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v and Arts

동리(東里) 김창귀(金昌貴)

Jimie 2021. 2. 16. 06:04

김창귀(金昌貴) 

시종(始鐘), 동리(東里)

 

본관은 선산(善山). 호적명이 김창귀(金昌貴), 족보명은 김태창(金太昌), 아명(兒名)은 창봉(昌鳳). 자는 시종(始鍾), 호는 동리(東里). 경상북도 경주 출생. 조선 초기의 문신 김종직(金宗直)의 17대 손으로 아버지는 김임수(金壬守)이다. 동리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큰형은 동양철학자 범부(凡父) 김기봉(金基鳳)이며, ‘동리’라는 호는 그가 지어준 것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동리는 어머니가 기독교인이었던 관계로,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만 수학하였다. 경주 제일교회 소속의 계남소학교와 대구의 계성중학교 및 서울로 편입한 경신중학교 모두 기독교 계통의 학교이다. 하지만 그의 학창 생활은 17세 되던 1929년 경신중학교를 중퇴하고 낙향하는 것으로 종료된다.

 

큰형의 제자였던 서정주(徐廷柱)와 교우 관계를 맺으면서, 그와 함께 한국문학사에 있어 순수문학의 전통을 수립하게 된다. 서라벌예술대학 교수를 거쳐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장을 역임하였고, 한국문인협회 회장·예술원 회장·한국소설가협회 회장·한일문화교류협회장 등 주요 문예 단체의 대표를 맡아 활발한 문단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68년에 『월간문학』을 창간하였으며, 1973년에는 『한국문학』을 창간하였다.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白鷺)」가 입선되면서 등단하였고, 이듬해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는 단편소설 「화랑(花郞)의 후예(後裔)」가 당선됨으로써 소설가로서 창작 활동을 펼치게 된다. 이어서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산화(山火)」가 또 다시 당선된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한 그는 단편 「무녀도(巫女圖)」(중앙, 1936.5.)·「바위」(신동아, 1936.5.) 등의 문제작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1930년대 후반 가장 주목받는 신세대 작가로 부각된다. 특히, 유진오(兪鎭午)로 대별되는 구세대의 문학과 이른바 세대 논쟁을 벌이면서 1930년대 후반 신세대 문학의 기수가 된 그는 서정주와 함께 『시인부락』(1937)을 결성하면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이후 그는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의 대립과 혼란 속에 좌익계 문학단체인 ‘문학가동맹’에 대항하여 우익계 단체인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1946년 초대 회장에 오른다. 1947년부터 1948년까지 또다시 순수문학 논쟁을 벌이는데, 그는 「순수문학의 진의(眞義)」(서울신문, 1946.9.14.)를 계기로 다수의 평론을 발표하며 김병규(金秉逵)·김동석(金東錫) 등의 좌파 이론가와 맞서서 논쟁을 벌인다.

 

한편 소설작품에서도 우파의 정치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투영시키는 작품을 발표한다. 좌파 이론가와 논쟁을 벌인 그는 ‘본격문학’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좌파 계급주의 민족문학론에 대항하여 인간주의 문학론을 제창한다.

 

그가 제창하는 인간주의 문학론은 그 스스로 ‘본령정계의 문학’으로 명명한 것인바, 「순수문학의 진의」에서 “자본주의적 기구의 결함과 유물변증법적 세계관의 획일주의적 공식성을 함께 지양하여 새로운 보다 더 고차원적 제3세계관을 지향하는 것이 현대 문학정신의 세계사적 본령이며, 이것을 가장 정계적으로 실천하려는 것”이 바로 “순수문학 혹은 본격문학”으로 규정을 내린다.

 

즉, 그는 문학의 사회 참여와 공리성을 부정하는 문학적 입장에 서 있다. 그리하여 그의 대표작인 단편소설 「무녀도」·「황토기(黃土記)」(문장, 1939.5.)·「실존무(實存舞)」(문학과 예술, 1955.6.)와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현대문학, 1955.11.∼1957.4.)·「을화(乙火)」(문학사상, 1978.4.) 등을 통해 역사와 현실을 초월한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탐구하여 들어간다.

 

그것은 인간과 생명의 원형질적 정수(精髓)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본격문학=순수문학=민족문학’이란 문학적 이념 아래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였다. 그는 한국 소설사에서 토착적이고 민족적인 소재를 ‘생(生)의 구경적(究竟的) 탐구’로써 형상화하여 민족문학의 전통을 정립하고 확대시킨 작가이다.

 

그밖에 주요 작품으로 「역마(驛馬)」(1948)·「등신불(等身佛)」(1961)·「까치소리」(1966) 등의 단편소설이 있고, 단편집으로 『무녀도』(1947)·『황토기』(1949)·『실존무』(1955)·『등신불』(1963)·『바위』(1973)·『밀다원시대(密茶苑時代)』(1975) 등과, 평론집으로 『문학과 인간』(1948)·『소설작법』(공저, 1965)·『고독과 인생』(1977)·『문학이란 무엇인가』(1984), 시집으로 『바위』(1973)와 유고시집 『김동리가 남긴 시』(1988), 수필집으로 『자연과 인생』(1977)·『사색과 인생』(1973) 등의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정력적 창작 활동과 화려한 문단 활동으로 아세아자유문학상, 예술원 문학부문 작품상, 3.1문화상 예술부문 본상, 서울시문화상 문학부문 본상, 5.16민족문학상 등을 수상하였고, 또한 국민훈장동백장과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여 받았다.

 

나의 출생은 불합리했다. 이 허무한 세상에 왜 내가 태어났으랴 하는 따위의 뜻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부모들의 관계에서 온 나의 견해였다.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어머니에 대하여 타인이라기보다 오히려 적의에 찬 감정으로 시종 일관했다. 어찌하여 사랑하지도 않고 그렇게 미워한 여인에게 나를 낳게 했는가 싶다. 어머니는 말하기를 산신에게 빌어 꿈에 흰 용을 보고 너를 낳았으니 비록 여자일망정 너는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나는 그 이야기를 시시하게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산신에게 증오하고 학대하던 남자의 자식을 낳게 해줍시사고 애원을 한 어머니를 경멸했었다. 그것은 사랑의 강요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은 내게다가 결코 남성 앞에 무릎을 끓지 않으리라는 굳은 신념을 못박아 주고야 말았다. 그 신념은 무릇 강한 힘에 대한 반항이 되었고 그러한 반항 정신이 문학을 하게 한 중요한 소지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인생에 있어서 나를 고립시키고 말았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 (다음 백과.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3)

 

김동리 씨는 경상북도 경주 출신으로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白鷺)'가 입선함으로써 등단했다.

생전 "첫 번째 여자에게서는 자식을, 두 번째 부인에게서는 재산을, 세 번째 여자에게서는 사랑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첫째 부인은 김월계 씨였고 1940년에 결혼해 1966년에 이혼했다. 두 번째 부인은 소설가 손소희였다. 세 번째 여자 서영은은 두 번째 부인과 혼인 중에 만난, 30세나 어린 후배 작가였다. 서영은은 손소희가 암으로 사망한 후 김동리와 결혼,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8년을 함께 살았다.

 

범부(凡父) 김기봉(金基鳳)

 

소설가 김동리의 맏형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 1897~1966. 일명 김기봉(金基鳳)

한학자 ,동양철학자

 

동리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큰형은 동양철학자 범부(凡父) 김기봉(金基)이며, ‘동리’라는 호는 그가 지어준 것이다.

 

경주가 낳은 사상가로, ‘천재적 인물’, ‘기인’ 등등 여러 가지 말로 수식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회상되고 있는 범부.

범부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후손으로 1897년 2월 18일 경주부 북부동에서 출생하여 4세부터 13세까지 김계사(金桂史)에게 한문과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을 수학하였다. 이후 많은 학술 및 사회 활동을 하였고, 1966년 12월 10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

 

범부는 “언어란 소리로 들을 수 있는 생각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 ‘혈맥(血脈)’에 의거한 ‘혈증혈증(血證)’은 지금 우리 몸속에 살아서 뛰는 ‘핏줄로 들을 수 있는 언어/생각’인 셈이다.

 

김동리(金東里, 1913~1995)/시인, 소설가

김동리(金東里, 1913~1995)

 

소년은 헛배가 부르고 툭 하면 코피가 터졌고 소화기 계통의 병 때문에 삐쩍 말라 있었다. 한번은 예기소에 목욕하러 갔다가 모래사장 위에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낸 적이 있었다. 소년은 그 사람을 살려낸다고 겁도 없이 달려들어 얼마 동안 손과 발을 주무르고 인공호흡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윽고 시체가 부풀어 올랐다. 소년은 그만 혼비백산하여 집으로 도망치듯 뛰어 들어왔다. 소년의 머릿속으로 수꿉친구였던 선이의 죽음, 목덜미가 유난히도 하얗던 남순이 누나의 죽음이 스쳐갔다. 소년은 일찍부터 많은 병을 앓고 해마다 사람이 빠져 죽는다는 예기소 언저리에서 살며 숱한 죽음을 보고 들으며 죽음과 삶, 사람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하는 버릇을 갖는다.

 

경주에는 2월 하순이면 사나흘씩 흙바람이 불었다. 까맣게 죽은 듯 말라 있던 살구나무 가지에 물이 오르고 가지 끝마다 연분홍 꽃망울이 다닥다닥 매달렸다. 소년은 진달래를 꺾고자 날마다 산으로 내달렸다. 소년은 봄이 좋았다. 봄이 되면 머릿속을 그득 채우는 죽음과 주검의 환영을 떨쳐버리 수 있었다. 그래서 소년은 늘 꽃 피는 봄을 기다렸다. 이 소년이 뒷날 “가장 한국적인 작가”라는 평가를 받은, 해방 이후 한국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거목 김동리(金東里, 1913~1995)이다.

 

“열서너 살 때 달을 보고 까닭 모르게 너무도 아득해서 자꾸자꾸 눈물을 쏟은 일이 많았다. 그것은 다 즐거움의 변형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남보다 훨씬 크고 깊은 행복을 가졌는데, 그건 자연을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생리적 기능이다.” 김동리는 뒷날 푸른 풀밭을 보면 마구 뒹굴고 싶고 진달래가 필 때면 저물도록 온 산을 헤매고 다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김동리는 웅혼(雄渾)한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에 바탕을 둔 문학 세계를 펼쳐 보인 작가다. 그의 문학은 내용적으로는 자연 친화 또는 자연 귀의로 흐르고, 정치적으로는 우익적 민족주의에 기울며, 정신사적으로는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평론가 이동하(李東夏)에 따르면 한국의 현대 정신사는 “동양적ㆍ전통적 사회의 문화와 새로운 근대적 서구 문화가 만나는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한국 전통사회의 문화는 “유교와 무교”를 핵심으로 하고 “가족주의, 현세 중심주의,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태도”를 기본 특징으로 한다. 김동리의 문학 세계는 저의 계급적ㆍ지리적ㆍ가정적ㆍ교육적ㆍ심리적 요인 등에 의해 바로 우리 것과 낯선 타자의 문화가 서로 만나 충돌하며 삼투하는 그 지점에 착지한다.

 

김동리는 본명이 시종(始鍾)인데, 1913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아난다. 어머니의 나이가 마흔두 살로 노산(老産)이었다. 젖이 모자라고 밭일이 바쁜 어머니 대신에 아이는 형수가 맡아 암죽으로 키워진다. 암죽도 제대로 받아먹지 못하고 크던 그는 두 살 때부터 아버지가 남긴 쑬찌끼를 빨아먹는 버릇을 들인다. 이 버릇은 점점 심해져 세 살 무렵에는 취한 나머지 비틀거리며 뒤뜰에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주정뱅이였으며, 김동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다. 1947년에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첫 번째 창작집 『무녀도』를 펴내는데, 표제작인 단편 ‘무녀도’는 김동리의 실제 유년시절의 체험을 반영한 작품이다. 아버지는 술에 젖어 세월을 보냈고, 주사가 심했다. 어머니와 마찰이 잦았는데, 어머니는 부부싸움 끝에 교우인 이웃의 지동댁네로 피신했다. 지동댁네 쪽에서 찬송가 소리가 들려오면 아버지는 “귀신 달아난다!”하고 고함을 치고, 지동댁은 “예수 믿읍시다! 예수 믿읍시다!”하며 더욱 소리를 높이곤 한다. 이것이 ‘무녀도’에 묘사되어 있다.

 

김동리는 경주 제일교회의 부설학교인 계남학교에 들어가는데, 공부보다는 방과 뒤 경주 인근 야산이나 들판으로 쏘다니기를 좋아했다. 이런 자연과의 교감 체험은 김동리 문학의 바탕에 자연 친화적 정서를 기르는 계기가 된다. 6학년 때 교지에 내놓은 ‘돛대 없이 배탄 백 의인’이라는 글 때문에 일경에게 불려가는 곤욕을 치르지만, ‘글 잘 쓰는 아이’로 소문이 난다. 그는 대구 계성중학교을 거쳐 서울 경신고교로 진학하나, 아버지가 죽고 가세가 기울면서 중도에서 학업을 그만둔다. 경신학교 4학년 중퇴가 김동리의 공식 최종학력이다. 정규교육 과정의 궤도를 벗어난 김동리는 철학, 세계문학, 동양고전을 탐독하는 것으로 작가 수업을 대신한다.

 

“내 백씨의 집은 영주동에 있었다. 방 둘에 넓은 마루가 한 칸 있었는데, 작은 방 하나에는 백씨의 철학 서적이 천장에 닿도록 가득 쌓여 있고, 큰 방엔 형수와 질녀 둘 해서 네 사람이 거처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서재(작은 방)에서 종일 책을 읽다가 밤이면 마루에 나와서 잤다. 무척 군색하고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나는 전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온종일 서재에 처박힌 채 책을 읽다가 저녁을 마루에 그냥 자는 것도 괜찮고, 그것이 따분하면 가까이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나가 동네 청년들과 축구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바닷가에 나가서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어느 거나 슬프기는 했지만 그다지 괴롭지는 않았다.” 이렇게 김동리는 이 시절을 회상했다.

 

김동리가 문학 길로 들어서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독서량을 소화해 낸 것은 한학자이자 철학자인 큰 형 김범부의 영향이 크다. 부산에 살던 큰 형의 방에는 철학 서적이 천장에 닿도록 쌓여 있었는데, 그는 한동안 그 집에 머물며 종일토록 책에 파묻히곤 한다. 이때 길러진 집중적 독서습관은 경주 집에 돌아와서도 지속하여 철도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가 닥치는 대로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운다.

 

1934년 김동리는 신문의 신춘문예 공고를 보고 각 신문사의 상금을 몽땅 타볼 작정으로 한 달 만에 소설 3편, 희곡 2편, 시 3편, 시조 3편을 써서 응모하는 열정을 보였지만 시 ‘백로’만 《조선일보》에 가작으로 뽑히는 데 그쳤다. 고향으로 돌아가 소설 쓰기에 전념해 이듬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었다.

 

“‘화랑의 후예’가 당선될 무렵 당시의 경주에서의 반응은 정말 대단했다. 문인이 귀하고 지식층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옛날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돌아온 것처럼 경주가 떠들썩했고, 환대를 받았다.” 그는 상금 일부를 떼어 소머리를 사고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소설에 전념하기 위해 다솔사와 해인사 등에서 은거한다. 그가 다솔사나 해인사를 거처로 잡은 것은 이미 큰형 범부가 다솔사에서 스님들에게 동양철학을 가르치고 있었고 그 또한 선문(禪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6개월 동안 해인사에 머물며 숯굴을 소재로 한 ‘산화’를 써서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또 당선해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1940년까지는 그는 ‘황토기’, ‘잉여설’, ‘찔레꽃’ 등을 발표한다. 이즈음 다솔사에서 함께 있던 큰형 범부가 일경에 연행되었다 당대의 지식인인 김범부는 툭하면 가택수색이며 예비검속을 당하는 등 수난을 당했다. 그도 일제가 강요한 ‘문인보국회’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며 그가 몸담고 있던 광명학원은 폐쇄 당한다. 일제의 강제로 《문장》 등의 문예지가 폐간되고는 사실상 작품 활동을 접어버렸다 절망한 나머지 그는 동네 건달들과 어울리며 술과 노름, 유행가, 화투, 장기와 같은 잡기에 휩쓸린 채 반년을 보낸다. 이 무렵에 함양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김월계와 결혼해서 낳은 장남 진홍이를 병으로 잃는 불운을 겪는다.

 

1943년 김동리는 조카의 주선으로 사천의 양곡 배급소 서기로 일하다가 해방을 맞는다. 해방 뒤 서울 돈암동에 정착한 그는 1946년 조지훈, 조연현, 황순원, 최인욱, 박두진, 박목월, 서정주, 김달진 등과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임된다. 해방 전후 문단에서는 임화와 김남천 등에 의해 조직된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이기영과 한설야 등에 의해 세워진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그리고 두 단체가 통합된 문학가동맹이 한 축을 형성한다. 김동리는 이런 좌익 문학세력에 맞서는 우익 문학 진영의 대표를 자임했다. 우익 문학세력을 규합해 청년문학가협회 결성을 주도한 그는 좌파 논객들과의 문학논쟁도 피하지 않는다. 그는 본디 소설로 문단에 나왔지만, 순수문학 논쟁을 비롯한 갖가지 논쟁 때 다른 어떤 비평가 못지않게 자신의 뜻을 확고하게 표명해 이론가로서도 만만치 않은 면모를 보인다.

 

『무녀도』는 정체성 유지 문제가 무척 절박한 과제로 떠오른 알제강점기를 토속적인 소재의 소설들을 발표하여 전통적 보수주의자로서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일군 김동리의 제1기 문학의 결산이다. 『무녀도』에는 ‘화랑의 후예’부터 해방 될 때까지 그가 내놓은 단편 21판 가운데 여덟 편을 골라 실었다. ‘무녀도’는 1936년 《중앙》에 먼저 발표되고 창작집에 수록되면서 대대적인 개작을 거쳤고, 그 뒤에도 두 차례의 부분 수정을 거쳐 1978년 마지막으로 개작되어 장면 『을화』로 다시 태어난다.

 

‘무녀도’는 무당 모화와 아들 욱이, 그리고 배다른 딸 낭이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족과 종교으 갈등을 그려낸 소설이다. 기독교를 믿는 마을 사람이 늘어나면서 가뜩이나 움츠러든 모화 앞에 어느 날 어린 적에 집을 나간 아들 욱이가 기독교 청년이 되어 나타난다. 둘은 피를 나눈 모자 사이임에도 서로 종교가 다른 나머지 상대방이 믿는 신을 잡귀로 몰아세우며 갈등은 고조된다. 갈등은 욱이가 그의 이복 여동생 낭이와 근친상간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암시 속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1947년부터 1948년까지 그는 《경향신문》의 문화부장과 《민국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언론계에 몸을 담은 채 꾸준히 작품을 내놓는데 해방 직후의 귀환과 더불어 집 없는 사람의 애환을 다루는 등 현실 문제를 들추는 변모를 보였다. 하지만 ‘역마’같은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사주(四柱), 무속(巫俗), 불교, 기독교 등과 관련해 인간의 근원적 삶을 탐구하는 본디의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1949년 김동리는 두 번째 창작집 『황토기』를 펴내고, 창간된 《문예》의 주간을 맡는다. 이 무렵의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다방 ‘모나리자’에서 그는 ‘모나리자’의 주인이자 신인 작가인 손소희와 처음 만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그는 손소희가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겨주면서 두 사람 사이는 급속히 가까워진다. 1ㆍ4후퇴 때는 부산에 가서 지내며 문인들의 집결지 구실을 하던 광복동의 다방 ‘밀다원’에서 많은 일화를 만드는데, 나중에 ‘밀다원시대’에 생생하게 재현된다.

 

김동리가 같은 시대의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점은 일제강점기와 전쟁 때 겪은 가난 또한 고통을 소재로 사용하되 이를 사회 또는 제도의 탓으로 돌리거나 미래를 위해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식으로 전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한결 근원적인,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운명적 인간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나간다. 그러나 바로 이 운명성 때문에 김동리의 소설은 현실에서 구원을 찾을 수 없다는 식으 허무주의 징후를 보이며, 삶을 신화나 주술의 세계에 의탁함으로써 도피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을 산다.

 

1953년 서울로 돌아온 김동리는 서라벌예대에 출강하는 한편 손소희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불륜’이라는 비난이 높았다 1954년에는 예술원 창립회원이 되고 한국유네스코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약한다. 1955년 그는 한국전쟁 체험과 연관된 현실적 색채가 깃들인 ‘흥남 철수’를 발표한 데 이어 창작집 『실존무』를 펴냈다. 1957년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를 발간해 이듬해 예술원상을 받고, 1961년에는 한국문인협회의 부이사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며 창작집 『실존무』를 펴냈다.

 

1957년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를 발간해 이듬해 예술원상을 받고, 1961년에는 한국문인협회의 부이사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며 창작집 『등신불』을 펴낸다. 1968년에 그는 《워란문학》을 창간하고 1970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72년 서라벌에술대학 학장을 역임한다. 일흔다섯 나이에도 장편소설 『자유의 역사』와 수필집 『사랑의 심은 곳마다 솟고』를 펴내는 등 그는 평생에 걸쳐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작품을 쏟아낸다. 창작욕을 과시하던 김동리는 1990년 7월 30일 돌연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오랜 투병 끝에 1995년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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