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Bonnie Banks o' Loch Lomond,

Jimie 2020. 5. 3. 14:37

 

The Jacobite rising of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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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nnie Banks O' Loch Lomo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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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희관 17.07.27  

 

The Jacobite rising of 1745, also known as the Forty-five Rebellion or simply the '45 (Scottish Gaelic: Bliadhna Theàrlaich [ˈpliən̪ˠə ˈhjaːrˠl̪ˠɪç], "The Year of Charles"),

was an attempt by Charles Edward Stuart to regain the British throne for his father, James Francis Edward Stuart. It took place during the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when the bulk of the British Army was fighting in mainland Europe, and proved to be the last in a series of revolts that began in 1689, with major outbreaks in 1708, 1715 and 1719.


Charles launched the rebellion on 19 August 1745 at Glenfinnan in the Scottish Highlands, capturing Edinburgh and winning the Battle of Prestonpans in September.

At a council in October, the Scots agreed to invade England after Charles assured them of substantial support from English Jacobites and a simultaneous French landing in Southern England. On that basis, the Jacobite army entered England in early November, reaching Derby on 4 December, where they decided to turn back.

 

Similar discussions had taken place at Carlisle, Preston and Manchester and many felt they had gone too far already. The invasion route had been selected to cross areas considered strongly Jacobite but the promised English support failed to materialise; they were now outnumbered and in danger of having their retreat cut off. The decision was supported by the vast majority but caused an irretrievable split between Charles and his Scots supporters. Despite victory at Falkirk Muir in January 1746, the Battle of Culloden in April ended the Rebellion and significant backing for the Stuart cause. Charles with a price on his head escaped to permanent exile in France , but was unable to win support for another attempt, and died in Rome in 1788.  

 

 "The Bonnie Banks o' Loch Lomond", or simply "Loch Lomond" for short, is a well-known traditional Scottish song (Roud No. 9598) first published in 1841 in Vocal Melodies of Scotland.  
The song prominently features Loch Lomond, the largest Scottish loch, located between the council areas of West Dunbartonshire, Stirling and Argyll and Bute. In the Scots language, "bonnie" means "pretty, often in reference to a female.

The original composer is unknown, as is definitive information on any traditional lyrics.

 

HISTORICAL BACKGROUNDAt the time in Scottish history when "Loch Lomond" was a new song, the United Kingdom (which united Scotland, England, and Wales) had already been formed. But the Highland Scots wanted a Scottish, not an English King to rule.
Led by their Bonnie Prince Charlie (Prince Charles Edward Stuart) they attempted unsuccessfully to depose Britain's King George II. An army of 7,000 Highlanders were defeated on April 16, 1746 at the famous Battle of Culloden Moor. It is this same battle that indirectly gives rise to this beautiful song.
After the battle, many Scottish soldiers were imprisoned within England's Carlisle Castle, near the border of Scotland. "Loch Lomond" tells the story of two Scottish soldiers who were so imprisoned. one of them was to be executed, while the other was to be set free.
According to Celtic legend if someone dies in a foreign land, his spirit will travel to his homeland by "the low road" - the route for the souls of the dead. In the song, the spirit of the dead soldier shall arrive first, while the living soldier will take the "high road" over the mountains, to arrive afterwards. 
The song is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soldier who will be executed: When he sings, "ye'll tak' the high road and I'll tak' the low road" in effect he is saying that you will return alive, and I will return in spirit.
He remembers his happy past, "By yon bonnie banks ... where me and my true love were ever wont to gae [accustomed to go]" and sadly accepts his death "the broken heart it ken nae [knows no] second Spring again." 
The original folksong uses a six note scale; the seventh scale degree is absent from the melody. The lyric intertwines the sadness of the soldier's plight with images of Loch Lomond's stunning natural beauty.  
 
 
*1745년 재커바이트 봉기에서 잉글랜드군에 붙잡힌 어느 스코틀랜드 군인이 그의 연인에게 쓴 편지의 실제 이야기를 노래.
*1745년 챨스 에드워드군의 스튜어트 왕조 회복을 위한 반란이 패한후 북(스코틀랜드)으로 돌아가는 어느 병사에 의해 쓰여진 노래

*고국 떠나 죽으면 요정들이 친절하게 사자를 지하의 아랫길로 데려다준다는 겔트족의 믿음을 노래.
윗길은 죽음에 이르도록 목을 메다는 것을 뜻,
아랫길은 도보로 즉 충성심(사자,영혼)은 반역자(산자)에 앞서 고향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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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몬드 호수의 아름다운 모래톱(Bonnie Banks o' Loch Lomond)

 By yon bonnie banks an‘ by yon bonnie braes
저기 아름다운 모래톱과 저기 아름다운 산비탈 따라
류희관 17.07.27

 저기 아름다운 기슭과 둔덕  By yon bonnie banks an‘ by yon bonnie braes
로몬드 호수 위 햇빛 눈부시게 빛나던 곳  Where the sun shines bright on Loch Lomon'

내 사랑하는 이와 함께 언제나 찾아가던 곳  Where me an' my true love wIll ever meet again

그 아름답던 로몬드 호숫가 기슭이여  on the bonnie, bonnie banks o' Loch Lomon'


[Refrain]

당신은 저 높은 길로 가고 나는 낮은 길을 가리라  O ye'll tak' the high road and Ah'll tak' the low road

당신보다 나는 먼저 스코틀랜드에 가 있을 거요  An' Ah'll be in Scotlan' afore ye

하지만 나는 내 사랑과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  Fir me an' my true love will never meet again

로몬드 호숫가 그 아름다운 기슭에서  on the bonnie, bonnie banks o' Loch Lomon'


그늘진 골짜기에서 우린 헤어졌지  'Twas there that we parted in yon shady glen

벤 로몬드 봉우리의 가파른 비탈 위  on the steep, steep sides o' Ben Lomon',

하일랜드 산등성이들은 자줏빛 속에 잠겨 있고  Where in purple hue, the hielan hills we view

어스름 녘 하늘엔 달이 떠올랐지   An' the moon comin' out in the gloamin'

[Refrain]


작은 새들 노래하고 들꽃들이 피는 곳  The wee birdies sing an' the wild flouers spring

햇빛 속에 호수는 잠들어 있었지  An' in sunshine the waters are sleeping

하지만 상처 입은 내 가슴에 봄은 다시 오지 않으리   But the broken heart it kens nae second spring again

우리가 얼마나 슬퍼하는지 세상은 모를 거야  Tho' the waeful may cease frae their weeping.

[Refrain]

Some words in the Scots language:
 
yon ... yonder
bonnie ... beautiful
braes ... slopes (hillsides)
gae ... go
glen ... valley
ben ... mount (mountain)
gloaming ... twilight (dusk)
wee ... tiny
kens ... knows
nae ... no
waeful ... woeful
frae ... from

Also: wont ... accustomed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인근에 있는 로몬드 호수. ‘호수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간조시 약 60여개, 만조시 약 20여개의 섬들이 있는 로우몬드 호수는 정녕 아름답다.

 

   면적이 70㎢의 로몬드 호수는 브리튼 섬에서 가장 큰 담수호.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인 글래스고우 근교에 있는 이곳은

‘호수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해 사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스코틀랜드 민요 ‘로몬드 호수의 아름다운 기슭’ 바로 이 호수를 함께 거닐던 어느 연인들의 애절한 이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이별은 바로 전쟁 때문에 벌어졌다.

‘호수의 여왕’에 서린 슬픔

1603년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영국 왕 헨리 7세의
증손뻘이라는 이유로 왕관을 넘겨받게 된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동시에 통치하는 제임스 1세로 즉위하여 스튜어트 왕조를 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스튜어트 왕조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왕은 신으로부터 그 권력을 부여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던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는 전제정치를 펴다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으로 목이 잘리게 된다.

이후 왕정복고에 의해 찰스 2세가 즉위하였지만 그의 아우 제임스 2세도 재차 전제정치를 강행하다 명예혁명으로 왕위를 잃고
프랑스로 쫓겨났다. 이후 50여 년간 수차례 벌어진 내전의 싹이 트게 된다.

이른바 ‘자코바이트의 반란’이다.  영어 ‘제임스(James)’의 라틴 식 이름인 ‘야코부스(Jacobus, 야곱)’에서 유래한 자코바이트(Jacobite)는

그 이름부터 제임스 2세의 복위, 즉 스튜어트 왕조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좌에 다시 앉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자코바이트들은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 사람들이었다. 스코틀랜드는 북쪽의 하일랜드와 남쪽의 로랜드로 나뉘는데,
이 두 지역은 지리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언어나 습관에도 차이가 있다.

 제임스 2세는 1689년 루이 14세의 원조로 프랑스군을 이끌고 아일랜드에 상륙해 재기를 꿈꾸기도 하였지만,
이듬해 보인(Boyne)강 전투에서 참패하고 프랑스로 돌아가 10여 년 뒤 상제르망에서 병사한다. 우유부단하고 용기가 없었던 제임스 2세를
아일랜드 사람들은 ‘등신 제임스’(영어로는 더 치욕적이게도 ‘James the shit’)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하지만 이 패배도 자코바이트의 반란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수십 년 동안 폭동과 반란, 학살이 이어졌던 것이다.

1745년 7월, 스튜어트 왕가의 적통을 주장하는 왕자가 도버 해협을 건너와 스코틀랜드 땅을 밟았다.

이미 제임스 2세가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그의 손자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왕관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스코틀랜드에 상륙한 것이었다.
굳은 의지에 비해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무기와 용병들을 실은 배 2척 중 한 척은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채로 돌아갔고,
이 때문에 찰스 왕자는 제대로 된 지원도 없이 스코틀랜드에 도착했던 것이다.

 

  왕자를 맞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반응도 미지근했다.

 

이전에 있었던 여러 번의 반란이 실패한 이후. 외부의 지원이 없으면 봉기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왕자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는 자신이 타고 온 배를 프랑스로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소. 나의 충성스러운 하일랜더들이 나와 함께 서리라 믿기 때문이오.” 이렇게 또 한 번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찰스는 할아버지와 달리 ‘잘생긴 찰리 왕자’(보니 프린스 찰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외모와 언변이 좋았고 친화력도 있었다. 이런 찰스의 소문을 들은 하일랜드 곳곳에서 지원병들이 몰려들었다. 아마 로몬드 호숫가에서 사랑을 꽃피웠던 젊은이도 이 지원병들 중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찰스는 병력을 모아 먼저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인 에든버러를 점령한 다음 프레스톤팬즈에서 정부군을 격파했다.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자코바이트군이 서전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군의 대부분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느라 유럽 대륙에 파병되어 있었고, 정작 영국 내에는 병력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봉기 석 달 만에 5천 명으로 늘어난 자코바이트군은 런던을 향해 남진을 시작한다. 사기는 높았고 진군 속도는 빨랐다. 런던에서는 예금 인출 사태가 벌어졌고 전국적인 공황 상태가 뒤따랐다.

                                                            ▶‘잘생긴 찰리 왕자(Bonnie Prince Charlie)’

  자코바이트군은 런던 북쪽 200km까지 진출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영국 정부가 대륙에 파병되었던 군대를
본토로 소환하는 한편, 동맹국 네덜란드로부터 6천 명의 원군을 지원받아 단단히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찰스도 스코틀랜드와는 달리
잉글랜드에서는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찰스는 결국 군사를 되돌려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전열을 재정비한 영국 정부군의 공격을 막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1746년 4월 16일, 컬로든 근처 황무지에서 5천 명의 자코바이트군과 9천 명의 영국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자코바이트군은 지치고
굶주려 있었다. 무엇보다 영국군이
잘 훈련되고 근대식 화기를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하일랜더 군대는 장비조차 빈약했다. 이때까지
자코바이트군의 특기는 번쩍이는 칼을 치켜들고 전속력으로 적의 정면으로 달려드는 일제 돌격이었지만 이날은 이런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영국군 보병대는 이미 하일랜더들의 돌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머스킷 소총을 정비한 영국군은 3열을 유지하며 첫째 열은 무릎을 꿇은 채,
둘째 열은 약간 구부린 자세로, 셋째 열은 일어선 자세로 사격을 가해, 달려오는 자코바이트군을 저지했다. 되풀이되어 쏟아지는 총탄에
하일랜더의 대열은 갈수록 얇아졌다. 전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천여 명의 자코바이트들이 전사했고, 또 다른 1천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면 영국군은 50여 명의 전사자를 냈을 뿐이다.

  1746년 4월 16일, 컬로든 인근 드러모시 벌판에서 자코바이트군은 영국 정부군에 패배했다.

이 전투는 역사적으로 영국 본토에서 벌어졌던 마지막 지상전이었다. 컬로든의 벌판은 자코바이트 병사들이 흘린 피로 얼룩졌지만, 전투가
끝난 후에도 하일랜더들에 대한 잉글랜드군의 처참한 살육은 계속됐다. 영국군은 스코틀랜드 곳곳에서 자코바이트 반란군을 색출했고,
이렇게 붙잡힌 사람들은 대역죄로 처형당했다. 이들의 목은 창끝에 매달려 반란에 대한 본보기로 에든버러에서 런던에 이르는 마을마다
전시되었다.

컬로든(Culloden)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

  로몬드 호숫가의 그 젊은이도 그만 영국군에 사로잡혀 왔다.
당시 영국군은 체포된 반란군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게임을 했는데, 형제나 친구가 함께 반란에 참여했을 경우,
게임을 통해 한 사람은 살려주고 다른 사람은 죽이는 것이었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처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Jamie MacDougall, tenor                                                     Stephen Bell, conductor

BBC Scottish Symphony Orchestra                                     Last Night of the Proms 2013

Glasgow Green, City Hall                                                    2013.09


생의 마지막 순간,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바로 내일이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그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밤에 무엇을 떠올렸을까?

아마도 쏟아지는 햇빛이 눈부시던 그 호숫가 기슭, 그보다 더 아름다운 연인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저 높은 길로 가고 나는 낮은 길을 가리라”는 노랫말은 이 노래의 절창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하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잉글랜드의 런던을 잇는 길을 하이로드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보면, 아마도 이 ‘높은 길’은 자신의 처형
소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친구나 형제가 걸어갈 길을 뜻하는 것이겠다.

  또 자신이 걸어갈 ‘낮은 길’은 타향에서 세상을 떠난 스코틀랜드인의 영혼을 고향으로 인도한다는 요정을 따라갈 사자(死者)의 길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영혼이 산 사람보다 빨리 고향에 닿게 되어도 사랑하는 이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전쟁이 없었다면 이 노래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자식들을 낳고 기르면서 로몬드 호숫가에서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전쟁의 참혹함은 고위 지휘관의 것이 아니라 병사들과 그 가족들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게 되는 것인가 보다.

  16세기부터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로몬드 호수의 아름다운 기슭’은
오늘날 또 다른 이별 노래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버금가는 가슴 아픈 이별 노래로 세계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전재한 글(한글 부분)은 오마이뉴스 국방부 출입 김도균 기자(사회부)가
<김도균의 전쟁 노래>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기 시작한 시리즈 기사의 첫 꼭지(2014.11.09)를 전재한 것이다.
기사의 원 제목은 ‘“죽어서도 우린 만날 수 없네” 전쟁이 남긴 슬픈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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