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파 [靑鹿派] 조지훈(趙芝薰)
청록파 [靑鹿派] 조지훈(趙芝薰)
조지훈(趙芝薰, 1921~1968)은 본관은 한양(漢陽). 본명은 조동탁(趙東卓). 1921년 경북 영양군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조헌영(趙憲泳)이며, 어머니는 전주 류씨(全州柳氏)이다. 4남매 중 둘째 아들이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보통학교 3년을 수학하고 1941년 21세에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에 앞서 20세에 안동 출신의 김난희(金蘭姬)와 혼인하였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고,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하였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에 전국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성균관 유생 출신의 한학자인 할아버지와 개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익힌 그는
보통학교 3년을 수학하고 1938년 혜화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1941년 21세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에 앞서 20세에 안동 출신의 김난희(金蘭姬)와 혼인하였다.
학우지 『백지』를 통해 습작 활동을 하던 그는 같은 학교 2학년 때 『문장』 4월호에 투고한 시 「고풍 의상」으로 청록파 중 가장 먼저 초회 추천을 받는 영광을 안게 된다. 그 뒤 「승무」 · 「봉황수」 · 「향문」 등의 작품으로 세 번의 심사를 거쳐 “자연과 인공의 극치” 를 이룩한 시인이라는 찬사를 들으면서 이듬해인 1940년 2월, 박두진보다 한 달 늦게 추천 과정을 완료하고 등단한다. 그는 유교 분위기에서 성장한 배경과 불교 체험의 바탕 위에서, 「승무」와 「봉황수」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적 연면성(連綿性)을 드러내는 고전적 미의 세계에 천착하는 경향으로 문단의 주목을 끈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고,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하였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에 전국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의 조지훈
1940년께 조지훈은 「아침」 등의 시편을 쓰지만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오대산에 들어가 월정사 강원(月精寺講院)의 외전 강사(外典講師)로 일하며 당시(唐詩)와 불경(佛經)을 탐독하는 등 현실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관조적 생활을 한다. 이 무렵에 조지훈은 잠시 산에서 내려와 경주에 있던 박목월을 찾아가는데, 박목월은 그 첫 만남을 이렇게 돌아본다.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은 1940년 봄이었다. 그의 나이 21세, 우리가 『문장』지 추천을 거친 이듬해였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지훈을 만난 일이 없었다.······ 그가 온다는 전보를 받고 ‘조지훈 환영’이라는 깃발을 들고 역으로 나갔다.······ 밤물결처럼 치렁치렁한 장발을 날리며 경주 역두에서 내게로 걸어오던 지훈은 틀림없이 수수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박목월, 「처음과 마지막 ― 지훈에의 회상」, 『사상계』(1968. 7.)
이렇게 처음 만난 다음, 해방 뒤인 1946년 서울 성북동 조지훈의 집에서 박두진까지 합쳐 세 사람이 모인다. 이 자리에서 조지훈 · 박목월 · 박두진은 공동 시집 발행에 뜻을 모으고, 박두진이 근무하던 을유문화사를 통해 『청록집』을 펴내기에 이른다.
1940년께 오대산 월정사 불교 강원 강사 시절
사진 뒤에 “우주의 환영. 하나의 인간이 있으되 그는 이름이 없었으나 세상 사람이 짐짓 동탁이라 부르더라. 이제 그를 묘사함은 환영의 환영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조지훈은 시 창작에 힘쓰는 한편, 1946년 4월 4일 청년문학가협회 창립 대회 때 「해방 시단의 과제」라는 제목으로 보고에 나서 “해방 후 시단은 사이비 시의 범람기”이며 “민족의 세계 시에 공헌할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통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 임을 주장하는 등 창작 체험을 바탕으로 제 나름의 시론을 펼친다. 이어 그는 1947년 『백민』에 「순수시의 지향 ― 민족 시를 위하여」라는 글을 통해서 장차 시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이 글에서 해방 직후 좌익의 계급 투쟁과 정치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낭만 정신과 관계가 있지만, 이런 낭만이 지나쳐 문단에 혼란과 충돌을 야기시키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생명의 요구’와 ‘생활의 표현’ 같은 순수함으로 시 정신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순수 문학적 태도를 지켜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이지와 정열이 균형을 이루는 ‘고전주의적’ 정신을 제시한다.
한편, 조지훈은 경기여고 교사를 거쳐 서울여자의과대학과 고려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는데, 1947년부터 고려대 재직 시절에 발발한 6·25 때 초대 국회 의원이던 아버지 조헌영이 최린 · 이광수 같은 여러 지식인과 함께 납치되는 비운을 겪는다. 1·4후퇴 때 조지훈은 피난지인 대전에서 종군 작가단에 참여하고 이후에는 문총, 한국문인협회의 중앙 위원과 대표이사를 지낸다. 1952년에는 첫 단독 시집인 『풀잎 단장』을 펴내고, 이듬해인 1953년에는 시론집인 『시의 원리』를 간행해 이론과 창작 모두에 힘을 기울인다. 1956년에 발행한 『조지훈 시선』에서 그는 절제된 언어로 자연을 관조하는 시 세계를 펼쳐 보이며 같은 해 자유 문학상을 받는다.
조지훈의 첫 단독 시집인 〈풀잎 단장〉
전쟁 직후 「다부원에서」 같은 시에서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을 조금씩 표현하던 조지훈은 1950년대 말에 이르러 초기의 순수 서정성에서 차츰 벗어나게 된다. 1959년에 펴낸 시집 『역사 앞에서』를 통해 그는 해방 뒤의 사상적 분열 양상과 혼란이 가라앉을 날 없는 격동기의 현실을 직시하는 지식인의 자의식을 작품에 담아낸다. 『역사 앞에서』 이후 현실에 대한 조지훈의 관심은 더욱 높아지는데, 특히 4·19의 열기를 전하는 시 「마침내 여기 이르지 않곤 끝나지 않은 줄 이미 알았다」 등은 그의 대담한 시적 전환을 보여준다.
1962년 고려대학교 부설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한 뒤부터 그는 문학보다 민족 문화 연구에 더 몰두해 1964년에 『한국 문화사 서설』 · 『신라 가요 연구 논고』 · 『한국 민족 운동사』 등의 이론서를 발간한다. 이처럼 조지훈은 청록파 세 사람 가운데 사회 현실에 대한 참여 의지를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그러나 이런 역사와 현실에 얽힌 자기 응시의 기저(基底)에는 언제나 ‘청록파’다운 자연 친화 정신이 흐르고 있으며, 1964년에 나온 그의 마지막 시집인 『여운』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자신의 시적 상상력의 모태인 ‘자연’으로 귀의하게 된다.
조지훈의 마지막 시집 〈여운〉
조지훈은 여기서 볼 수 있듯이 결국 자신의 시적 모태인 ‘자연’으로 귀의한다.
조지훈은 만성 기관지염으로 고생하다가 1968년 5월 17일 서울 중구 을지로6가 국립 메디컬센터에서 청록파 시인 가운데 가장 먼저 삶을 마감한다. 시집만이 아니라 『돌의 미학』 · 『창에 기대어』 · 『시와 인생』 · 『지조론』 같은 그의 수필집도 많은 이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조지훈의 육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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