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ese Arts

海行かば-伊藤久男(いとう ひさお)

Jimie 2024. 5. 18. 07:08

<軍歌・準国歌>海行かば

https://www.youtube.com/watch?v=PfBebI2oFp4 

 

 

 

"

海行かば水漬く屍 

山行かば草生す屍 

大君の辺にこそ死なめ 

かへり見はせじ

 

바다에 가면 젖은 송장,

산에 가면 잡초 무성한 송장,

대군(大君)의 곁에서 죽을 수 있다면

죽어도 편안히 죽으리라

"

海行かば 伊藤久男

https://www.youtube.com/watch?v=PfBebI2oFp4 

 

 

일본 군가-군함행진곡

守るも攻むるも黒鉄の
방어도 공격도 강철로 만든
浮かべる城ぞ頼みなる
떠 있는 성은 믿음직하다
浮かべるその城日の本の
떠 있는 성들은 떠오르는 태양아래에서
皇国の四方を守るべし
황국의 사방을 수호한다

 

真鉄のその艦日の本に
강철로 만든 배는 일본에
仇なす国を攻めよかし
대적하는 나라를 쳐부순다.
 

 

石炭の煙は大洋の
석탄의 연기는 대양의
 
竜かとばかり靡くなり
용과 같이 나부낄뿐
 
弾撃つ響きは雷の
탄환 쏘는 울림은 번개의
 
声かとばかり響むなり
소리와 같이 울릴 뿐
 
万里の波濤を乗り越えて
만리의 파도를 넘어
 
皇国の光輝かせ
황국의 영광을 빛내자
 
 

海行かば

바다에 가면
 
水漬く屍
바다에 잠긴 시체
 
山行かば
산에 가면
 
草生す屍
풀속의 시체
 
大君の辺にこそ死なめ
천황을 위해 죽어도
 
かへりみはせじ

돌아보는 일은 없으리

 

海行かば

https://www.youtube.com/watch?v=KS1Ifaaqyb4 

 

 

第二の国歌と言われた不朽の名曲。戦艦大和をイメージして作ってみました。

伊藤 久男(いとう ひさお、1910年明治43年)7月7日 - 1983年昭和58年)4月25日)は日本歌手。本名は伊藤 四三男(いとう しさお)。福島県安達郡本宮町(現本宮市)出身

 

生い立ち・親族

本宮町の旧家の出身。本名の四三男は生年の明治43年に由来する。父親は立憲政友会所属で県会議員を務めた伊藤彌(わたる)[注釈 1]、兄は福島県議会議員を経て戦後に自由民主党所属の衆議院議員を務める伊藤幟(のぼり)である。

生家は裕福であり、伊藤は当時はまだ珍しかったピアノに没頭し、中学(旧制)の頃にはピアニストを志望するようになる。家族や親族の反対を押し切り単身上京、音楽を生業とすることに反対していた家族へのカモフラージュのため東京農業大学に入学。

 

歌手デビュー

東京では、同郷の新進作曲家古関裕而と懇意になり[注釈 2]、家族には知らせずに農大を退学し、帝国音楽学校に進む。同校では同郷の声楽家平間文寿に師事する。

 

その後、農大を退学したことが家族に知られて毎月の仕送りが来なくなり、音楽学校の同級生とともにコロムビア吹き込み所で合いの手や囃子の吹き込みのアルバイトを始める。ピアニスト志望だった伊藤は不本意だったが、これが後に作曲家やディレクターたちの耳に留まることになる。

 

1932年(昭和7年)、古関裕而の勧めにより、1933年(昭和8年)6月25日付で「伊藤久男」名義でリーガル(コロムビアの廉価レーベル)から「今宵の雨」でデビュー。コロムビアからのデビューは同年9月の「ニセコスキー小唄」で、「宮本一夫」の名前で発売。出身地「本宮」をひっくり返し、本名「四三男」の4から3を引いた「一」と、男を表す「夫」を付けた芸名で、同郷の作詞家野村俊夫が名付けたという[注釈 3]

 

その間、アルバイトとしてタイヘイレコードにて「内海四郎」名義でレコーディング。その後、コロムビアでは伊藤久男、リーガルでは宮本一夫を使用していたが、1935年(昭和10年)の「別れ来て」の発売を機に芸名を伊藤久男に統一。

 

 

"'제노사이드' 히로히토를 전범 재판에"...미국이 외면했다

[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이계홍 작가, 언론인  |  기사입력 2019.11.08. 09:05:15 최종수정 2019.11.08. 09:05:27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바로가기 :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처음부터 보기
 
제 17장, 대구 6연대 “병사의 끝판 왕”
 
일요일 오후, 곽차순 상사는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으며 뭔가 걸려들 것이 없나 주위를 살피며 병영을 서성거렸다. 경계 근무중인 초병을 잡아 조질까. 아니면 무기고 초병, 내무반 병사, 취사병의 용의 검사를 하며 트집잡을 게 없나, 오늘따라 주먹이 꼴리는데 얼른 걸려드는 게 없었다. 대구 6연대로 전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하는 임무는 대체로 이런 것들이었다.
곽차순은 일본군 사병의 끝판왕이라는 상사 출신이었다. 상사라고 하면 최소한 일본군생활 7,8년을 한 직업 군인인데, 일선에서 산전수전 겪다 보니 벌써 능구렁이가 다 되어 있었다. 하사관은 대체로 일본 군대에서 좋은 것보다 나쁜 습관을 익힌 군인들이었다. 그것은 곤조였다. 게다가 상사는 병사들에게 곤조 부리기 좋은 계급장이었다. 그래서 국방경비대에 들어와서도 병사들을 괴롭히는 따위 이런저런 미련이 남아서 상사 계급장을 원해 달았다. 부대에서 악명이 높은 후지모도 군조라는 김춘택 중사보다 경쟁적으로 병영을 누비며 으스댔지만, 이날만은 걸려든 게 없어서 따분하고 심심한 것이었다. 그의 뒤에는 어마어마한 사람이 돌봐주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그것은 그 스스로 자가발전시킨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결코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곽차순은 계속 이쑤시개를 질겅질겅 씹으며 조선말로 일본 군가를 흥얼거리며 병사동을 서성거렸다.
 
앵두나무가 내 옷깃 색이구나
요시노 산에 꽃이 가득하구나
야마토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전장에서 꽃잎처럼 지겠구나
 
‘야마토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전장에서 꽃잎처럼 지겠구나’라는 구절이 마음에 들어 그는 그것만 계속 흥얼거리는데 그것도 시들해졌다. 그는 뭔가 애절하고도 장중한 군가를 바꿔서 흥얼거렸다.
 
海行かば
우미유카바
바다에 가면
 
水漬く屍
미즈쿠카바네
바다에 잠긴 시체
 
山行かば
야마유카바
산에 가면
 
草生す屍
쿠사무스 카바네
풀 속의 시체
 
大君の辺にこそ死なめ
오오키미노 헤니코소시나메
천황을 위해 죽어도
 
かへりみはせじ
카에리 미와세지
돌아보는 일은 없으리
 
전쟁을 미화하고 죽는 게 소원이라는 일본 군대. 생각할수록 멋지고 장부답다. 비겁하게 사느니 용감하게 산화하라는 것이 아닌가. 그때 마침 병사들이 하나둘 씩 귀대하고 있었다. 곽 상사는 마침 잘됐다 싶어서 들어오는 병사들을 위병소 헌병들을 제치고 초소 옆에 그들을 세운 뒤 하나씩 차례로 닦아나가기 시작했다.
“김도배 일병, 어디 다녀왔지?”
그기 병사의 명찰을 보고 물었다. 외출 내용을 묻는 것은 월권이었다. 그들에게도 사생활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도는 가볍게 무시되었다. 그가 하면 하는 것이다.
“일등병 김도배 신고합니다. 영화구경 하고 왔습니다.”
“좋아. 그럼 너는?”
그는 곁의 병사에게 물었다.
“네, 저는 시위대 뒤를 따라다니다 왔습니다.”
“시위대에 가담했다고? 그럼 너는?”
“넷, 저도 시청 앞 광장에서 시위하는 걸 구경했습니다.”
“앞으로 나와 새끼들아! 니까짓 것들이 뭘 안다고 나서? 정치 집회장이 니들 놀이터야?”
그가 버럭 화를 내고 그들을 한쪽에 세웠다. 그의 입장에선 아주 잘 걸렸다. 눈치를 알고 다음 병사가 대답했다.
“넷, 저는 친척집에 다녀왔습니다.”
“내 너를 알지. 피안도 출신이 대구에 친척이 있을 리 없지. 친척 사는 곳이 어느 동네야?”
병사가 얼버무렸다. 그는 병사의 머리꼭지에 올라앉아 있었다. 곽차순은 거짓말을 몹시 못견뎌 했다. 가령 위세등등한 대대장 빽일지라도 거짓말하는 병사는 사실을 실토할 때까지 팼다.
“나는 거짓말하는 놈을 가장 싫어한다. 일본 군대는 그런 놈을 비겁한 놈이라고 한다. 헛소리 말고 너도 저놈들 곁에 가 서!”
시위대를 따라다녔다는 자는 십여 명이 되었고, 나머지 열댓 명은 별 볼일없이 외출한 일반 병사들로 구분되었다.
“일반 병사들은 돌멩이를 주워서 영점오초 안에 제 자리로 돌아오라.”
병사들이 곽 상사가 시키는대로 연병장과 모래밭, 병영 뒤로 흐르는 개울에서 돌멩이를 주워왔다. 어떤 병사는 그것도 실적이랍시고 굵은 참외만한 돌멩이를 군복 상의에 가득 담아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
“가져온 돌멩이로 저 빨갱이 새끼들에게 던져라!”
갑작스런 명령에 병사들이 주춤하자 곽차순 상사가 그중 한 병사의 정강이를 군화발로 디립다 깠다. 에구구구, 무릎을 싸안고 넘어진 그를 향해 각목으로 내려쳤다. 누군가 하나는 이렇게 시범적으로 당해야 병사들은 말을 잘 듣게 돼있다. 일반 병사들이 시위대 참여자로 구분된 자들에게 돌을 던지자 처음에는 그들이 주춤하다가 어느 순간 던진 돌멩이를 주워 일반병사들에게 맞받아 던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양 진영은 피터지는 투석전이 전개되었다. 본의 아니게 그들은 적이 되었다.
따분하게 영내 생활을 하다 보면 지겹고, 그래서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병사들을 이런 식으로 몰아세우는 것이지만, 그것은 분명 가학성 린치였다. 그러나 묵인되었다. 그는 간섭받지 않는 부대의 고문관이었다.
초급장교들은 경험많은 하사관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영관급도 명령이라기보다는 부탁하는 처지인지라 그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들은 초급장교들을 보면 “일본군이 연전연승한 것은 교범 때문이 아니라 고참들 때문이다!”라고 닦아세웠다. 그러면 갓 임관한 초급장교들은 기가 죽어 그들 눈치부터 살폈다.
장교의 길을 가도록 연대장이 그들에게 사관학교 입교 추천장을 써주어도 찢어버리는 것이 예사였다. 사관학교를 나와 장교가 된다 한들 전속을 자주 가니 현재의 기득권을 놓칠 수 있고, 또 더 좋은 일이 있어 보이지 않아서 응하지 않았다. 어느 면에서 장교들보다 우위에 있고, 실제로 권한을 더 행사하니 지금 하사관 생활을 즐기는 것이다. 군대가 꿀렁거리는 데는 이런 하사관들의 행패와 구타도 한 몫 했다. 쌍방이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곽차순이 소리쳤다.
“동작 그만!”
그리고 그는 일장 훈시를 했다.
“나는 일정 때부터 좌익이나 빨갱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좀 배웠다는 새끼들이 붉은 사상에 물들어서 나라를 개좆같이 바라보고, 지금 해방이 되어서도 군대 물을 흐리고, 병사들끼리 이간질하며 싸우고 있다. 이 새끼들은 일정 때부터 대일본제국을 갉아먹는 기생충이자 악마들이야. 그것들이 개판쳐서 나라가 이 모양이 된 거야! 알간? 이런 자들이 조선국방경비대 내에 엄연히 존재한단 말이다. 이것들을 때려잡기 위해 나는 북만주를 거쳐 38선을 넘어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왔다. 나는 미군정이 이런 놈들을 받아들인 것을 지금도 분개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용납하지 않는단 말이다! 알간?”
빨갱이에게 된통 당한 사람처럼 그는 그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족쳤으면 족쳤지 그들에게 당한 적은 한번도 없는 사람이었다. 일제에 세뇌된 결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일제의 눈으로 그는 보는 것이다.
폭동 이후 한동안 침묵 속에 빠져있던 대구는 어느 순간부터 다시 폭발성을 내연하고 있었다. 검거 선풍이 일고, 밤에는 야산대가 보복하러 산에서 내려오고, 그래서 쫓고 쫓기는 일이 하루 일과처럼 벌어지면서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곽차순이 관록을 과시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지금 국경(국방경비대)이 조선 군대야? 일본 군대야?” 중학을 졸업했다는 병사가 곁의 병사에게 투덜댔다. “이런 군대에 있을 필요가 있나? 난 도망쳐버릴 거야.”
“왜 그래. 조금만 견뎌. 좋은 군복도 지급된대잖어.”
곁의 병사가 위로하자 곽 상사가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밀담이가?”
“네, 네, 시내에 나가서 영화 본 얘기를 했습니다.”
당황하던 병사가 동료병사를 돕느라 이렇게 서둘러 변명했다.
“영화 제목이 뭐야?”
병사가 우물쭈물하자 즉각 주먹뺨이 날라왔다.
“이런 씨발놈! 니가 영화를 봤다고? 나를 쪼다로 아나? 일본 군대에서는 거짓말하는 병사를 가장 경멸한다. 비겁하고 혐오스럽게 본다. 그게 모두 쪼잔한 조선놈들이란 말이다. 두 발 벌리고 이 앙당 물엇!”
병사가 동작을 취하자 예외없이 그의 턱에 주먹이 날아갔다. 그가 고꾸라지자 그는 더욱 날뛰었는데, 그것은 마치 일부러 분노를 끓어올리는 것 같았다. 그는 조선국방경비대 하사관인지 일본군 하사관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시위꾼들은 두 사람씩 서로 마주 보라.”
그들이 마주 서자 그가 다시 명령했다.
“멈추라고 지시할 때까지 서로 뺨을 갈긴다! 실시!”
시위 참여 병사들이 처음에는 눈치를 보아가며 살살 때리는데, 그때마다 곽차순이 달려가 그 병사를 여지없이 팼다. 결국 서로 세게 뺨을 갈기는데, 이윽고 적대감이 생기고, 어느새 마주선 병사들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쎄게 쳤다느니, 니가 더 쎄게 쳤다느니 옥신각신하며 싸움으로 번졌다. 서로 치고 박는 과정에서 적의감이 생기고 편이 갈렸다. 분대끼리, 군 출신별로 나뉘어서 싸움이 벌어졌다.
“동작 그만!”
곽 상사는 시위 참여 병사들을 모두 영창에 집어넣었다. 몇 놈만 더 채워서 상부로 보고하면 과표가 올라간다. 포상을 받을 수 있고, 과거 일본군 헌병대 시절처럼 진급도 가능하다. 불평분자를 빨갱이로 몰아 잡아넣으면 혜택은 눈앞의 과일처럼 톡 떨어지는 것이다. 그는 경찰과 헌병대 정보팀과도 선이 닿아 있었는데, 1연대 정보장교 김창동과는 같은 뿌리였다.
곽차순은 시위 참가자 두세 놈만 더 채우면 된다고 보고 시내로 나갔다. 그 사이 영창에 갇힌 자들 중 셋이 탈주해버렸다. 갇힌 자와 같은 마을에 사는 초병이 저지른 일이었다. 초병은 갇힌 자들이 어디론가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포와 헌 양말, 건빵 따위 비상식을 넣어주는 것으로는 그들의 뒷 일을 담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 밤중 같은 마을 출신 병사를 풀어주었는데, 그때 다른 병사 두 놈이 초병을 겁주며 뒤따라 탈출한 것이었다.
“너도 공범이다!”
곽 상사는 초병을 반주검이 되도록 패고 영창에 가두었다. 조서를 꾸미고 강제로 손도장을 찍도록 하자 그는 꼼짝없이 빨갱이가 되었다.
이런 보고를 받고 최남근 대대장이 영창으로 달려갔다. 곽차순이 대대장을 보더니 차렷 자세를 취하며 보고했다.
“시위 주동자들입니다. 빨갱이들입니다. 본 하사관이 적발해냈습니다. 그런데 잡아가둔 놈 중 세 놈이 벌써 튀었습니다.”
그러자 영창에 갇힌 병사가 억울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와 쇠창살을 붙잡고 하소연했다.
“아닙니다. 저희는 외출 나갔다가 돌아왔을 뿐입니다. 억울합니다. 저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네놈들이 전평 놈들과 함께 하지 않았나? 투석전을 벌이다가 얼굴에 상처가 났잖아.”
그러나 병사도 각오한 듯이 맞섰다. 밀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나마 중학 출신이었다.
“곽 상사님이 우릴 엮어 넣으려고 싸움을 붙였습니다. 우린 전평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엽전들은 두둘겨 패야 한다니까. 게으르고 거짓말하고 훔쳐먹고, 한마디로 구더기같은 놈들입니다. 일본군에서 싹을 싹 잘라버렸어야 했는데 이거 빨리 패전이 되어서....”
그의 군의 모든 기준은 일본군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뼛속까지 일본군이었다.
“우리가 한 일이라면 부상자를 병원에 데려다 준 것 뿐입니다. 피 흘리는 사람을 방치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저놈들이 이제 실토하는군.”
“병사들에게서 의심 가는 부분이 있나?”
최남근이 곽 상사에게 물었다.
“금방 실토하지 않았습니꺼.“
“야비한 놈은 너야!”
최남근은 두말없이 곽차순을 영창에 집어넣었다. 며칠 후 이재복이 찾아왔다.
“한 가지 부탁드리러 왔소이다.”
“부탁이라니요?”
“곽차순 상사가 내 조카요. 먼 집안의 아들이올시다. 육순 누님이 찾아와서 빼달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억울하다는군요. 영창에 갇혔다니 대단히 유감입니다.”
그런 자의 인척이라니, 그는 이재복이 완전히 딴판으로 보였다. 인민의 벗이라는 사람이 이런 위선자라니... 최남근은 어렴풋이 곽차순이 대단한 빽을 갖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는데, 이재복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했다. 가방 끈이 짧은 그로서는 먼 집안에 외국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가 있다는 것을 사상의 여부를 떠나 자랑하고 떠벌이고 다니면서 자기 과시를 했으리라. 최남근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런 군인은 필요 없습니다. 격리시켜야 합니다. 군대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둔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말을 다 듣고 난 이재복이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내 과오를 용서하시오. 먼 집안 사정을 잘 알지 못했소. 감상적 혈연주의가 얼마나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인가를 귀관이 가르쳐주었소. 항쟁을 통해 민심의 소재가 어디에 있고, 모순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있는 내가 주위를 살피지 못하고 실수를 했습니다. 어줍잖은 사적 인연이 이렇게 눈을 멀게 하는군요. 그러니 다시 부탁하겠소. 그자는 묶어두되, 억울하게 갇힌 자들을 풀어주시오. 심려를 끼쳐드려서 미안합니다. 혁명은 사사로운 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뜻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최남근은 침묵을 지켰으나 그의 뜻을 헤아렸다. 쉽게 승복하는 그의 태도가 좋았다.
“내 천박한 양심이 수치스럽소.”
이재복은 거급 최남근의 손을 잡고 용서를 빌었다. 최남근은 갇힌 병사들을 풀어주고 대신 곽차순은 영창에 남겨두었다. 그것이 상부에 보고가 되었다.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는 하사관을 영창에 집어넣고, 좌익 혐의자를 풀어주는 차별적 행태를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 보고 내용이었다. 곧바로 사령부의 전속 명령이 통보되었다.
그는 험지라고 일컬어진 춘천 8연대로 전출되었다. 연대장 보직이었지만 8연대의 예하 중대는 춘천, 강릉, 원주 세 곳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각 중대가 연대장 통제를 받는다기보다 사실상 독립부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실병을 확보하고 있는 중대장들이 실권을 장악했으므로 그의 위상은 위축되었다. 연대장 보직이라고 해도 그는 실권이 없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다시 춘천 8연대, 최남근 박정희 이재복 오민균
 
“고생 많지요? 위로 차 왔습니다.”
의례적인 인사였지만 좌천성 인사가 안됐다 싶어서 이재복이 최남근을 찾아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는 춘천에 볼 일도 있었던 참이었는데, 그중 이런 저런 정보를 제공할 생각이었다. 군에는 정보팀이 설치돼 사찰활동이 강화되고 있었다.
김창동은 대구와 춘천을 차례로 다녀갔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첩보활동을 하던 스파이를 체포한 공로로 벌써 대위로 진급했다. 그런 그가 자신이 심어놓은 정보원이 영창에 갇혔다는 연락을 받고 대구로 내려갔다. 그리고 6연대 내부에 어마어마한 좌익 세포들이 대구 민간인 좌익들과 연계돼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야산대와 지역 게릴라들과 합세해 제2의 폭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창동이 전과를 올리기 좋은 분위기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곽차순 사건은 단순했지만 대구의 내막을 알아내는 좋은 기회였다. 곽의 인척이 관여해 도리어 빨갱이 혐의자는 풀어주고, 조카를 구금하도록 조치했다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비정성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공산당은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다 라는 것을 그는 거듭 확인했다.
“인척의 콧김이 약한 팔촌 누부의 자식이라도 그렇게 비정하게 돌아설 수 있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았을텐데 역으로 엮어버려? 개새끼...”
김창동이 이재복을 노리는데, 그는 이래저래 무거운 공기를 느끼고 대구를 떠나 춘천으로 갔다.
“최 소령이 오해를 산 것이 곽차순 사건 때문인데, 집안 조카로 인해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는 것이 미안합니다.”
“그 얘긴 없는 것으로 하지요. 지휘관이 책임질 일 있으면 지는 것 아닙니까, 괘념치 마십시오.”두 사람이 춘천의 닭갈비 집으로 들어서자 강릉 부대에 배속돼있던 박정희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산비탈의 외딴 닭갈비집은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데 최적의 장소였다.
“8연대는 내가 고참이지요?”
박정희가 웃으며 최남근을 맞이했다.
“하지만 대대가 분산되어 있으니 자주 보지를 못하는군. 강릉 대대도 복잡했지요? 잘 처리되어서 다행입니다만...”
송요찬 대대장 구타사건을 두고 한 말이었다. 최남근은 대구 6연대에서 이 소식을 들은 바 있다. 강릉 대대에서 벌어진 하극상 사건은 군 내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대구나 춘천이나 이런 사건이 자주 터져나와서 군부는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골치를 앓고 있었다. 뿅망치처럼 여기를 때리면 저기서 튀어나오고, 저기 타격하면 다른 엉뚱한 데서 사고가 터졌다. 박정희는 그런 것에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가까이 하는 자체가 생리적으로 싫었다.
오늘은 기분좋게 술 한잔 하고 싶었다. 북만주에서 함께 한 시절을 보냈던 최남근을 만나자 옛 추억이 떠올랐다. 생각할수록 그리운 시간들이었다. 영하 삼사십 도를 오르내리는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와 휘몰아치는 광풍,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서도 절도있게 근무하던 나날들이었다. 그중 부대 매점에서 사다가 안주도 없이 마신 옥수수로 빚은 오십도가 넘는 빼갈과 달콤한 고구마 막걸리, 혹한 속에서 그것을 마시며 우정을 꽃피웠던 것들이 새삼스러웠다.
“술통을 곁에 두니 부자가 된 기분입니까?”
최남근이 박정희 곁에 커다란 막걸리동이가 놓여있는 것을 보며 웃었다.
“천황폐하가 부럽지 않습니다.”
막걸리 한 섬은 지고 가지 못해도 뱃속에 담고는 간다는 것이 박정희고 보니, 그런만큼 그는 지금 술동이를 끼고 있으니 마음이 풍요로워진 기분이었다. 술만이 복잡한 삶을 위로하는 것 같았고, 실제로 몇 잔 마시면 만잡사가 잊혔다. 숙부로 여기는 이재복을 만나니 더욱 듬직한 기분이 들었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이 우리를 뭉치게 하는군요.”
박정희는 곽차순을 영창 보낸 사건으로 최남근이 춘천 연대로 밀려난 것을 빗대어 말했다. 최남근이 이재복의 눈치를 살피며 받았다.
“그 얘긴 없는 것으로 하지요. 이렇게 서로 만난 것으로 족하지 않소? 관동군 시절 생각 안나오?”
“그렇지요. 군속으로 들어온 자들이 전시 상황을 이용해서 하사관으로 현지 임관된 경우가 많은데, 그자들 출세했다고 완장차고 으스댔지요.”
박정희는 여전히 하사관 문제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이재복이 묵묵히 앉아있었고, 최남근이 웃으며 받았다.
“그 얘긴 그만 하자니까. 재미있는 일이 많았잖습니까. 내가 복무했던 군대에서는 외래자용 목욕탕과 직원용 목욕탕이 각각 1개소씩 있었는데, 어느날 상부에서 목욕탕 옆에 방을 몇 개 달아붙이라고 하더군. 알고 보니 위안부들을 수용하는 방이었소. 본래는 부대 밖 별도의 위안소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우리 부대는 거리가 멀어서 비공식적으로 이 애들을 부대 안으로 들였던 거지요. 조선인 하사관이 인솔자가 되어서 군병들을 데려와 순번을 정해서 방에 들여보내는데 와이로를 쓰는 놈한텐 좀 예쁘고 어린 위안부를 붙여주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더러운 만주족이나 몽골족, 또는 늙은 위안부 방에 넣어주는 거였소. 그러면서 이 방 저 방 판자벽에 구멍을 뚫어서 성교하는 것을 보며 히히덕거리는 거요.”
“그것 염치없는 짓이 아닌가요?”
박정희가 그렇게 말하면서 흥미를 보였다.
“그러게 말이오. 내가 그자를 단속하면서 물었더니 그렇게라도 세월 보내는 것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덮어두었지요. 말로는 그 시간에 영어 단자 하나라도 외워 이놈아 했는데, 그게 머리에 들어가겠소? 그자 말을 들으니 그럴 거라고 공감이 가더라고. 그런 환경에서 공부는 무슨 말라빠진 개뼈다귀겠소. 내일이 없는 삶, 말짱 도루묵이지. 그런데 사고가 터졌어요. 조선인 위안부가 어떤 조선인 병사의 탈영을 도와준 것입니다. 탈영을 적발한 일본인 상사가 쫓아오더니 위안부 담당 하사를 반 죽여놓고, 어린 위안부를 얼굴이 으깨지도록 밟아버리더군. 둘이 짜고 조선인 병사 탈영을 돕고, 삥땅한 군표를 나눠가졌다는 것이었소. 위안부도 엄연히 일본 군속 대우를 받는데, 그렇게 가혹하게 다룬 것을 보고 내가 피가 솟구쳐 오르더군. 인종 차별이 분명했으니까. 매일 이삼십 명씩 받느라 몸이 늘어진 어린 소녀를 그렇게 얼굴을 으깨버린 것은 단 조선인이란 이유 하나 때문이었소.”
“하긴 조선인만 보면 멸시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많았지요. 하사관들은 조선인 장교조차도 눈 아래로 내리깔고 보면서 건방지게 굴었고요. 그래서요?”
“내가 울분이 생겨서 참을 수가 없더군. 그래서 며칠 후 늦은 밤 그자를 흠을 잡아서 기합을 준다는 명분으로 갈대 숲이 있는 강으로 불러냈지. 니 총으로 얼음을 깨라고 명령하고 다 깨자 그놈 대갈박에 총을 한방 멕이고 강물 속에 집어넣어버렸소.”
“두렵지 않았습니까?”
“전쟁 말기라 그런 죽음은 흔했으니까요. 호수가 꽁꽁 얼어붙어서 집어넣으면 당분간 시체를 찾지 못하지요. 만주에서 해동이 되려면 여섯달은 가야 하니까, 하하하.”
“나도 못된 놈을 보았지요. 그자는 니뽄도로 중국군 포로병 두 명 목을 쳐서 피흘리는 사진을 찍어서 자랑하고 다니더군. 칼이 얼마나 잘 드는지 시험하려고 그 짓을 했다는 것인데, 내가 그걸 중국군 장교에게 귀띔해주어서 그자는 다음날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어느날 신병 몇 명이 보충돼 왔더랬지요. 그자들은 시시껄렁한 패거리들 행색인데 이상하게 장교들도 꼼짝 못하더군. 알고 보니까 동경제대생들이요. 그들은 본래 학병 장교로 나가는 것인데 반전 사상을 가져서 일반병으로 강제 징집돼온 자들이었습니다. 패망 직전이라 장교단도 패닉상태에 빠졌고, 그들의 당당한 위세와 좋은 집안과 좋은 학벌 때문에 병사, 장교 할 것없이 어느새 그들에게 복종하고, 그들 말에 세뇌되더니 따르더군.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이 있던 날은 ‘동양의 인권과 평화’라는 글씨를 써붙이고 교양강좌를 했으니까요. 일본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고 참으로 놀랐습니다. 충격이었지요.”
“일본놈들이라고 없겠나. 양심을 지키는 사람은 어디나 있는 거요. 우리보다 더 많을지 모르오. 그 점에 있어선 우리와 수준이 다르지.”
이재복의 말이었다.
“전쟁 말기가 되니까 탈영병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기차를 타고 이송 중 탈영을 하는데 방치 수준이었지요. 아마도 그들도 패망을 감지했던 것 같애. 어느새 패배주의에 젖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탈영병들은 십중팔구는 국부군이나 팔로군에 잡히지요. 고향으로 가겠다고 하면 보내주는데, 헌병분견소에서 파견 나온 헌병들한테 걸리면 골로 가지요. 언어상 발음을 들으면 조선사람인지 일본인인지 알 수 있으니 조선인은 쉽게 붙들리게 됩니다. 그런데 조선인 출신 헌병들이 더 곤조가 나빴지. 봐주는 게 없었다는 거요. 그런 중에도 잡힌 자들 중에서 조선독립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자가 있었는데, 그때서야 민족의식이 생기더군. 사회주의 사상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산동분견대에서 전멸당한 부대에서 살아나온 병사들 얘기 들어보면 팔로군 자신들은 강냉이죽을 먹으면서도 포로들에게는 멧돼지 국물에 따뜻한 조밥을 먹이더라는 거요. 그때 함께 패주한 악질 하사관들이 포로들에게 많이 당했습니다. 효수된 하사관들 두상이 감나무에 열매처럼 맺혀있었으니까요. 역시 사람은 선한 일을 하고 봐야겠습디다. 극한 상황에선 더욱 그래요. 벌써 그 시절이 두렵고도 추억이 되어 되살아나는군요.”
취흥이 돌자 박정희가 젓가락 장단으로 박자를 맞추며 일본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소학교 교사 출신답게 음정과 박자가 틀리지 않고 정확했다.
 
유키노 신군 코오리오 훈데(눈의 진군, 얼음을 밟으며)
도레가 카와야라 미치사에 시레즈(어디가 강이고, 어디가 길인지도 모르겠네)
우마와 타오레루 스떼떼모오께즈(말은 쓰러지는데 버리지도 못하고)
코코와 이즈꾸조 미나 테키노쿠니(여기는 어딘지 온 천지가 적국이구나)
마마요 다이딴 입뿌꾸야레바(어쩔 수 없이 멈춰서 담배 한 개비 피니)
타모니스꾸나야 타바꼬가 니호응(애석하게도 남은 담배는 두 개비뿐)
-유키노 신군(눈보라의 진군
 
노래를 마치자 노래의 비정함 때문인지 박정희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 군가를 부르면 국경의 차가운 밤이 떠오르면서 고국 산천이 그리웠지요. 돌아가봤자 별 볼 일 없는 고향인데 왜 그토록 고국 생각에 목이 메었을까요. 어디가 강이고 어디가 늪이고, 어디가 길인지도 모르고, 내가 여기에 왜 서있는지를 모른 채 자신을 돌아보면서 눈물지었지요. 결국은 충성스런 황군이 되는 것만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라고 마음 속으로 다졌습니다만... 알고 보면 쓸데없는 짓이었지요. 수치스런 일이었지요. 내 청춘의 초상이 고작 그것이었나, 되돌아보니 왜 이렇게 빈약한 영혼, 좁은 세계관을 가졌나 하고 자책을 해요...”
“나는 ‘라바울 고우타’를 부르면 저절로 가슴이 미어집니다. 사연이 있습니다.”
최남근도 추억에 잠긴 듯 말하며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사라바 라바우루요 마타쿠루마데와(잘 있거라, 라바울아 다시 올 때까지)
시바시 와카레노 나미다니지무(잠시 이별인데 눈물이 번진다)
코이시나쓰카시 아노시마 미레바(사랑스럽고 그리운 저 섬을 보면)
야시노 하카게니 쥬-지세-(야자잎 그늘에 十字星)
후네와 데테유쿠 미나토노 오키에(배는 떠나간다 항구밖 외항으로)
아이시 아노코노 우치부루 항카치(사랑하는 그 처녀가 흔들던 행커치프)
코에오 시논데 코코로데 나이테(소리 죽이고 마음속으로 우는데)
료-테 아세테 아리가토-(두손 합장하며 고마워)
-ラバウル小唄(라바울 고우타)
 
노래가 끝나고 최남근이 쓸쓸한 표정이 되자 박정희가 물었다.
“사연이 있다고 했지요?”
“그렇지요. 내가 라바울 전선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남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자 관동군 병력 수송 장교로 몇 달 그곳을 다녀온 적이 있지요. 그때 한 소녀를 만났습니다.”
라바울은 세계 2차대전 때, 일본군이 점령해 남태평양 전진기지로 사용하던 일본 육군과 해군의 전략기지였다. 파푸아 뉴기니아 옆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