.)
이와 같은 기사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로 기사를 매듭짓고 있었다. 그것은 히바리 아버지가 표면에 나설 수 없는 처지가 있었지만, 그는 본래 나서기를 싫어하는 성품이었다는 내용이었다. 필자는 이와 같은 히바리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의 표면에 설 수 없는 처지라고 써 내려간 일본 기자의 행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여기서 필자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헤아린다. 이와 같은 기사가 쓰인 시점인 1962년 4월 26일 자 히바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히바리가 모두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와 이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 일본의 모든 언론의 방향과 기록이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는 사실이다.
특히 요즘 쉽게 접할 수 있는 히바리 관련 영상 자료와 기록물을 살펴보면 35년간 딸 히바리의 매니저로 활약한 어머니에게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특히 이와 같은 히바리 어머니 가토 기미에와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의 불화설과 이혼설을 단골 스토리로 구성한다. 히바리 아버지는 딸의 연예 활동을 반대한 폭력적이며 방탕한 아버지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세월이 흐를수록 국민가수의 삶을 추모하고 회고하는 일본의 주요한 텔레비전 방송 특집의 모든 영상 자료에서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강하게 제기하는 의문이 있다. 왜? 일본의 가장 위대한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부모에 대하여 이와 같은 차별화된 변화가 생겨난 사실이다. 특히 어머니 가토 기미에는 갈수록 미화되는 이야기가 늘어나면서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에 대한 부분은 갈수록 폄하된 이미지로 변화하는 까닭이다.
여러 정황과 자료를 종합하여 보면 히바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렇게 불편한 사이가 아니었다. 히바리가 스타로 발돋움하면서 히바리 곁에 존재하였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를 왜곡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이에 히바리는 자신의 자서전에 아버지 곁에서 어머니를 빼앗아버린 죄송함을 몇 번이고 회고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과 다르게 기록되어가고 있는 부분이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생전의 사실과 같았던 소문과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왜곡에서 오는 가능성이 느껴지는 점이다. 필자는 이를 깊게 주시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히바리가 구마모토 촬영에 들어가면서 만났던 아버지에게서 유언을 들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아버지 뜻은 지켜 내고 싶다며 어떤 각오를 품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는 기자의 인터뷰 기사에 담긴 행간이 자꾸만 지워지지 않는다.
여기서 살펴지게 되는 실로 중요한 내용이 있다. 이와 같은 기사가 보도된 1962년 4월 26일 이후 상황을 살펴야 한다. 1962년 5월 29일 미소라 히바리는 한 살 연하의 가수이며 배우인 고바야시 아키라小林 旭.1938-와 약혼식을 발표하였다. 당시 고바야시 아키라 또한 공개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조명 기사 출신의 아버지가 재일 한국인으로 알려진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는 사실과 다름없는 소문의 인물이었다.
이후 1962년 11월 5일 25세의 미소라 히바리와 24세의 고바야시 아키라가 세간의 화제 속에 새기의 결혼식'을 치렀다. 이와 같은 사랑하는 딸 히바리 결혼식이 이루어진 이후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는 11월 어느 날 병세가 악화하여 다시 병원에 입원한 이후 다음 해 1963년 2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이와 같은 히바리의 결혼은 호적에 기재되지 않는 동거 형태의 결혼이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결국 이와 같은 결혼은 1년 반이 지난 후 1964년 6월 25일 오후 3시 고바야시 아키라는 자택에서 미소라 히바리는 오후 4시 30분 신주쿠 코마 극장에서 이혼을 발표하였다. 당시 이혼 배경은 많은 소문이 있었지만, 히바리 어머니 가토 기미에와 연관된 부분이 많았다.
필자가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삶과 천재적인 예능에 담긴 이야기를 헤아려오면서 가장 큰 의문으로 생각하는 것은 미소라 히바리의 친족의 가계에 대한 자료가 놀라울 만큼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의 전후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자랑스러운 인물로 꼽히는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집안의 정확한 이력과 계보가 없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하늘에서 떨어진 고아가 아닌 이상 아버지와 어머니를 낳은 위에 할아버지가 존재하고 그 할아버지를 낳은 증조할아버지가 존재하는 것은 천륜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일반인도 몇 대에 이르는 집안의 족보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가장 주요한 인물로 추앙받는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에 대한 자료가 철저하게 미궁인 사실은 그만큼 드러내지 못할 사정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일본에 묻는다. 일본 전후의 역사에 부흥의 정신으로 자리한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그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빈곤하고 몰락한 가계에서 태어났다 한들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이는 히바리의 더욱 소중한 정신과 빛나는 탄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국경을 떠나 가슴을 열어 존경할 일이다. 이와 같은 미소라 히바리의 친가 가계가 일반인이 공감할 수 있도록 명쾌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허공의 바람처럼 떠돌고 있는 사실은 일본이라는 치밀한 체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사실이다. 미소라 히바리의 조상의 계보를 행정부처가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사실 그대로 명확하게 밝혀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일본의 가사등록제도의 역사를 근대적 관점에서 보면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시대가 열린 1868년 정부가 도쿄로 이전하기도 전인 10월 시급하게 교토 정부에서 시행된 일본의 가사등록제도가 있었다. 이는 그만큼 가사등록제도의 소중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에도시대부터 전해오던 사농공상으로 구분된 신분별 인별장(人別帳)을 폐지하면서 근대적인 가사등록제도를 구현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에 따라 일본 정부는 미소라 히바리의 가계에 대한 내용을 명확하게 밝혀주기를 바란다. 이는 일본 현대사에서 가장 뜨거운 국민의 사랑을 받았으며 이에 일본 정부가 수여한 최고의 명예로운 국민 영예상을 수상한 수상자에게 일본 정부가 취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일본인은 일본 최대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 아버지에 대한 폄하가 날이 갈수록 심해 가는지에 대하여 가슴에 손을 얹고 성찰하여야 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딸의 예능 활동을 만류하였던 이 세상 어느 나라 아버지라도 당연히 가져야 할 딸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그토록 폭력적이고 진실과 거리가 먼 내용으로 폄하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가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여러 정황에 대하여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본이 취하는 이와 같은 너무나 많은 의문스러운 사실에 대하여 진실의 등불이 켜지기를 역사의 이름으로 기대한다.
다음 내용은 필자의 추정을 정리한 것이다,
(필자가 여러 자료를 취합하여 추정하는 내용은 이렇게 정리된다. 히바리 아버지는 유언으로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딸 히바리에게 자신의 생전에 재일한국인과의 결혼을 부탁하였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히바리 어머니는 이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히바리가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은 지켜드려야 한다는 강한 설득에 개입한 인물이 당시 히바리의 아버지의 존재와 같았던 다오카 가즈오(田岡一雄1913-1981) 야마구치 조 3대 조장이다.
그는 히바리의 소속사인 야마구치흥행구락부를 운영하며 히바리의 실질적인 후원자로 일본의 국민가수 히바리를 키워낸 인물이다. 이에 그의 주선으로 히바리 아버지의 병중에 1962년 5월 29일 미소라 히바리가 한 살 연하의 가수이며 배우인 고바야시 아키라小林 旭.1938-와 약혼식이 발표되었다.
이후 1962년 11월 5일 25세의 미소라 히바리와 24세의 고바야시 아키라가 결혼식'을 치렀다. 이와 같은 사랑하는 딸 히바리 결혼식이 이루어진 이후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加藤 増吉. 1911~1963)는 11월 중순 병세가 악화하여 다시 병원에 입원한 이후 다음 해 1963년 2월 1일 세상을 떠났다.
당시 또한 공개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조명 기사 출신의 아버지가 재일 한국인으로 알려진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는 사실과 다름없는 소문의 인물이었다. 여기서 히바리 어머니는 호적 혼을 강하게 거부하여 혼인신고가 되지 않은 상태로 동거하다가 1년 반이 지난 1964년 6월 25일 오후 3시 이혼을 발표하였다.
당시 이혼 배경은 히바리 어머니와 사위 고바야시 아키라의 불화내용과 함께 히바리 어머니의 강한 입김이 있었음은 여러 가사에서 확인되는 내용이다. 또한, 고바야시 아키라가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히바리와의 결혼이 야마구치 3대 조장인 다오카 가즈오의 강한 요청이 큰 작용을 하였음을 스스로 밝힌 내용이다. 이후 히바리는 집안의 장남이었던 남동생 가토 데츠야의 아들 가토 가즈야(加藤和也. 1971-)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 시킨 후 호적에서는 평생 독신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그동안 헤아려온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필자의 추정이다 .)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1962년 4월 26일 자 일본 주간잡지 주간실화 특보(週刊実話特報) 미소하 히바리 기사 (미소라 히바리가 중병에 있는 아버지에게 기도-美空ひばり重病の父に寄す祈り) 와 부녀 사진 (출처 google)
芸道一代(美空ひばり)
게이도-이치다이, 예도 한평생
唄 : 美空ひばり (昭和 42年)
作詞: 西條八十 作曲: 山本丈晴
www.youtube.com/watch?v=WMo2_deHg4c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정은 생모 고용희의 45년 전 사진 일본서 발견 (0) | 2021.04.05 |
---|---|
"北 김정은 생모 고영희 베일 벗었다"<마이니치> (0) | 2021.04.05 |
예술혼을 위하여, 일본이 집착하는 미소라 히바리의 비밀 (0) | 2021.04.04 |
예술혼을 위하여 - ‘미소라 히바리’ 가족 이야기 (0) | 2021.04.04 |
ASEAN's role in Myanmar's military coup (0) | 2021.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