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ese Arts

海行かば, かへりみはせじ 후회하지 않으리

Jimie 2024. 5. 18. 07:05

海行かば』(うみゆかば)は、日本国民歌謡の一つ、歌曲合唱曲。特に太平洋戦争中は準国歌、第二国歌とも呼ばれた(ただし、法的に認められたものではない)。

 

詞は、『万葉集』巻十八「賀陸奥国出金詔書歌」(『国歌大観』番号4094番。『新編国歌大観』番号4119番。大伴家持作)の長歌から採られている。作曲された歌詞の部分は、「陸奥国出金詔書」(『続日本紀』第13詔)の引用部分にほぼ相当する。

 

"

海行かば水漬く屍 

山行かば草生す屍 

大君の辺にこそ死なめ 

かへり見はせじ

 

바다에 가면 젖은 송장,

산에 가면 잡초 무성한 송장,

대군(大君)의 곁에서 죽을 수 있다면

죽어도 편안히 죽으리라

"

 

この詞には、1880年明治13年)に当時の宮内省伶人だった東儀季芳も作曲しており、軍艦行進曲(軍艦マーチ)の中間部に聞くことができる。戦前においては、将官礼式曲として用いられた。

 

  • 작사 :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 家持)
  • 작곡 : 노부도키 키요시(信時 潔)

일본 제국 가곡 군가. 오토모노 야카모치가 지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詩歌)집인 만엽집(萬葉集) 18권의 구절을 가사로 1937년에 노부도키 키요시가 작곡했다. 기미가요에 이은 일본 제 2국가정도의 취급을 받았다 .
당시 일본정부에 의해 국민정신강조주간이 제정되었던 무렵 NHK가 노부도키 키요시에게 작곡을 맡겼다.

 

信時潔の作品

当時の大日本帝国政府が国民精神総動員強調週間を制定した際のテーマ曲。

信時潔日本放送協会の嘱託を受けて1937年昭和12年)に作曲した。信時の自筆譜では「海かば」である。

 

放送は1937年(昭和12年)10月13日から10月16日の国民精神総動員強調週間に「新しい種目として」行われたとの記録がある。本曲への国民一般の印象を決定したのは、太平洋戦争時にラジオ放送の戦果発表(大本営発表)が玉砕を伝える際、必ず冒頭曲として流されたことによる(ただし、真珠湾攻撃成功を伝える際は勝戦でも流された)。ちなみに、勝戦を発表する場合は「敵は幾万」、陸軍分列行進曲抜刀隊」、行進曲『軍艦』などが用いられた。

 

なお、桜美林学園は創立以来、1958年(昭和33年)まで「海ゆかば」の旋律を校歌に採用していた。

 

歌詞

 
ウィキソース  海ゆかばの原文があります。
 

海(うみ)行(ゆ)かば  水漬(みづ)く屍(かばね)
山(やま)行(ゆ)かば  草生(くさむ)す屍(かばね)
大君(おほきみ)の 辺(へ)に こそ死(し)なめ
かへりみはせじ
長閑(のど)には死(し)なじ)

 

海行かば水漬く屍
우미 유카바 미즈쿠 카바네
바다에 가면 물에 젖은 시체
山行かば草生す屍
야마 유카바 쿠사무스 카바네
산에 가면 풀이 자란 시체


大君の辺にこそ死なめ
오오키미노 헨니코소 시나메
주군의 곁에서 죽는다면
長閑には死なじ
노도니와 시나지
헛되이 죽진 않으리

(한가히 죽진 않으리)

 

 

일본어 한국어 번역
海行かば
水漬く屍
山行かば
草生す屍
大君の 辺にこそ死なめ
長閑には死なじ
바다에 가면
물에 젖은 시체
산에 가면
풀이 난 시체
덴노의 곁에서 죽어도
돌아보는 일은 없으리

準国歌「海ゆかば」/ Umi Yukaba

https://www.youtube.com/watch?v=cRD7AHzXWwM 

 

 

 

군가의 어느 한 대목 치고 ‘죽음’을 노래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그 모든 군가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기미가요’ 국가(國歌)보다 더 많이 부른 ‘우미유카바(海ゆかば·바다에 가면)’였다. “바다에 가면 물먹은 시체가 되고 산에 가면 잡초에 덮인 시체가 되리라. 님(大君·천황) 곁에서 죽으니 무슨 아쉬움이 있으랴….” 바다와 산은 전쟁터의 주검(屍)이요, 묘지라는 이야기다. 천황은 우리를 황국신민으로 낳아주신 아버지요, 우리는 그 생명을 주신 천황의 ‘아카고(赤子·갓난아이)’다. 그러니 천황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곧 효의 길이요, 충의 길이다. 이것이 열 살배기 아이들이 죽어야 하는 논리다.

海ゆかば
바다에 가면

 

海(うみ)行(ゆ)かば  水漬(みづ)く屍(かばね)
(바다에 가면 물 젖은 시체)

山(やま)行(ゆ)かば  草生(くさむ)す屍(かばね)

(산에 가면 풀이 난 시체)



大君(おほきみ)の 辺(へ)に こそ死(し)なめ

 (천황 곁에서 죽어도)

かへりみはせじ

(돌아보는 일은 없으리)
후회하지 않으리

 

長閑(のど)には死(し)なじ)
(長閑には死な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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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3> 아버지의 이름으로 

 

 

자장가를 들으며 자란 아이들은 문자와 말을 알기 전에 벌써 노랫소리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말더듬이도 노래를 부를 때만은 신기하게도 말을 더듬지 않는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베네딕트 앤더슨은 근대의 내셔널리즘이 ‘출판 자본주의’에 의한 것이라고 했지만 말을 문자로 옮긴 것과 그것을 노래에 담은 것이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보기 드물게 군가를 대량생산해 그것으로 지배의 도구를 삼은 일본군국주의 밑에서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에서 ‘젊은 독수리(소년 항공 예비훈련병)’까지 『그리운 군가집』에 200곡이 넘는 군가(軍歌)를 출판할 수 있는 나라가 이 지상에 일본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글자대로 읽으면 군가는 행진곡처럼 군인들이 부르는 노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말하는 ‘제이국민’과 ‘소국민’들의 일반사람들에게 전투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내셔널리즘의 ‘소리 텍스트’다. “빵을 달라는 아이에게 누가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는 아이에게 누가 뱀을 줄 것이냐”는 성서의 말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꽃을 달라는 아이에게 총을 주고, 사랑의 동요를 들려달라는 아이에게 죽음의 군가를 가르쳐 준 것이다.

군가의 어느 한 대목 치고 ‘죽음’을 노래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그 모든 군가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기미가요’ 국가(國歌)보다 더 많이 부른 ‘우미유카바(海ゆかば·바다에 가면)’였다. “바다에 가면 물먹은 시체가 되고 산에 가면 잡초에 덮인 시체가 되리라. 님(大君·천황) 곁에서 죽으니 무슨 아쉬움이 있으랴….” 바다와 산은 전쟁터의 주검(屍)이요, 묘지라는 이야기다. 천황은 우리를 황국신민으로 낳아주신 아버지요, 우리는 그 생명을 주신 천황의 ‘아카고(赤子·갓난아이)’다. 그러니 천황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곧 효의 길이요, 충의 길이다. 이것이 열 살배기 아이들이 죽어야 하는 논리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천 년 가까이 우리는 충효의 사상 속에서 살아왔다. 그 대상을 일본의 천황으로 바꾸려 한 것이 식민지 아이들이 아침· 저녁으로 부른 동요 아닌 군가였다.

천황제 군민국가가 생긴 지는 불과 100년도 채 안 되었는데도 마치 그러한 천황 숭배와 황국사상은 태고적부터 있어 온 것처럼 허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우미유카바’의 가사 역시 1300년 전으로 올라가 『만엽집』(萬葉集4094番 大伴家持)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만엽집』이란 이름부터가 그렇듯 글자는 왕인(王仁)이 갖다 준 이두식 한자요, 말은 소위 도래인들이 주류를 이룬 한국말과 깊은 연관을 지닌 혼합체들이다. 거기에 가사 내용은 임을 떠내보낸 한 여인이 “아침 바닷가에 피어오르는 안개를 보시거든 님이여 그대 그리워 한숨짓는 내 입김으로 아옵소서”와 같은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임을 천황으로, 바다 위의 안개를 물먹은 시체로 그 이미지를 바꿔놓은 것이 ‘우미유카바’다. 작곡자 자신(信時潔)이 기독교의 찬송가를 듣고 자란 독일 고전음악의 애호가로 학도병 출정 때 자신의 곡이 불리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자장가는 어머니가 부르고, 군가는 아버지가 부른다. 어머니는 평화로운 잠 속에서 생명을 노래 부르고,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죽음을 노래한다. 그런데 그 노래가 진짜 우리 아버지들의 노래가 아니다. ‘근대화는 부권의 상실과 함께 시작했다’고 말하는 정치사회학자들의 지적대로 우리의 아버지들은 거세되고 추방됐다. 단지 실체 아닌 허구의 ‘무서운 아버지’가 부권을 부활시키려 우리에게 군가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깃발을 나부끼고 군가를 부르며 어린 가슴으로 다가오는 ‘무서운 아버지’가 있다. 역사학자들은 문서에 기록된 문자에만 의지하는 버릇이 있어서 히노마루(일장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 군가였다는 것을 잘 모른다. 식민지 아이들이 불렀던 ‘소리의 텍스트’에 대해서는 한낱 문맹자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깃발은 눈으로 보고 노래는 귀로 듣는다. 눈은 앞에 있는 것을 보지만 소리는 앞에서도 오고 뒤에서도 온다. 전 방향에서 우리를 에워싼다.

그러나 식민지 아이들은 천황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냥 군가만 불렀는가. 아니다. 일본 군대의 나팔소리에 이상한 가사를 붙여 노래 불렀다. “야마네코가 보쿠노 긴타마 돗데 있다. 이스고로가 반노 쥬니지고로다요.” 이 가사의 뜻이 무엇인지 70대 중반의 할아버지들에게 물어보라. 할아버지는 멋쩍게, 그러나 조금은 통쾌한 웃음을 지으시면서 선뜻 대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너만 알거라. ‘야마네코’는 살쾡이고. ‘보쿠’는 나, 그리고 ‘긴타마’는 남자의 소중한 그 불의 상징물이지. 그래, 그것을 밤 열두 시에 살쾡이 녀석들이 떼어갔다는구나. 생각해 보라. 야마네코의 살쾡이가 누구였겠니. ( #이어령 )