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혼을 위하여 (160) 일본이 집착하는 미소라 히바리의 비밀
이일영 관장 ・ 2019. 8. 6. 10:48
자신들에게 유리한 역사만 존재하는 일본의 연이은 만행을 지켜보며 스쳐가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군 한류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의 문화가 해외로 전파되는 현상에 대하여 한류라는 분명한 명칭이 사용된 배경은 KBS 드라마 겨울연가가 2002년 3월 종방된 이후 2004년 일본에 수출되면서 일본 열도에 겨울연가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이다.
당시 주연을 맡았던 배용준은 함께 출연하였던 최지우와 가장 인기 있는 스타가 되어 왕족과 같은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욘사마(勇さま)라는 호칭으로 일본 최대의 한류스타가 되었다.
이후 MBC에서 방영되었던 54부작 드라마 대장금이 2004년 3월 종방되면서 같은 해 10월 일본의 국영방송 NHK에 방영되었다, 당시 열연하였던 탤런트 이영애와 함께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가 한류의 바람으로 일본 열도를 강타하였다. 이와 같은 열풍은 박용하, 이병헌, 권상우, 원빈, 송승헌, 이준기, 장근석과 같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연예인으로 이어지면서 보아, 동방신기, 소녀시대, 카라와 같은 가수들까지 가세하면서 한류의 열풍은 일본 구석구석에 뜨거웠다.
이와 같은 한류의 바람이 어느 날 태풍이 그친 고요처럼 다가왔다. 일반적으로 이에 대하여 2012년 8월 10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시기로 알고 있지만, 엄밀하게 살펴보면 2011년에 발생한 후지TV 사건에서부터 시작된 내용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후지 TV 사건을 살펴보면 일본의 영화배우 다카오카 소우스케高岡奏輔1982-를 살피게 된다. 그는 아사히 TV 계열의 드라마 천국의 Kiss를 통하여 1999년 데뷔하였다. 이후 많은 활동으로 2005년 다카사키 영화제에서 최우수 신인 배우상을 받았다. 이후 2011년 일본 영화 프로페셔널 대상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유명 배우이다. 그는 2005년 이즈츠카 즈유키 감독이 제작한 영화 박치기에서 재일조선인 리안성 역을 맡아 극 중의 경자 역을 맡았던 여배우 사와지리 에리카와 열연하면서 인기 배우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당시 이 영화는 2006년 국내에서도 개봉되었다.
그는 53회 칸 영화제에서 국제 비평가 연맹상을 받은 일본의 여배우 미야자키 아오이와 결혼하여 2011년 이혼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소속되어있던 후지TV가 한국 K-POP에 대한 안내와 프로의 편성이 집중되어 한류의 인기를 과대광고하고 있다는 글을 SNS에 올렸다. 이를 빌미로 일본 극우세력이 편승하여 대규모의 혐한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던 후지TV 사건의 장본인이다.
이와 같은 바람에 편승하여 등장하는 인물이 있었다. 일본의 논픽션 작가 요시다츠카사(吉田司1945-)이다. 그는 당시 한국의 한류 문화 K-POP의 시너지로 인하여 일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의 점유율이 떨어진 원인임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어 그는 이와 같은 우리의 시위는 적합하지만, 그 시기가 늦었다고 부추겼다. 이와 같은 논픽션 작가 요시다츠카사는 구마모토현의 미나마타만에서 발생한 유기 수은 중독증 미나마타병 환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게게센키(下下戦記)로 1988년 오야 소이치 논픽션 상을 받은 이후 대표적인 작가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논픽션 작가 요시다츠카사가 1999년 출판하였던 (스타 탄생과 신 부흥기의 정신)이라는 책이 있다. 그는 당시 책에서 가부키 배우에서 영화배우로 성공한 요로즈야 켄노스케(1932-1997)와 쇼와 시대의 대표적인 배우 이시하라 유지로(1934-1987) 그리고 텔레비전 전환 시기의 배우로 일본 영화사에 한 페이지를 남긴 아츠미 기요시(1928-1996)와 미소라 히바리와 같은 스타의 탄생을 통하여 일본 부흥의 정신이 이루어졌음을 정리하였다. 이후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2003년 (히바리와 유지로의 쇼와 시대의 수수께끼)라는 책을 통하여 미소라 히바리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의 전설적인 가수 미소라 히바리는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일본 대중문화사의 전설이다. 이와 같은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계라는 소문은 가수의 생전에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가수가 세상을 떠나면서 실체적으로 증명되는 내용이 없었던 공공연한 소문은 일본인에 의하여 뭇매를 맞아야 했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하는 대목은 가수 생전에 사실로 인정되던 소문 시절에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일본이 가수가 세상을 떠나면서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펄펄 뛰기 시작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일본 대중가요사의 전설 미소라 히바리의 한국계 혈통에 관한 많은 이야기 중에서 우리나라에서도 화제가 된 사건이 있었다. 이는 KBS 기자와 일본 특파원을 역임하고 전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던 전여옥 전 의원이 1993년 일본은 없다는 책을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후 1997년 재 발행된 책은 슬픈 일본인(悲しい日本人)으로 일본에서도 출판되었다. 이때 유재순 재일 르포작가는 자신의 원고 (일본인 그는 누구인가?) 가 표절 사실을 주장하였다. 2004년 7월 오마이뉴스가 이와 같은 내용을 인터뷰하여 보도하였다. 이에 전여옥 전 의원은 명예훼손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2007년 1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으며 2012년 최종 패소되었다.
당시 재판부의 판결 기록을 보면 유재순 작가의 원고 중에서 미소라 히바리의 외 할아버지를 한국인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었으나 유재순 작가가 취재를 통하여 이를 수정하면서 그의 아버지가 한국인으로 주장하였다. 전여옥 전 의원의 일본은 없다 에서는 이와 같은 내용이 수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실린 사실을 중시하여 판결의 주요한 바탕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렇듯 많은 화제를 가지고 있으며 의문으로 존재하는 미소라 히바리의 한국계에 대한 내용을 일본에 명확하게 제시할 증거와 기록은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에 필자는 미소라 히바리의 여러 자료와 함께 미소라 히바리가 재일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였던 시대 상황으로 거슬러 오르는 긴 헤아림을 시작한다.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출처 google)
美空ひばり-港町十三番地1957
石本美由起 作詞 上原げんと 作曲 1957/3
https://www.youtube.com/watch?v=FG1uv1Yk5N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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