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유수(落花流水)
지는 꽃과 흘러가는 물 ‘낙화유수’는 가는 봄의 풍경을 묘사한 말이었는데, 후에 뜻이 확대되어 힘이나 세력이 쇠해 가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출전
선옹이 푸른 잠공산에 돌아가 누우니
하룻밤 서풍에 달은 골짜기에 깊어라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 향기로운 풀 가득
서간이야 읽지만 세속의 어지러움 없어
한가로운 구름 사방에 그림자 걸어매지 않는데
들의 학이 어찌 떠나고 머무는 마음 알리
난포의 물 푸르니 봄도 저물려고 하는데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 떠나가는 게 원망스러워
仙翁歸臥翠微岑
一夜西風月峽深
松徑定知芳草合
玉書應念素塵侵
閒雲不繫東西影
野鶴寧知去住心
蘭浦蒼蒼春欲暮
落花流水怨離襟
- 이군옥(李群玉) 〈봉화장사인송진련사귀잠공산(奉和張舍人送秦煉師歸岑公山)〉
진련사(秦煉師)라는 은사가 잠공산(岑公山)으로 돌아가는 것을 송별하면서 쓴 시로, 이 시의 마지막 구에서 ‘낙화유수’가 유래했다. 다음의 자료에서도 이 성어를 찾아볼 수 있다.
「흐르는 물 떨어지는 꽃에 봄이 가니 하늘의 인간 세계로다.(流水落花春去也, 天上人間.)」
오대 시대 남당(南唐) 이욱(李煜)의 사(詞) 〈낭도사(浪淘沙)〉에 나오는 구절이다.
작사가 김다인으로 발표된
낙화유수 (落花流水)~
그 시대 최고의 반열에 있었던 문학가이자 작사가 조명암의 가사에
이봉룡이 곡을 붙혀 당대 최고의 가수 남인수가 불러 1942년에 발표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다.
노래의 원작사가 조명암이 월북해서 금지곡이 되자 박남포가 개사하여 불리게 되었다.
*박남포는 박창오, 추미림, 진방남, 반야월의 또다른 이름이다.
1962년 남인수가 세상을 떴을 때 낙화유수처럼 세상을 떴다며 낙화유수 노래와 남인수의 떠남을 연계시키기도 했다.
이봉룡
이난영은 알아도 이난영을 길러낸 오빠 이봉룡은 잘 모르는 경우가 있고, 김시스터즈는 알아도 그 그룹 막내 민자의 아버지 이봉룡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1914년에 목포에서 태어난 이봉룡은 1933년 토월회가 태양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어 목포공연에 나섰을때 박승희 단장을 찾아 이난영이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그것이 인연이 되어 뒷날까지 이난영이 이름을 떨친 명 가수가 되었고, 김씨스터즈와 김보이스를 길러내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자신은 200여곡의 명 가요를 만들어 내면서 작곡가로 성장했다.
이난영이 불러 히트한 목포는 항구다,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박경원의 나폴리연가, 고운봉의 선창, 백년설의 고향설, 그가 작곡한 노래는 오랜기간 사랑을 받으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남인수
18 세의 나이에 데뷔, 44 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취입한 노래가 천 여 곡이 넘고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 불멸의 명가수다.
1918년 경상남도 진주 출생으로, 원래 이름은 최창수(崔昌洙)였으나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 강씨 문중에 들어가면서 강문수(姜文秀)로 바뀌었다. 남인수는 가수로 데뷔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다.
북한 인민배우 최삼숙이 최창수(崔昌洙)의 조카라고 하나 확실하지가 않다. 그의 학력은 1932년 진주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했음이 일제시대 학적부를 통해 확인된다.
1935년 말에서 1936년 초 경에 시에론(Chieron)레코드사의 가수로 선발되었고, 1936년 2월 「눈물의 해협」으로 데뷔했다. 1937년 오케(Okeh)레코드사로 이적, 1938년 이부풍(李扶風) 작사, 박시춘(朴是春) 작곡의 「애수의 소야곡」으로 명성을 얻었고, 1943년까지 전속가수로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 등 130여 곡을 발표했다. 한편 1938년 발표된 「기로의 황혼」은 치안방해의 명목으로 가두연주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1942년 「강남의 나팔수」(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편곡)를 비롯해 조선군보도부(朝鮮軍報道部)에서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영화 「그대와 나[軍と僕]」(감독 허영)의 동명 주제가인 「그대와 나」(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편곡) 등을 불렀다. 태평양전쟁 말기 음반제작이 중단된 1944년 이후로는 약초(若草)가극단 등에 소속되어 무대에서 활동했으며, 1944년 9월 부민관에서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의 「성난 아시아[怒りの亞世亞]」에 출연했다.
광복 이후 음반 제작이 많아, 여러 악극단에서 무대공연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음반 제작이 재개된 1947년 이후 「가거라 삼팔선」 등을 불렀고, 1948년에는 아세아(Asia)레코드사를 통해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1949년 발매된 「여수야화」의 경우 정부와는 다른 입장에서 ‘여순(麗順)사건’을 다루어 판매금지를 당했다. 6·25 전쟁 중에는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 소속으로 군 위문활동을 했다. 이후 오리엔트(Orient)레코드사를 비롯한 다수의 음반회사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 「추억의 소야곡」 등 다수의 곡을 발표했다. 1957년 대한레코드 가수협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60년 전국공연단체연합회 회장, 1961년 한국무대예술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落花流水
1942
노래 남인수
작곡 이봉룡 작사 조명암
작사가 조명암(김다인)이 월북, 금지곡이 되자
박남포(박창오,추미림, 진방남,반야월은 동일인)가 가사를 바꾸어...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보내고 가는 것이 풍속이러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봄을
오늘도 가는곳이 꿈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오면은 가는 것이 풍속이러냐
영춘화 야들야들 곱게 피건만
시들은 내 청춘은 언제 또 피나
'소리사랑'
멤버 : 안명희(리더),이용숙,이길자,김구만,박희자,박유숙,박인자,이복순,이희신,윤미경,여명희,정옥윤,하영의,황순애
1980년대 인기 TV프로그램- MBC TV '주부가요열창'을 통해 뛰어난 가창력을 인정받은 주부 Solist들로 구성된
'소리사랑'은 가정주부들이 '노래로 밝은 사회를 만들자'는 소박한 염원으로 결성된 여성가요합창단이다.
20대에서 40대까지 열정과 지혜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소리사랑'이다.
1.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젊은 꿈을 엮은 맹서야
세월은 흘러가고 청춘도 가고
한많은 인생살이 꿈 같이 갔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2.
이 강산 흘러가는 흰 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 울어 춘삼월이냐
봄버들 하늘하늘 춤을 추노니
꽃다운 이강산에 봄맞이 가세
(이 강산 흘러가는 흰 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 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 물에 어린 봄 나루에서 행복의 물새 우는 포구로 가자)
3.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오면은 가는 것이 풍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곱게 피건만
시들은 내청춘은 언제 또 피나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보내고 가는 것이 풍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조명암(趙鳴岩, 1913년 1월 10일 ~ 1993년 5월 8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인 겸 극작가 및 대중음악 작사가로 활동하였던 전직 정치가이다.
일제강점기 「알뜰한 당신」·「울며 헤진 부산항」·「꿈꾸는 백마강」 등을 쓴 대중가요 작사가. 극작가· 연출가. 시인, 시나리오 작가
본명인 조영출(趙靈出)로도 널리 불린다. 지금까지 확인된 노골적인 군국가요 중 2/3가 조명암 가사로 친일인사로 명단에 올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문화어로 조령출이라고 부른다. 작사가로 활동하면서 이가실(李嘉實)이라는 예명을 비롯하여 김다인(金茶人), 금운탄(金雲灘)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913년 충남 아산(강원도 철원 태생이라는 설도 있음)에서 출생하여 1916년 서울로 이주, 지난날 한때 강원도 철원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훗날 강원도 금화에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가 일찍 사망한 뒤 어려운 가정 환경 때문에 금강산에서 운탄(雲灘)이라는 법명을 얻어 불교 승려로 있다가 1930년 한용운의 추천을 받아 불교계가 운영하던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32년 졸업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32년부터 시 작품을 발표하며 문필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4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작사가 활동에 들어갔다. 1936년에는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여 1941년 졸업했다. 유학 중에도 계속 대중가요 가사를 발표하였는데, 다수의 인기곡을 배출해 일제 강점기의 작사가로는 박영호와 쌍벽을 이룬다. 조명암의 가사는 박영호에 비해 섬세한 면이 돋보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영화 《그대와 나》의 주제가를 작사 하였고, 대표적인 친일 가요들인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처〉, 〈혈서지원〉, 〈2천5백만의 감격〉 를 작사한 바 있다. 그가 작사한 군국 가요는 총 9편이 알려져 있다. 극작가로도 1944년 〈승리에의 길〉이라는 친일 연극의 각본을 썼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광복 후에는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산하의 연극동맹 부위원장으로 있을 때 항일 빨치산의 활동을 주제로 한 희곡 〈독립군〉을 썼으며, 이것은 1946년 동양극장에서 상연되었다.
〈독립군〉, 〈논개〉를 비롯해 낙랑극회가 문화극장, 민중극장과 공동 공연하여 많은 관객을 모은 안영일 연출의 〈위대한 사랑〉(1947)이 연극동맹 시기의 대표작이다.
1948년 8월경 월북한 뒤 6·25전쟁 때 종군작가로 참여했으며, 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을 위한 〈조국보위의 노래〉를 발표하는 등 진중 가요를 작사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1954년 동독에서 열린 문학기념행사에 북한 대표로 참석했다. 1956년 10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 1957년 영화문학(시나리오)창작사의 초대 주필, 민족예술극장 총장, 1960년 10월 교육문화성 부상, 1962년 12월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1966년 평양가무단 단장, 1977년 평양학생소년예술단 단장, 1982년 8월 조선중국친선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한 문예계 고위직을 두루 역임했다. 1973년 국기훈장 1급 김일성훈장을 받고 1982년 4월 김일성상 계관시인 칭호를 받았다.
대한민국에서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꿈꾸는 백마강〉, 〈신라의 달밤〉, 〈선창〉, 〈알뜰한 당신〉, 〈목포는 항구다〉, 〈화류춘몽〉, 〈고향초〉, 〈낙화유수〉, 〈진주라 천리 길〉과 같은 일제 강점기의 히트곡들은 작사자의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1988년 월북 예술인들이 해금된 후에야 작사자가 조명암임을 밝힐 수 있었다.
고전인 《춘향전》을 재해석하여 민족가극인 〈춘향전〉(1960)을 집필 했는데, 이 작품은 김정일의 특별한 관심을 받아 1980년대 후반 재창작되면서 북한 공연계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취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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