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시인 꿈꾸던 문학청년

Jimie 2020. 4. 20. 09:38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시인 꿈꾸던 문학청년

 

민중애환 노래로 풀다

 

~가수 백년설의 발자취에 관한 사색 ~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등 잇단 히트 문학적 재능 살려

식민지 내면 담은 가사 제작

日 강점기 지배체제 동조한 '친일' 행적 논란 

 

 

                          

백년설 노래비 -성주 성밖숲- 

한국의 근현대사는 엄청난 격동의 시기를 통과하였습니다.

식민지 지배와 그 후유증, 이념의 선택, 파괴적인 전쟁 등으로 대표되는 격동과 파란은 그 시기의 문화를 제작·생산하는 담당층들로 하여금 심신의 안정을 보장해 주지 못했습니다.

심신의 안정은커녕 절박한 생존의 기로에서 허덕여야만 했던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친일에 관한 논란, 분단시대의 이른바 매몰에 관한 논의 등이 줄곧 문화인들의 평가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다음 한국의 문화인들은 이민족 통치 시절에 발표한 작품과 삶에 대한 반민족적 행위의 평가, 전쟁시기의 개인적 대응방식 등 문화인으로서의 삶의 가치 선택과 위상에 대한 매서운 문책과 비판이 뒤따랐습니다.

문학사에서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이러한 시각의 따가움을 줄곧 느끼게 됩니다.


대중문화인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수년 전부터 우리는 줄곧 가요계에서의 친일행적 논란에 휩싸인 경우가 한둘이 아닙니다.

가요작품이란 것은 항시 그 시대 대중과 더불어 숨쉬고, 감정을 조절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통치자들이 가요작품을 체제의 선전을 위한 나팔수로 교묘히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식민지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던 이른바 친일가요란 것이 그러했고, 70년대 유신통치시절 후반기의 이른바 시국가요 제작의 강요가 그러한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가요 작품의 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대표적인 작곡가, 작사가, 가수들의 존재성은 항시 지배체제의 통치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가수 백년설(白年雪)도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수년 전 여름, 친일파 명단 발표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던 때에 저는 벗들과 더불어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의 백년설 생가를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따라 유난히 높은 습도에 등과 가슴은 땀으로 흥건했습니다.

백년설 생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어떤 표지판조차 없었고, 엊그제 내린 비로 좁은 골목은 질척거렸습니다.

대문 앞에 서서 바라보는 생가의 광경은 영광과 오욕, 좌절과 허무의식으로 일관되었던 가수 백년설의 삶을 고스란히 들여다보


는 듯 쓸쓸하고 적막하였습니다.


아주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혀 인기척이 없었고,
오로지 한 쪽 모퉁이에 묶인 강아지 한 마리가 악을 써서 낯선


방문객의 발길에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을 뿐.
지붕과 서까래의 틈으로는 비가 샌 흔적이 보였고, 오랫동안 수리를 하지 않은 건


물은 거의 냉담과 거부 속에서 방치된 기색이 뚜렷했습니다.

 


그 누가 이 낡은 건물을 가요작품 '나그네 설움'과 '번지 없는 주막'을 불러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백년설의 생가라고 인정할


것인가.


거의 다 쓰러져 가는 백년설 생가의 마당을 서성이며 저는 너무나 비감한 심정에 젖어 들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광경이 상처와 유린으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의 처참한 얼굴이자 본모습이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저는 기어이 발끝



에 눈물방울을 떨구었습니다.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에서 태어난 가수 백년설의 본명은 이창민(李昌民)입니다.
성주농업보습학교를 마치고 은행원 등의 경험을 거쳤지만, 이창민의 마음 속에는 오직 한 가지 목표, 즉 작가가 되려는 꿈으로


가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한 시골청년에게 너무나 벅차고 힘겨운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오히려 가수로서의 재능이 꽃필 수 있는 계기가 다가왔으니 그것은 1930년대 태평레코드 운영진과의 운명적 만남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명을 백년설로 결정한 이창민은 가요작품 '유랑극단' 한 곡으로 단번에 인기가수 반열에 합류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식민통치의 압제를 이기지 못하고 유랑민의 신세로 전락한 1930년대 당시 한국인의 처지와 슬픈 존재성을 상징적으로 잘 담아낸 명작입니다.


'한 많은 군악소리 우리들은 흐른다/
쓸쓸한 가설극장 울고 새는 화톳불/
낯 설은 타국 땅에 뻐꾹새도 울기 전/
가리라 지향 없이 가리라 가리라'


이후로 가수 백년설은 태평레코드사의 간판격 가수로 자리를 잡고 잇따라 많은 히트곡을 발표하게 됩니다.

우선 떠오르는 백년설의 대표곡 목록을 손꼽아 보더라도 다음 작품이 당장 떠오릅니다.

하나같이 슬픈 아름다움을 지닌 주옥같은 가요작품이지요.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일자일루' '대지의 항구'
'삼각산 손님' '고향 길 부모길' '고향설' '어머님 사랑'
'남포불 역사' '눈물의 백년화' '두견화 사랑' '북방여로'
'비오는 해관' '산 팔자 물 팔자' '상사월야' '석유등 길손'
'신라제 길손'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로 시작되는 '나그네 설움'에서 우리는 내 나라 내 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략자 일본의 종살이로 전락해버렸던 식민지 시대 한국인의 내면 풍경을 감지합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로 시작되는 '번지 없는 주막'도 마찬가지로,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린 한국인의 적막한 처지와 방황심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인 검열 당국자들도 '주막에 번지가 없다고 말한 속뜻이 무엇인가'를 따지며 생트집을 잡았다고 합니다.

위의 목록에 모두 담아내지 못했지만 백년설은 유난히 고향과 어머니를 다룬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되고자 했던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살려 가사 제작에 백년설이 직접 관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광복이 되고, 전 국토는 또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살길을 찾아 쫓기듯 휘몰려 다니는 극도의 피로 속에서 백년설의 마음 속은 항시 좌절과 허무의식으로 휩싸였습니다.

과연 무엇이 진정한 삶이며, 무엇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일까.
그 와중에서 목재소와 고아원을 경영해 보기도 했고, 친한 벗들과 더불어 레코드회사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만 그 어느 것에서도 마음의 충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백년설은 어느 종교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그동안 가졌던 모든 것을 과감히 버렸습니다.
과거와의 결연한 단절이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미국으로 떠나간 가수 백년설은 낯선 땅 어느 모퉁이에서 그의 한 많은 삶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식민지 시절, 과도한 심적 부담 속에서 고달프게 한 세상을 살아갔던 가수 백년설의 존재성을 다시금 차분하고 냉철하게, 또 한편으로는 따뜻한 손길로 더듬고 의미를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백년설 / 고향설)
       

출처 :아름다운순간 원문보기 글쓴이 : 이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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