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황성(荒城)의 적(跡)♬

Jimie 2021. 2. 21. 08:38

황성(荒城)옛터

 

1932

이애리수 Alice Lee

왕평(王平) 작사, 전수린(全壽麟)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d7MAV_Jz06g

 

SP [황성의 적(이애리수) / 이국의 하늘(이애리수)] [1932.04 빅터 49125-A]

 

황성옛터에 밤이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른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이뤄
구슬픈 버레 소래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의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 가엾다 이 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난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끝이없이 이발길 닿는곳
산을넘고 물을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 한없난 이심사를 가삼속 깊이품고
이몸은 흘러서 가노니 넷터야 잘있거라

 

한국 최초의 남성무용가 조택원(趙澤元)의 추천으로 동방예술단(東方藝術團)이라는 순회 극단의 효과 음악과 막간 반주 음악 연주자로 입단한 전수린이 어느 날 그의 고향인 개성에 들렀다.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의 달 밝은 밤, 역사의 무상함을 느껴 즉흥적으로 만든 가락이다. 느린 3박자의 리듬에 단음계로 만들어진 가요곡이다. 이 애수적인 멜로디가 전수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신파극단 취성좌(聚星座)의 서울 단성사(團成社) 공연 때 여배우 이애리수가 막간무대에 등장하여 이 노래를 부르자, 객석에서는 재창을 외치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며, 이애리수가 노래할 때마다 관중들도 따라 불렀다. 신경과민이던 일본경찰은 중지하라는 경고를 내렸다.

 

이렇게 막간무대를 통하여 유행되기 시작한 노래가 레코드로 출반된 것이 1932년의 빅타 판이었다. 그 뒤 이애리수는 여배우에서 가수로 환영받는 스타가 되어 전수린의 신곡을 계속 취입하게 되었다. 최초의 취입레코드 라벨에 인쇄되었던 곡명은「황성(荒城)의 적(跡)」이었다.

 

‘황성옛터’ 가수 이애리수 70여년만에 생존 확인…화려했던 과거 기억못해

경향신문 이상호기자 입력 : 2008.10.28 18:05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1절)

배정환 한국보도사진가협회 회원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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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대상을 담은 대중가요 ‘황성옛터’. 1928년 망국의 한을 담은 ‘황성옛터’를 불러 첫 ‘국민가수’로 불린 이애리수씨(98·본명 이음전·사진)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28일 확인됐다. 이씨는 1930년대 결혼과 함께 연예계에서 자취를 감춘 뒤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이씨는 경기 고양시 일산 백송마을의 한 아파트형 요양시설에서 3년 전부터 간병인과 자녀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지만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다. 이씨는 고령으로 인해 화려했던 자신의 지난 시절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를 돌보고 있는 요양원 간병인 이모씨(55)는 “지난 여름 크게 앓으신 적은 있지만 현재는 식사도 잘하시고 건강하신 편”이라며 “하지만 자신이 과거 유명한 가수였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이씨의 ‘애리수’라는 예명은 서양 이름 ‘앨리스’에서 따온 것으로 ‘이애리스’라고 표기되기도 했다.

 

단성사에서 막간 가수 활동을 하던 이씨는 1928년 ‘황성옛터’를 불러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18세였던 이씨는 단성사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르다 나라 잃은 설움에 복받쳐 울음을 참지 못했고, 객석은 눈물바다가 됐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일제 순사들은 공연을 중단시켰고, 공연 관계자들은 경찰서로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황성옛터’는 1932년 빅타 레코드에서 ‘황성(荒城)의 적(跡)’이라는 음반으로 발매된 후에는 더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로는 기록적인 물량인 5만장이 팔렸다. 이 가요는 나라를 잃은 아픔을 빗댄 가사와 곡조로 조선총독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급속히 퍼져나가 국민가요로 자리잡았다.

 

희망가(1921년), 윤심덕의 ‘사의찬미’(1926) 등 초창기 대중가요는 대부분 일본곡이나 유럽곡을 개사한 것이지만 ‘황성옛터’는 한국인이 작사·작곡한 첫 대중가요다. 전수린씨가 작곡하고 왕평씨가 가사를 썼다.

 

 

개성에서 태어나 9세에 극단에 들어가 배우 겸 가수로 활동하던 이씨는 22세 때에 연희전문학교 재학생이던 남편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지만 집안에서 반대하자 자살을 시도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결혼해 2남7녀를 낳아 기르면서 대중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볼록거울> '황성 옛터'

입력 2008. 10. 29. 10:51 수정 2008. 10. 30. 10:04 댓글 0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 폐허의 설은 회포로 말하여 주노나 /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루어 /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 지어요."

가요 '황성 옛터'는 개성 만월대에 적요하게 내려앉는 달빛과 쓸쓸한 가을 정경을 그려낸다. 곡조 사이사이마다 망국 고려를 향한 설움과 그리움이 절절이 배어 있다. 단장의 아픔이기도 하겠다.

작곡자 전수린은 연극 공연단을 따라 개성에 갔다가 달빛 처량한 만월대에서 고려 사직의 흥망성쇠를 회고하며 깊은 사념에 잠겼다. 그 옆에는 작사자 왕평이 앉아 있었다. 개성은 전수린의 고향이기도 했다.

 

작곡가 황문평의 회고에 따르면, 전수린은 훗날 송도의 옛 궁성터의 무상함을 다시금 떠올리고선 역사의 허무한 감정을 바이올린에 실어 즉흥 연주한 뒤 곧바로 오선지에 멜로디를 그려넣었다. 이를 전해 들은 왕평이 전광석화처럼 '황성(荒城)의 적(跡)'이라는 제목으로 가사를 썼다.

 

전수린이 22살 나이인 1929년에 작곡한 '황성의 적'을 맨처음 무대에서 부른 배우는 동방예술단 소속의 신일선(申一仙). 연극 막간에 이 노래를 열창하면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며 따라 불렀다. 망국의 설움이라는 점에서 고려나 조선은 서로 닮았다.

 

이 노래가 대중의 폭발적 사랑을 받은 것은 무대배우 겸 가수인 이애리수(李愛梨秀)가 음반을 내면서였다. 그녀 역시 개성 출신이었다. 1932년 빅터레코드사는 '황성의 적'이라는 제목으로 시장에 내놨는데, 그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극히 일부에 소리판(레코드)과 유성기(축음기)가 보급됐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할 때 발매와 동시에 5만 장이 불티나게 팔렸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을 미뤄 짐작게 한다. 일본인들조차 '조선의 세레나데'라며 이 노래를 좋아했다니 말이다.

 

이처럼 큰 인기를 얻으면서 무명의 이애리수는 일약 민족의 연인이자 최초의 스타가수가 됐다. 그리고 '황성의 적'은 '황성 옛터'로 제목이 바뀌어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이애리수의 공연장인 단성사는 연일 만원사례 속에 함성과 박수로 들끓었다.

 

호사다마일까? 민중들의 뜨거운 사랑이 쏟아지자 일제는 아연 긴장했다. 조선 민족의 자각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며 음반 발매를 금지한 것이다. 단성사 공연이 중단 소동을 빚은 가운데, 노래의 관련자인 전수린, 왕평, 이애리수는 경찰에 붙들려가 조사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었다. 음악시간에 아이들에게 '황성 옛터'를 가르친 초등학교 교사가 구속됐고, 그 학교 교장은 연대책임을 져야 했다. 반야월 또한 신인가수 시절에 이 노래를 불렀다가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 된통 혼이 난 뒤 겨우 풀려났다.

 

'철학교수와 대중가요의 만남'을 쓴 정영도 동아대 철학과 교수는 "이 노래의 이면에 깔린 근본 이념은 나라 빼앗긴 현실을 울분으로 통곡하는 민족의 감정이며 그 정서가 밀물처럼 우리 가슴 속으로 스며온다"고 말한다.

 

잊혀졌던 가수 이애리수가 생존해 있음이 언론보도로 알려졌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은 경기도의 한 요양원. 아흔아홉 고령임에도 비교적 건강한 모습인 그녀는 기자가 '황성 옛터'와의 인연을 묻자 '몰라'라며 입을 닫았다고 한다.

 

그녀가 무대를 떠난 이유는 이렇다. 스물두 살 때 연희전문학교 재학생이던 배동필과 열애를 했는데, 배씨의 가족이 반대하자 둘이 면도칼로 손목을 긋고 동반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결국 배씨 부친은 그녀가 가수 출신임을 일체 발설하지 않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부부의 연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이애리수의 생존 사실은 까마득한 전설이 되살아온 듯한 감회를 안겨준다. 2남 7녀를 낳아 기르면서 70여년 동안 익명 속에 칩거해온 그녀의 삶이 가슴을 짠하게 한다. 맏아들조차 어머니가 '황성 옛터'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대학 시절에 처음 알았다니 말이다.

 

노랫말 '성은 허무러져 빈 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 세상의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가 오늘따라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