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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목월[東里木月]문학관

Jimie 2021. 2. 16. 05:45

동리목월문학관

 

김동리와 박목월(본명 박영종)은 대구 계성중학교 선후배(2년) 사이고 절친한 친구 사이로 한국의 대표적 작가이고 국민시인이다. 김동리의 "을화"는 노벨상의 문학상 수상후보본선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박목월은 경남고성에서 태어나 100일에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경주로 옮겨서 자랐다.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양대 문리대학장을 지냈다.

김동리 작가의 아들 김평우는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나와 판사,45대 대한변호사 협회장을 지냈고, 김동리는 한때 경남 사천에서 지내기도 했다.(계성학교는 3학년까지 재학후 서울 경신학교로 편입하였으나 중퇴)

 

경주 토함산 자락

동리목월문학관

 

소설가 김동리, 시인 박목월 문학관.

경북 경주시 불국로 406-3 (경주시 진현동 550-1)

 

경주출신으로 가장 한국적인 소설가 김동리와 국민시인 박목월의 작품과 삶이 한 문학관

 

김동리(金東里, 1913~1995); 본관은 선산(善山). 호적명이 김창귀(金昌貴), 족보명은 김태창(金太昌), 아명(兒名)은 창봉(昌鳳). 자는 시종(始鍾), 호는 동리(東里).

1913년 경상북도 월성군 경주읍 성건리에서 아버지 김임수(壬守)와 어머니 허임순(許任順)의 5남매 중 3남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시종(金始鍾)이다.

그의 아버지는 주정뱅이였으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행패에 못 이겨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다. 김동리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김동리는 경주 제일교회의 부설 학교인 계남학교 6학년 때 교지 『춘우』에 논문과 동화와 동시 등을 발표한다. 이 가운데 「돛대 없이 배 탄 백의인」이라는 논설문이 문제가 되어 일경에게 불려가는 곤욕을 치르지만, 동시에 ‘글 잘 쓰는 아이’로 주목을 받는다. 그는 이후 미션계인 대구 계성중학을 거쳐 서울 경신고교로 진학하나, 아버지가 죽고 가세가 기우는 등 사정이 여의치 않아 중도에서 학업을 그만둔다.

 

 

1934년 신문의 신춘 문예 공고를 보고 각 신문사의 상금을 몽땅 타볼 작정으로 한 달 만에 소설 3편, 희곡 2편, 시 3편, 시조 3편을 써서 응모하는 열정을 보인다. 그러나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시 「백로」만 가작으로 뽑히다.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 문예에 단편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고, 더욱 소설에 전념하기 위해 다솔사와 해인사 등에서 은거한다. 그가 다솔사나 해인사를 거처로 잡은 것은 이미 큰형 김범부가 다솔사에서 스님들에게 동양 철학을 가르치고 있었고 그 또한 선문(禪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6개월 동안 해인사에 머물며 숯굴을 소재로 한 「산화」를 써서 1936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또 당선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1943년 김동리는 조카의 주선으로 사천의 양곡 배급소 서기로 일하다가 1945년 8·15를 맞는다. 해방 뒤 서울 돈암동에 정착한 그는 1946년 조지훈 · 조연현 · 황순원 · 최인욱 · 박두진 · 박목월 · 서정주 · 김달진 등과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으로 선임된다. 김동리는 빼어난 작가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문학론을 정교하게 펼치는 이론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해방 공간의 문단에서 그는 줄기차게 좌익 문학가들이 내세우는 ‘과학적 세계관’, ‘진보적 리얼리즘’, ‘혁명적 로맨티시즘’, ‘과학적 창작 방법론’ 등 유물 사관에 바탕을 둔 이론에 반박하며 휴머니즘에 기조를 둔 ‘순수 문학론’을 펼친다.

 

주로 순수문학을 창작하였고 고유의 토속성과 외래사상과의 대립을 통해 인간성의 문제를 그렸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인간과 이념의 갈등에 주안을 두었다. 대표작으로는 《화랑의 후예》, 《무녀도》, 《역마》, 《황토기》, 《등신불》 등이 있다.

'무녀도'를 개작한 장편 '을화'는 노벨문학상 후보 5위안에 든 세계적인 작품.

 

화랑의후예(1935) 몰락한 양반인 황진사를 주인공으로 해 시대의 변화를 직시하지 못하고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방황하는 양반 계층의 오만과 허위성을 폭로한다.

무녀도(1947) ‘무녀도’라는 그림의 내력을 통해 무속의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충돌, 대립을 그린 작품. 어머니인

무당 모화와 기독교인인 아들의 갈등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천착했다. 이후 중편 『을화』로 개작해 발표했다.

역마(1948) 경남 하동의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역마살을 타고난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유랑의

길을 떠나는 모습을 통해 한국인의 전통적인 운명관을 보여준다.

사반의 십자가(1958)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사반을 유대인 게릴라 집단의 지도자로 설정해 ‘하늘의

왕국’을 주장하는 예수와 ‘땅의 왕국’을 주장하는 사반의 모습을 통해 천상과 지상의 논리가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구원을 위한 현실 참여와 종교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 문제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등신불(等身佛)(1963) 일제에 의해 학병으로 끌려왔다 탈출한 주인공 ‘나’와 당나라 때 소신공양으로 성불한

만적선사의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인간적 고뇌와 종교적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결혼을 3번 하였는데

첫째 부인은 교 사 김월계 ( 6살 연하, 1939년 결혼, 1966년 이혼),

둘째 부인은 소설가 손소희 ( 4살 연하, 1953년 재혼, 1987년 사망),

셋째 부인은 소설가 서영은 (30살 연하, 1987년 재혼)

 

1947년 청년문학가협회장, 1951년 동협회부회장, 1954년 예술원 회원,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1969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72년 중앙대학 예술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3년 중앙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1년 4월 예술원 회장에 선임되었고, 1983~1989년까지 문협 이사장을 또 맡았다.

1990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다 1995년 81세로 사망하면서 첫 번째 부인 김월계와 합장되었다.

(손소희, 서영은과의 결혼생활 중 자녀는 없었다)

 

서영은 작가는 한국 문단의 거목 고(故) 김동리(1913∼1995) 작가의 세 번째 부인이다. 서 작가는 24살 무렵 김동리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그에겐 두 번째 부인 손소희(1917~1987) 작가가 있었다. 그러나 손소희는 둘의 관계를 묵인했고, 기묘한 삼각관계는 20년 이상 계속 됐다. 서 작가는 손소희의 사후 김동리와 결혼했지만, 김동리는 불과 3년 후인 1990년 중풍으로 쓰러졌고 5년 뒤 세상을 떠났다.

 

 

 

박목월의 본명은 영종. 1915년 경주 서면 모량리에서 태어나 건천초등학교를 다녔다. 동리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대구 계성중학교를 졸업했다(동리는 계성학교 3년후 경성 경신보통학교로 전학. 중퇴).

당시 아버지 박준필은 수리조합 이사였고 대구로 나가 중학교를 졸업한 인텔리 유지였다.

어머니는 보통학교 4학년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머니의 신앙은 이후 목월의 정서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목월은 대구에 있는 미션계 중학인 계성학교에 입학한후 3년년 때인 1932년 아동잡지 [아이생활]에 투고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봄 공모에 당선되어 발표되었다.

 

‘나그네’, ‘윤사월’, ‘청노루’, ‘산도화’ 등의 감칠맛 나는 시를 써 국민들이 애송하는 국민시인이다.

정지용 시인은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라 칭송했다.

보문호가 보이는 목월공원, 목월 시비



 

한국문단 거목 '청록파 박목월 생가' 새단장

포항CBS 문석준 기자 2021-01-26 18:51

 

박목월 생가 지붕 이엉 교체 모습. 경주시 제공
한국문단의 거목이자 청록파 시인으로 잘 알려진 박목월(朴木月 1915-1978) 시인의 생가 지붕이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경주시는 건천읍 모량리 소재 박목월 시인 생가 초가지붕의 묵은 볏짚을 털어내고, 새 볏짚을 엮어 만든 이엉을 얹는 작업과 함께 생가 주변을 말끔하게 단장했다고 밝혔다.

 


시는 인조 볏짚으로 대체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전통 방식으로 생가를 옛 모습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사업비 1300만원을 투입했다.

박목월 시인 생가는 경주시가 한국 문단의 위대한 인물인 박목월 시인의 문학적 위업을 기리고 시민 자긍심 고취, 문학정신 계승·발전, 문학관광 명소로 육성하기 위해 지난 2013년 8월 사업비 23억원을 들여 건천읍 행정길 61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4319㎡ 부지에 안채와 사랑채, 디딜방앗간, 우물, 시낭송장, 정자, 밀밭, 동상, 관리동, 화장실을 갖췄다.

생가 내에는 액자 13개를 비롯해 책상 1개, 가방 1개, 필통 1개, 책 87권, 전기난로 1개 등의 유물을 전시해 시인의 삶과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했다.

강인구 문화예술과장은 "새 단장을 마친 박목월 생가에 많은 문인과 관광객이 찾아와 코로나19로 지친 마음을 치유하고 시인의 발자취와 정서를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pressmoon@c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